공모전에 나가서 1등을 하든 꼴등을 하든 중요하지 않다.
내게 중요한 것은 이 일을 빌미로 다시 신애와 연락을 할 수 있게 된다는 거였다.
‘정말 괜찮은 건가?’
나에 대한 마음을 접으려고 했던 신애.
만약 나도 특수한 상황이 아니었다면 신애가 마음을 접는 것을 내버려두진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꽉 잡으려고 노력을 했겠지.
그런데 쏟아지는 스케줄에 연화정 감독님의 숙제 그리고 기자회견의 후폭풍까지 겹치다 보니 신애에게 신경을 쓰는 게 불가능할 지경이었다.
기자 회견 이후.
속 시원하게 털어놓은 것은 좋았지만 내 여자들이 누구인지 파내려는 움직임도 존재했다.
그러다 보니 가족들에 대한 안전도 다시 한 번 점검을 해야 했다.
기자 회견 소식을 들은 조안나가 전화를 해서 자신도 가족에 끼워달라며 칭얼거리는 것도 달래야 했다.
당연히 그녀를 가족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그녀가 생활하는 공간이 다르다 보니 함께 생활 할 수 없는 건 당연한 거였다.
조안나도 한참 커지고 있는 회사 때문에 우리나라로 와서 함께 생활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저 함께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한 서운함을 내가 알아줬으면 해서 투정을 부리는 거다.
아무튼 그렇게 서운함을 표하는 경우 말로 풀어주는 것보단 직접 찾아가서 데이트를 즐기는 게 더 효과적이었으므로, 그녀를 만나러 다니며 없는 시간을 쪼개 썼다.
그러한 일정들이 쌓이고 쌓이다 보니 결국 나도 신애에 대한 감정을 묻어둘 수밖에 없었다.
‘그랬는데…사고 났다는 오보를 보자마자 연락을 해올 줄이야.’
감동을 받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나를 여전히 그만큼이나 생각하고 있었다는 뜻이니까.
어쩌다가 그림 얘기가 제일 먼저 나와서 웹툰 공모전 쪽으로 대화가 시작 된 탓에 나는 진짜 묻고 싶은 것들을 하나도 묻지 못하고 있었다.
적당히 그림을 봐줬다 싶을 무렵.
내가 먼저 신애에게 말했다.
“우리가 본 게 내 기자 회견 이후로 처음인가?”
“!!”
신애의 또랑했던 눈동자가 굳어버리고, 순식간에 표정이 우중충해진다.
피하고 싶었던 것을 꺼집어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제, 제가 좀 바빴어요. 스케줄도 점점 많아지구…또 선배님도 선배님대로 바쁘시니까.”
신애가 오랜만에 과거의 호칭을 꺼내왔다.
처음에는 나에게 꼬박꼬박 선배님이라고 불렀고, 그건 수업을 진행하고 꽤 시간이 흘러도 바뀌지 않았었다.
신애의 입에서 선배님 소리를 떼어내기 위해 했던 노력이 있는데, 기자회견이라는 단어 한 마디에 바뀌어버리다니.
“서운하네. 나 이제 선배님 된 거야?”
“아! 오빠….”
신애가 아차 싶었는지 황급히 호칭을 정정한다.
하지만 나는 이미 그녀의 말에서 무의식적인 거리감을 확인한 이후였다.
“그림 얘기는 그만하고, 슬슬 우리 얘기 좀 할까?”
“…….”
“지금처럼 계속 아닌 척 외면하고 있을 순 없잖아.”
“…….”
“네가 날 선배님이라고 다시 불러야 할 만큼 우리 사이 거리가 생겼는데 말이야.”
머뭇거리던 신애도 얼마 지나지 않아 내 말에 동의한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여왔다.
“…제가 먼저 연락을 끊었는데, 갑자기 연락해서 혼란스러워하셨을 것 같아요. 죄송해요.”
“죄송할 필요는 없어. 내가 다쳤다는 소식 듣고 놀라서 전화 해준 거잖아. 물론 나에 대한 마음을 다 접었을 거라고 생각해서 놀라긴 했어. 아직도 네가 날 생각해주고 있을 줄은 몰랐거든. 기자 회견 때 나한테 실망을 했을 거야.”
썸을 타던 남자가 뜬금없이 기자회견장에 나가서 여자가 있고, 애까지 있다는 고백을 했는데 정상적인 여자라면 정이 뚝 떨어지는 게 맞다.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하다는 게 바로 이거다.
기자회견 이후 점점 연락이 뜸해지는 신애를 보며 서운함을 느끼다가도, 그녀의 입장에서 생각을 해보면 기자회견을 보고 충격을 받은 신애를 달래주지 못한 내게 잘못이 있다는 생각도 든다.
