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님의 다시는 끝나지 않고 계속 됐다.
갑자기 예술혼이 불탔는지 내용을 갑자기 바꾸기도 하면서 계속해서 촬영을 이어갔는데, CF를 찍는 걸로 받는 돈이 워낙 많다보니 싫다고 뺄 수도 없었다.
돈을 받고 일하는 건데, 고작 이 정도를 귀찮다고 싫다고 하면 누가 나를 섭외해서 써주겠는가?
받은 만큼 일하는 것.
프로가 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래도 내가 연기를 제법 잘 하긴 했는지 같은 장면을 정말 심각하게 오랫동안 찍기는 않았다.
그저 감독님의 욕심에 촬영할 내용이 늘어났을 뿐인 거다.
중간에 촬영장을 들린 광고주도 그 모습을 흐뭇하게 본지라 감독의 예술혼을 막아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중간에 쉬는 시간도 짬짬이 있었는데, 그때 핸드폰을 꺼내서 확인하면 신애로부터 연락이 잔뜩 와 있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덕분에 쉬는 시간에는 신애와 알콩달콩 전화를 하거나 문자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신애도 촬영을 하고 있어서 바로바로 연락을 받거나 그럴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우리는 꾸준하게 하루 종일 연락을 해댔다.
‘이게 연애지!’
신애를 알았던 지난날에도 애교가 많다는 건 알았지만, 연애를 시작한 신애는 그야말로 애교덩어리였다.
덩달아 내 혀도 달달해서 자꾸만 짧아지는 기분.
그래도 연애 초기에 느낄 수 있는 감정들이었기에 기꺼이 이 간질거리는 감각들을 받아드리기로 했다.
“저어….”
“네?”
쉬는 시간에 신애랑 문자에 정신이 팔려 있다가 갑자기 누군가가 기척을 내며 다가왔다.
“아! 무슨 일이세요?”
오늘 나를 향기로 유혹한 여자 역할을 맡은 연기자분이었다.
첫 만남을 촬영했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그녀의 향기에서 벗어날 수 없어 하는 모습을 찍을 차례였다.
그녀는 아직 엄청난 스타라고 불리기엔 부족함이 있긴 해도, 차근차근 얼굴을 알리며 대세 배우가 되어가고 있는 훌륭한 신인 배우였다.
민영 누나가 이번에 CF를 찍는 상대 배우 이름을 듣고 연기를 참 잘 하는 친구라고 말해주기까지 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나보다는 유명세가 떨어지고, 데뷔를 한지도 얼마 되지 않은 탓에 나를 대하는 게 무척이나 조심스러워보였다.
“바쁘신데 죄송해요. 저희 회사에서 촬영장에 작은 간식이랑 커피를 돌리고 있거든요. 선배님께선 아직 가져가지 않으셨다고 해서….”
“아~ 그랬어요? 미안해요. 내가 정신이 없었네. 잘 먹을 게요. 맛있겠네.”
그녀의 손에 들린 간식과 커피를 받았다.
간식은 도넛과 아이스 아메리카노.
언제 먹어도 믿을 수 있는 조합이다.
도넛 한 입 먹고 우물거리면서 문자를 쓰고 있는데, 어째 뜨거운 시선이 느껴진다.
“?”
고개를 돌려 시선이 느껴지는 곳을 바라보니 멀지 않은 곳에서 시선의 주인공과 눈이 마주쳤다.
“!!”
깜짝 놀란 시선의 주인이 화들짝 놀라며 커피를 마시는 척 한다.
‘나한테 관심 있나?’
자의식 과잉 아니냐고.
그냥 쳐다본 건데 설레발치는 거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으나 워낙 이와 같은 일이 많았던지라 오해를 안 하기가 어려웠다.
저렇게 시선으로만 관심을 표현하는 건 아주 소심한 표현이었고 불쾌하지 않은 정도의 호감 표현은 나도 기분 좋게 받아들이고 넘어갈 수 있었다.
매니저 누나에게도 도넛과 커피를 나눠주고 다 먹은 후.
쉬는 시간이 끝나 촬영에 들어갈 무렵 먼저 다가가서 그녀에게 말했다.
“덕분에 잘 먹었어요.”
“아! 아뇨! 오, 오히려 먹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 이게 말이 좀 이상한데….”
자기가 말을 해놓고도 당황하는 걸 보니 꽤 귀엽기는 했다.
얼굴이 새빨개진 것이 나를 향한 호감은 100% 확실한 것 같았고 말이다.
아직 신인이라 그런지 자기 마음을 숨길 줄을 모르는 것 같았다.
‘저러다가 매니저한테 혼날 텐데….’
앞으로 찍을 내용을 생각하면 저런 태도가 도움이 될 것 같지도 않았다.
‘연기 잘 한다고 했으니까.’
적당히 예의를 지켜서 인사를 나누고, 다시 촬영에 들어갔다.
