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왔다!”
“신애얏!!!”
“너 왜 이렇게 늦게 왔엉!! 기다리다가 목 빠지는 줄 알았네!!”
조금 멍한 표정을 짓고 숙소로 도착한 신애에게 멤버들이 달려들었다.
오늘 그녀가 누굴 만나러 갔는지 모르는 사람이 없었기에 그렇다.
진해솔이라는 남자에게 홀딱 빠져서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한 신애.
가까이에서 함께 하는 멤버들이 그 꼴을 내버려둘 리가 없었다.
여자가 남자 때문에 신세 망치는 일이 어디 신애 혼자만의 일인가?
멤버들은 워낙 들은 게 많은지라 남자에게 푹 빠진 신애가 너무 걱정 됐다.
순진해서 남자랑 손도 제대로 잡아 보지 못한 아이가 아닌가?
신애를 아끼는 멤버들이기에 그녀가 고통 받지 않기를 바랐다.
더욱이 신애가 사랑하게 된 남자는 진해솔.
너무 잘 나서 가만히 있어도 여자들이 붙을 남자.
그런 대단한 남자를 사랑하면 신애는 분명 마음고생을 잔뜩 하게 될 거다.
‘평범한 남자를 사랑해도 고생하는데, 진해솔 선배님은 너무 대단한 분이시잖아!’
때문에 멤버들은 신애가 마음을 접는 게 맞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 사람을 잊는 게 힘들어도, 결국 그 사람과 얽혔을 때 받을 상처가 더 클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신애도 멤버들의 말을 충분히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그래서 이번에 나갔을 때 깔끔하게 정리를 하고 오겠다고 호언장담을 하긴 했다.
하지만….
‘우리가 신애를 모르냐고!’
‘쟤 분명 아무것도 못하고 헤실헤실 웃기만 하다가 왔을 거야.’
멤버들은 신애의 멍한 표정을 보며 어떤 결과를 가져왔을지 추측을 했다.
무려 첫사랑이다.
마음 먹은대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어떻게 됐어?”
“얘 왜 이렇게 상태가 맹해.”
“충격 받은 거지. 도대체 무슨 얘길 한 건지….”
“그림 잔뜩 그려간 걸 보면 그걸로 시간 다 떼우고 온 거 아니야?”
“아휴~ 내가 저 그림 가져가지 못하게 했어야 했는데!”
멤버들의 호들갑에도 신애는 맹한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시냉!! 정신차려!!”
호들갑을 떠는 멤버들 사이.
유일하게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 사태를 지켜보고 있던 도도하게 생긴 멤버가 쯧쯧 혀를 찼다.
“홀렸네. 홀렸어.”
“홀려?! 우리 시냉이가 또 반하고 왔단 말이야?!”
“저 얼굴이 어떻게 첫사랑 접은 얼굴이니? 다시 반한 거야. 다 틀렸다구.”
“우리가 얼마나 노력해서 접게 만든 건데!”
“역시 1:1로 만나는 건 너무 치명적이었던 거지? 만나지 못하게 했어야 했는데.”
“시냉냉!! 말 좀 해봐~!! 진짜 또 반해버린 거야? 아무 말도 못하고 당하기만 한 거냐구우!!”
멤버들이 짤짤짤 어깨를 흔들자 신애의 몸이 흔들흔들 휘둘린다.
신애는 그제야 겨우 맹한 표정에서 벗어나 눈동자에 초점을 맞췄다.
“어…안녕. 나 다녀왔어.”
“그래! 너 집에 들어온지 얼마나 오래 됐는데 이제서 말을 해!”
“어떻게 됐어? 괜찮은 거 맞아? 너무 충격이 커서 아무 말도 못하는 거야?”
“운 거는 아니지? 운 거 맞나? 눈이 좀 부은 것 같은데.”
멤버들의 걱정이 우수수 쏟아진다.
신애는 그런 멤버들과 한 명 한 명씩 시선을 마주하며 쳐다봤다.
너무 정신이 없어서 멤버들에게 어떤 말부터 해야 할지 몰라 선뜻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신애는 손을 들어올려서 멤버들에게 반짝이는 무언가를 보여주었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오늘 일의 대부분이 설명이 될 것이므로.
“어? 이거 뭐야?”
“헉! 반지잖아!”
“대박. 보석 왜 이렇게 커? 이거 설마 찐이야?”
“근데 이걸 네가 왜 끼고 있어? 어디서 난 거야? 혹시 스트레스로 인한 과소비?!”
처음엔 멤버들이 이걸 누구에게 선물 받았다는 생각을 못했는지 엉뚱한 말을 했다.
그러다가 소파에 여유롭게 앉아 있던 멤버가 벌떡 일어나서 그녀의 손을 확인하더니 말했다.
“바보들아! 진해솔 그 남자가 선물해준 게 뻔하잖아! 너 사귀기로 한 거지?”
“으응…. 나 사귀기로 했어. 이것도 해솔 오빠가 선물해준 거야. 우리 사귀는 기념이라고.”