“네, 사실은 기자회견 하신 거 보고 난 이후로 마음을 접으려고 했어요.”
신애가 우물쭈물하던 처음과 달리 각오를 제대로 했는지 자기 마음을 담담한 듯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오빠…랑 단순히 그림을 가르침 받는 관계는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오빠한테 설렜고, 마음이 갔어요. 함께 있는 순간이 행복했고 소중했어요. 그런데 그게 저 혼자만의 착각이라는 걸 그날 알게 됐어요.”
“…….”
“저 말고 다른 여자가 있다는 것도, 가정이 있으시다는 것도 저한테는 너무 충격이었어요. 법이 허락하는데 네가 뭐라고 그런 걸로 화를 내냐고 하면 저도 할 말이 없기는 해요. 그런데 사람 마음이라는 게 법대로 되는 게 아니잖아요.”
사랑하는 남자에게 다른 여자가 있고, 자신은 그것을 전혀 몰랐다면.
“근데 또 다시 생각을 해보니까 오빠랑 제가 그런 얘기를 할 만큼 중요한 사이도 아니었더라고요. 아직 뭔가를 시작하지도 않았잖아요. 나 혼자만 설렜던 거고, 나 혼자만 행복했던 거니까.”
마음을 접는 것도 저 혼자만 하면 되더라고요.
울먹이는 목소리로 신애의 말을 듣고 있으려니 안쓰러움과 미안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어진다.
내가 바쁘게 지내면서 천천히 신애를 잊어가는 동안, 신애는 나를 잊기 위해 눈물 젖은 밤을 보냈을 것이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가도 결국 내가 다쳤다는 소식에 앞뒤 가리지 않고 전화를 건 거다.
“지금도 네 마음은 여전한 거니?”
지금의 만남도 나를 정리하기 위한 수단 중 하나인지.
만약 그게 아니라면.
나에게 아직 기회가 남았다면.
이번에는 신애가 힘들지 않도록 내 쪽에서 적극적으로 다가갈 것이다.
“…아니요.”
역시 나를 걱정해준 건 신애가 착해서였….
금방이라도 나를 차버릴 것 같았던 신애의 태도가 바뀐 건 그 순간이었다.
“변했어요. 저 그냥 바보 하려고요. 멤버들한테 그냥 멍청하다는 소리 들을래요. 오빠랑 있으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데 이걸 포기할 순 없을 것 같아요.”
“!!”
마음이 여전하냐는 네 질문에 아니라고 대답해서 부정적인 의미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신애는 나에 대한 마음을 접으려 했던 마음에서 변했다는 대답을 한 거였다.
“무, 물론 저한테 기회가 아직 있다면요.”
호기롭게 외치던 신애의 목소리가 점점 줄어든다.
예능에서 보여주던 엉뚱하면서도 발랄한 매력을 가진 신애.
그런데 내가 뭐라고 저렇게 주늑이 든단 말인가?
“내가 정말 너한테 몹쓸 짓을 많이 했구나.”
이렇게 본인 잘못이 없는데도 큰 잘못을 한 건 멜리사 이후로 오랜만인 것 같다.
신애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다.
“네?”
“내가 정말 미안하다. 지금부터는 내가 말할 게.”
“아….”
신애는 내가 무슨 말을 할지 감이 안 잡히는지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
일단 겁먹을 필요 없다는 의미로 신애의 손을 잡았다.
“기자 회견 이후로 너한테서 연락이 뜸해지면서 네가 나에 대한 마음을 완전히 접었다고 생각했어. 너무 큰 비밀을 숨겨왔고, 앞날이 창창한 너에 비해 나는 부족한 게 많았으니까.”
“오빠…!”
“그래서 차라리 잘 됐다고 생각했어. 네가 뭐가 부족해서 여자 많은 나한테 오겠냐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그런데 나 다쳤다는 소식 듣고 먼저 연락을 해줬을 때, 많이 흔들렸어. 다시 널 만나면 순순히 놔줄 수 있을까 걱정도 많이 됐고. 그런데 네가 나한테 먼저 고백을 해줬네.”
지금 이렇게 말을 하고 있는 와중에도 이게 너한테 과연 좋은 일일지 모르겠다는 내 말에 신애의 눈가에서 물기가 서렸다.
다만 그 눈물은 슬퍼서가 아니었다.
내가 지금부터 할 말이 어떤 것인지 신애가 눈치를 챈 거다.
“앞으로 정말 잘 해줄게. 적어도 네가 내 옆에 있으면서 외롭다는 생각은 들지 않을 거야. 내 곁에서 계속 행복할 수 있게 최선을 다 해서 사랑할게.”