지금부터 찍어야 할 내용은 이렇다.
향기에 홀려 그녀에게 호감을 표현한 나.
그녀와 연인이 된다.
그리고 함께 데이트를 할 때마다 그녀의 향기에 자극을 받는다.
여전히 향기에 홀려 헤어 나오지 못하는 거다.
내가 홀딱 사랑에 빠진 역할을 하고 있으니 당연히 그녀는 도도한 모습을 보여줘야 했다.
쉽게 넘어가지 않는다는, 내 향기로 너를 유혹하기 충분하다는 자신감.
그것이 이번 광고의 핵심이었다.
‘연기 잘 한다고 하더니. 진짜 다른 사람이 됐네.’
본격적으로 촬영에 들어가고, 나는 민영 누나가 연기 잘한다는 말을 괜히 한 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수줍게 얼굴을 붉히며 내게 말도 잘 못 붙이던 그녀가 촬영에 들어가자 눈빛이 돌변해서는 나를 매혹적으로 유혹하는 매력적인 여인으로 바뀐 것이다.
그 변화가 워낙 대단해서, 연기하는 걸 알면서도 살짝 놀랐다.
유난히 창백한 흰 피부에 돋아지는 도톰한 붉은 입술.
그리고 진한 화장을 한 그녀가 나를 갖고 싶으면 뭐라도 해보라는 듯 도도하게 눈짓하는 것을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나도 제대로 연기해야겠네.’
이렇게 제대로 맞춰주는 상대가 있는데 연기를 허투루 할 순 없었다.
신인답게 빡빡한 연기를 하는 그녀에 맞춰 나도 표정을 확 바꿨다.
“사랑해.”
“!!”
그녀의 눈썹이 크게 파도를 탄다.
잠깐 흔들렸던 표정이 다시 단단해지고, 눈빛이 견고해졌다.
신인다운 패기.
나는 여유롭게 그녀의 뒤에서 허리에 팔을 둘렀다.
그리고 그녀의 목덜미에 살며시 코를 가져다댄다.
그녀의 머리카락을 천천히 들어올리고, 살내음을 맡는 척을 했다.
“너의 이 향기를.”
남자를 유혹하는 향기로운 살내음.
“컷! 좋습니다! 다시 한 번 해봅시다! 똑같이!”
감독님이 좋다며 다시 한 번을 외쳤다.
이젠 저 다시! 라는 말이 익숙해져서 별 다른 감정도 안 든다.
대신 어느새 또 얼굴이 빨개진 그녀에게 말했다.
“너무 가까웠을까요?”
“아, 아뇨. 괜찮습니다. 선배님. 그…냄새를 맡으셔서 불쾌하진 않으실지 걱정이 됐습니다.”
내가 어떻게 행동할지 이미 알고 있었는데도 생각보다 너무 가까워서 놀란 건가 싶어 물은 건데, 그녀는 고개를 꽤 격하게 저으면서 괜찮다는 것을 피력했다.
“냄새요? 향기롭던데요. 향수 뿌렸나 했죠.”
“앗! 감사합니다. 향수를 뿌린 건 아닌데…. 불쾌하지 않으시다면 더 가까이 와주셔도 됩니다! 전 더 가까워도 아무렇지 않습니다!”
“글쎄요. 더 가까이면 입술이 닿을 걸요?”
“헉! 그걸 의도해서 한 말은 아니었어요! 정말입니다.”
어쩐지 바짝 군기가 든 모습에 어쩐지 장난기가 돌았지만 꾹 눌러 참았다.
처음 보는 사이인데 짓궂은 장난을 칠 수는 없지 않은가?
나한테는 장난이어도 저 친구한테는 돌팔매질일 수 있었다.
“하하, 알았어요. 근데 너무 긴장하신 것 같네요. 나 그렇게 무서운 사람 아닌데.”
“제가 아무래도 이런 일이 익숙하지 않고 경험이 없다보니 긴장을 안 할 수가 없어서요….”
“하다보면 편해질 거에요. 아무튼 거리는 이 정도로 괜찮다고 알고 있을게요.”
“해솔씨! 해솔씨!”
“네?”
그때, 감독님이 꽤 다급하게 나를 불렀다.
“혹시 해솔씨, 입술 닿는 거 가능할까요?”
“입술을요?”
아까 우리가 했던 대화를 들은 건가 싶었는데, 그건 아닌 듯 했다.
이 감독님, 지금 어떤 장면을 찍으려는 건지 몰라도 거기에 흠뻑 빠져 있었다.
“목에 살짝 뽀뽀하는 식으로 말이에요. 연인 컨셉이니까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우리 팬들 뒤집어질 소릴 아무렇지 않게 하시네.
“죄송하지만 그건 안 될 것 같아요. 제가 이래봬도 아이돌이라서요. 우리 팬들 펑펑 울어요.”
기껏 CF 촬영을 했는데, 이 제품을 팬들이 불매할 수도 있는 일.