“이거 진짜인 것 같은데. 이거 너랑 같이 가게 가서 산 거야, 아니면 미리 준비해온 거야?”
“미리 준비해왔어. 나한테 고백을 하더니 이걸 딱 꺼내면서 주는데…. 그대로 덮쳐버릴 뻔했다니까?”
“꺄아악!!”
“말도 안 돼!”
“진짜 바람둥이는 다르네. 달라!”
“되게 비싼 것 같은데…. 얼마나 할까?”
“지금 중요한 건 이런 선물이 아니야! 신애 너 정말 감당할 수 있겠어? 그 남자가 앞으로 얼마나 속을 썪일지 뻔한데도?”
여자를 이렇게 잘 다루는 남자라면 앞으로도 계속 여자들이 꾸준히 생길 거라는 뜻이 된다.
다른 여자와 자기 남자를 공유한다는 게 마음을 먹는다 해도 괜찮을 수 있는 일이 아니지 않은가?
더군다나 신애가 첫 여자인 것도 아니다.
이미 그는 여자가 많고, 몇 번째일지도 모를 여자들 중 하나가 되는 거였다.
“냉정하게 생각해. 너는 스케줄로 바빠서 제대로 만나지도 못할 거고, 그 사람은 계속 다른 여자를 만나고 다닐 거야. 점점 무관심해지는 걸 너 혼자서 붙잡고 전전긍긍해야 할 거라고.”
“몰라몰라. 그런 거 더 이상 신경 안 쓸 거야. 나는 그냥 사랑하고 싶을 뿐이라고. 겁먹고 아예 시작도 안 하기로 하기에는 내 감정이 너무 아까워!”
“꺄악! 사랑하고 싶대! 어쩜 좋아!”
“우리 신애 박력 미쳤다!”
진해솔과 신애가 이어지는 걸 반대하던 멤버들도 정작 신애가 로맨틱한 말을 해오니 비명을 내지르며 설레어 했다.
“이런 기세면 나는 나쁘지 않다고 보는데….”
“그래. 원래 첫사랑은 아픈 거라더라. 그냥 좋은 경험 하는 거라고 치고 저질러버려! 젊어서 사랑해보는 거지!”
멤버들은 이미 반지에 홀딱 빠져서 신애의 연애를 응원해주고 있었다.
여자에게 이런 선물을 해주는 남자라니!
로맨틱하지 않은가!
“난 솔직히 진해솔 선배님한테 좀 편견을 갖고 있었어. 엄청 잘난 분이니까 여자들한테 엄청 못되게 굴 거라고 생각했거든. 아쉬울 게 없는 사람이잖아. 근데 이런 걸 준비해올 정도면 분명 다정하고 젠틀하실 거야! 그러니까 신애도 반한 거 아니겠어?”
“맞아. 우리 오빠 엄청 다정해. 잘 챙겨주고, 항상 나한테 잘 맞춰줘. 내가 막 들떠서 이것저것 두서없이 말해도 싫증내지 않고 다 들어주고 맞장구도 쳐준단 말이야. 그런 배려심 때문에 마음이 갔던 거야. 그리고 오늘도 그 모습 그대로였어. 여자가 많은 건 속상한 일이지만, 그런 걸로 놓치기엔 너무 아까운 사람이야. 내가 언제 이런 남자를 사랑해볼 수 있겠어?”
나중에 이 사랑으로 아프고 힘들어진다 해도 그냥 지금의 행복을 누릴 것이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고 한 선택이었다.
신애의 그러한 설명을 들은 멤버들은 더 이상 그들의 연애를 반대할 수가 없었다.
“근데 나는 아직도 좀 마음에 걸려. 이런 걸 준비할 거였으면 네가 먼저 연락하기 전에 그쪽에서 연락을 했어야 하는 거 아니냐구. 이건 뭐 오는 여자 안 막고, 가는 여자 안 붙잡는다는 마인드잖아.”
“그런 거 아니야!!”
멤버의 지적에 신애가 두 눈을 부릅뜨며 답했다.
그녀는 오늘 오빠에게 들었던 말을 멤버들에게 하나씩 털어놓으며 오해였다는 것을 피력했다.
“그 사람도 양심은 있네. 이번에 밝힌 비밀로 양심에 찔려서 연락을 안 했다는 거 보면.”
그렇구나 하며 이해를 하면서도 먼저 신애에게 연락을 했으면 더 좋았을 거라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나는 이제 불만 없어. 그냥 오빠만 생각하고, 오빠만 볼 거야. 다른 거는 다 필요없어.”
해솔 오빠에게 여자가 많다는 것도, 아이가 있다는 것도, 자신과 비교하면 너무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까지도.
모두 잊어버리고 사랑만 할 것이다.
신애의 선전포고 같은 다짐을 들은 멤버들은 조금씩 갖고 있던 불만을 속으로 집어넣고 친구의 첫사랑을 응원해주기로 했다.
“네가 좋다는데 우리가 뭐 어쩌겠니. 응원해줄게.”