“…저 오빠한테 고백을 받게 될 줄은 상상도 못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안경을 쓰고 와서 얼마나 다행인가?
안경의 능력이 아니었다면 주변에서 우리를 찍기 위해 난리가 났을 것이다.
“그냥 내 고백에 대한 네 솔직한 마음을 말해주면 돼.”
“…흐이잉…다 몰라…좋아요. 오빠가 너무 좋단 말이에요. 저 오빠랑 사귈래요. 사귈래…흐흑! 누가 뭐라고 하든 상관없어요. 내가 좋은데 다른 사람들이 다 무슨 소용이야.”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말을 들었는지 몰라도 나와 사귀는 것에 부정적인 말을 많이 들은 모양이었다.
주변인들의 충고를 마냥 무시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앞으로 그런 말 안 듣게 해야겠다는 다짐을 하며 말했다.
“그래. 다른 사람들 말은 듣지 마. 내가 널 좋아하고, 너도 날 좋아하는 게 중요한 거지.”
“맞아요. 오빠랑 평생 사랑할 거야.”
침울하던 신애의 표정이 점점 살아난다.
마치 물 만난 물고기처럼 말이다.
눈에 물기가 서렸던 신애가 언제 그랬냐는 듯 헤실헤실 웃기 시작한다.
그리고 아직 우리가 연인이 됐다는 게 실감나지 않는지 계속 질문을 던졌다.
“헤헤헤. 그럼 우리 이제 연인인 거에요?”
“응. 연인이지.”
“흐아아~! 어떡해! 너무 좋아. 이거 꿈은 아니죠?”
나는 행복해하는 신애를 보며 웃은 후 맞은편에서 일어나 신애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신애의 손을 꽉 잡았다.
“꿈 아니야. 이렇게 감촉이 생생하잖아.”
“저 팔짱 끼어도 돼요? 이거 꼭 해보고 싶었거든요. 어…제가 너무 변태 같나요?”
“변태는 무슨. 연인끼리. 마음껏 끼워. 물을 필요도 없어.”
“세상에…이게 진짜라니….”
나는 점점 행복이 가득해지는 신애의 표정을 보며 뭐라도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까지 나를 좋아해주는 게 눈에 보이는 연인인데, 뭐를 주든 아깝겠는가.
그리고.
‘연애 초기가 확실히 풋풋하긴 하네. 이런 감정 되게 오랜만인데.’
함께 있으면 안정감을 주는 지금의 가족들이 주는 느낌이 싫다는 게 아니다.
그들과 함께할 때도 여전히 사랑스럽고 행복하지만, 이제 막 꽃이 피는 연애 초기만의 풋풋하고 간질거리는 연애의 감정들과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나 때문에 마음고생을 많이 한 신애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당장 생각나는 건 그거밖에 없는데….’
가장 먼저 떠오른 물건보다 더 나은 기발한 선물이 과연 있을까?
오랫동안 생각을 해도 처음 떠올린 물건 만큼 신애의 마음을 위로해주는 건 없을 것 같았다.
더군다나 오늘 얘기를 들어보니 멤버들에게 나와 있었던 일을 말하고 고민 상담을 한 것 같았다.
‘사귀게 됐다고 하면 호구라면서 멤버들한테 뭐라고 말을 듣겠지?’
나랑 사귀는 걸로 그런 일을 당하게 하고 싶지가 않았다.
신애가 나와 사귀는 걸 당당하고 뿌듯하게 자랑하고 다니게 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 이 선물이 신애에게 도움이 되어줄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오늘 처음으로 연인이 된 날이 아닌가?
사기 치는 것 같아서 양심이 살짝 아파왔지만, 그로인해 신애에게 큰 위로가 된다면 거짓말이 대수겠는가?
나는 신애의 손을 꽉 잡고 있던 손을 떼고, 안주머니에서 꺼내는 것처럼 반지 케이스를 상점에서 구매해서 꺼냈다.
“응?”
나한테 딱 붙어서 헤실헤실 웃고 있던 신애는 내가 손을 떼자 아쉬웠는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러다가 내가 자켓 안주머니에서 꺼낸 물건을 확인하고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이건 뭐에요?”
내가 급하게 구매한 선물은 바로 커플들에게 가장 의미가 있는 선물인 ‘반지’였다.
신애의 눈에도 반지 케이스가 또렷하게 보였지만 바로 아는 척을 하지 않고 모르는 척 굴며 물었다.
그러면서도 이 선물이 자신의 것일 거라는 걸 100% 확신하는 눈치였다.
“이걸 너한테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을 못해서 좀 당황스럽긴 하네. 부담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오늘 연인이 된 기념으로 받아줬으면 좋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