“고마워!! 역시 너희들밖에 없어!”
멤버들까지 응원해주겠다고 하니 신애는 한결 마음에 편해졌다.
활짝 웃는 걸 본 멤버들은 신애가 저렇게 밝게 웃는 게 얼마만인가 생각해보며 울면서 상담을 요청하는 날이 부디 최대한 늦게 오기를 기도했다.
♧ ♧ ♧
이대로 영영 끊어질 것 같았던 신애와의 인연이 다시 이어졌다.
덕분에 나는 연애 초기의 들뜬 감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리고 마음고생을 시킨 것에 대한 확실한 애프터서비스도 필요했다.
내 능력을 이용한다면 신애에게 애프터서비스를 해주는 것쯤은 가뿐하게 해낼 수 있었다.
일단….
-이거 꽃 뭐에요?
숙소로 배달시킨 아침밥과 꽃 한 송이가 신애에게 무사히 전달 됐다.
“건강하려면 아침밥을 잘 먹어야 한다더라. 우리 같은 사람들은 함부로 먹을 수도 없잖아. 그래서 살 안찌는 음식 위주로 도시락 주문한 거야. 살은 최대한 안 찌고, 건강은 최대한 챙기게 영양 생각해서 짠 거니까 꼭 먹어. 그리고 꽃은 오늘 하루 잘 보내라는 내 작은 선물.”
-생각도 못했던 거라서 깜짝 놀랐어요. 고마워요, 오빠. 그리고 멤버들 것까지 챙겨주셔서 감사해요.
“너 혼자 먹으면 눈치보이잖아. 눈치 보지 말고 먹었으면 했어.”
내가 신애와 편하게 연애를 하려면 멤버들의 지지가 필요하다.
여자는 연애를 한다고 하면 그래?로 시작해서 이쁘냐? 로 끝나는 담백한 남자와 다르다는 것을 잘 안다.
멤버들에게 이미 상당히 밉보인 상태인 것 같긴 하지만, 계속 그 이미지를 내버려둘 순 없는 노릇이었다.
이렇게 천천히 점수를 따서 멤버들이 나를 호감으로 보게 한다면?
신애와 연애하는 게 한결 편해질 것이다.
아무래도 그녀가 여자 아이돌이지 않은가?
비밀 연애를 하려면 주변 인물들의 도움이 필요한 법이었다.
물론 내 능력으로 커버가 가능하겠지만 말이다.
“오늘 예능 스케줄 있다고 했지? 너무 열심히 하다가 다치지 말고 건강 조심해.”
-네, 오빠. 고마워요. 히히힛. 그…사랑해요!
신애가 갑자기 사랑 고백을 해버리고 냅다 전화를 끊어 튀었다.
나는 예상치 못한 말에 당황했다가 이내 피식 웃어버렸다.
“대답도 못해줬는데 그냥 끊어버리면 어떡하냐.”
결국 메시지로나마 신애에게 사랑 고백에 대한 답을 날려주고 산뜻하게 하루를 시작했다.
오늘 스케줄은….
“오늘이 이거 찍는 날이었구나.”
무대에 서는 활동을 끝내고 본격적으로 미뤄뒀던 CF와 화보 촬영을 진행하고 있는 중인데, 오늘 스케줄은 나 혼자서 찍어야 하는 광고였다.
‘남자를 유혹하는 향기’ 가 오늘 내가 찍어야 하는 내용이었다.
찍어야 하는 내용은 간단하다.
길을 걸어가다가 너무 좋은 향기가 나서 저도 모르게 여자를 붙잡아서 묻는 거다.
“향이 좋으시네요.”
“좋습니다. 다음은 좀 더 부드럽게 해볼게요!”
“향이 좋으시네요~”
“이번에는 수줍게!”
“향이…좋으시네요.”
“깜찍하게!”
“누나, 무슨 향수 써요? 향이 정말 좋으시네요!”
“진지하게!”
“…향이 좋으시네요.”
입이 닳도록 같은 말을 반복하고 반복한다.
이럴 때 연기를 배웠던 게 큰 도움이 된다.
연기를 안 배웠으면 지금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전전긍긍하고 있지 않았겠는가?
“잔망스럽게!”
잔…망스럽게?
뭐 깨물하트라도 하라는 소리야?
오늘 처음 본 사람인데?
“향이 좋으시네요.”
“아우! 좋아요!”
뭐가 달라졌는데.
아무튼 그렇게 겨우겨우 요구하는 조건을 맞춰주니 진도가 쑥쑥 나간다.
“하~ 찍기만 하면 다 좋아서 뭐를 포기해야 할지 벌써부터 걱정이네요.”
말은 그렇게 해도 재촬영이 수십 번이다.
이번에 함께 일하시는 감독님은 칭찬 하면서 ‘다시’를 요구하시는 스타일인 듯 했다.
이런 스타일의 감독님은 말하는 걸 전부 믿으면 안 된다.
좋다! 라고 말해도 그게 정말 좋은 건 아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