뽀뽀는 너무 나간 거였다.
감독님이 내 단호한 거절에 시무룩해졌다.
‘이 친구도 시무룩해지네?’
그걸 의도하고 한 말이 아니라더니, 내가 거절하니 상대역할을 맡은 친구도 은근히 실망을 한다.
그래도 이런 부분에선 단호하게 행동할 수밖에 없다.
감독 예술하자고 내 팬들 울릴 수는 없지 않은가?
결국 촬영은 아까 그대로 다시 시작 됐다.
여러 방향에서 바꿔 찍기도 하고, 같은 장면을 똑같이 찍기도 하는 반복 지옥이 시작 된 것이다.
나와 이 친구는 여러 번의 촬영에서 조금씩 자세를 바꿔보기도 하고 말을 바꾸기도 하면서 촬영을 이어갔다.
“이렇게 두 사람을 나란히 두고 보니까 되게 잘 어울리네요. 덕분에 찍을 맛이 납니다. 하하하! 두 사람이 주연으로 드라마 하나 찍으면 참 좋겠는데 말이에요. 해솔씨는 뭔가 다른 남자들이랑은 다른 매력을 갖고 있어요. 뭐랄까 진한 에스프레소 같다고나 할까? 반면에 유정씨는 부드러운 우유같거든요. 그래서 그런가 두 사람이 같이 있으니까 부드러운 라떼 같은 그림이 나와요.”
예술하는 사람이라서 그런가?
감독님이 우리를 표현하는 게 굉장히 독특했다.
“라떼 좋죠.”
우리가 잘 어울린다는데 거기서 뜬금없이 욕을 할 순 없는 노릇.
감독님의 말도 분명 칭찬이었기에 나도 긍정적으로 대답을 했다.
상대역 그러니까 심유정씨는 얼굴이 빨개져서 부끄러워하는 중이었고 말이다.
“라떼 CF는 아니지만, 잘 찍어주세요.”
“아유, 말해 뭐합니까. 맡겨보세요. 기깔나게 만들어 줄라니까.”
예술하는 감독님다운 호언장담.
촬영할 땐 좀 괴로워도 결과물은 믿고 맡길 수 있을 것 같아 나도 계속 열심히 촬영을 했다.
너무 열심히 촬영한 나머지 스캔들이 날 줄도 모르고 말이다.
♧ ♧ ♧
[여배우 킬러 진해솔, 신인 여배우와 핑크빛 솔솔~]
[진해솔을 사로잡은 신인 여배우 심유정의 매력은?]
[CF 찍으며 첫 만남 가진 두 사람. 진해솔이 먼저 호감 표현해.]
[제 향기가 좋다고 했어요. 수줍게 밝힌 심유정의 매력 포인트!]
“이게 뭔….”
토끼인 줄 알았던 여자가 알고 보니 여우였더랬다.
다양한 여자를 만나봤지만, 이렇게 감쪽같이 속은 건 정말 오랜만인 것 같다.
“진짜 연기 잘하네. 이건 인정이다. 인정.”
나와 스캔들이 난 것으로 인지도를 올릴 수 있다고 본 것일까?
인터뷰까지 잽싸게 해서 기사를 내기까지 했다.
이건 작정하고 나를 이용했다는 게 되는데….
아예 우리를 이용하기만 하는 건 부담이 된 건지 아니면 양심에 찔리기라도 한 건지.
인터뷰 내용에 아주 조그마하게 면적으로 스캔들을 부정하는 글귀가 있기는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면적이 차지하고 있는 글귀는 촬영하면서 내가 어떤 말을 하며 배려를 해주었는지, 그로인해 본인이 얼마나 설렜는지에 대한 내용으로 꽉 차 있었다.
‘누가 봐도 연애 초기 썸 타는 모습이잖아.’
나는 기본적인 예의를 지킨 것일 뿐인데 말이다.
팬들은 내가 기자회견을 했던 이후로 태도를 바꾼지 오래인지라 스캔들에 너그러운 상태였다.
내가 어떤 여자와 스캔들이 나도 그러려니 하는 태도를 보이는 중인 것이다.
문제는 스캔들이 진짜라면 괜찮아도 가짜면 문제가 된다는 거였다.
“기자 회견 영향인가?”
여자가 많다고 기자회견을 했다보니 자신과 스캔들이 나도 크게 화를 내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했을 지도 모르겠다.
그들의 예상은 어느 정도 맞아 떨어지기는 하다.
적어도 내가 연애를 막 시작하지 않았다면 그냥 주변인들에게 아니라고 해명하고 넘어갔을 테니까.
내 가족들이라면 아니라고 했을 때 그대로 믿어줬을 테니, 이 정도는 헤프닝으로 쳤을 터.
하지만 이런 스캔들은 이제 막 연애를 시작한 나한테 똥물을 뿌리는 일이었다.
가뜩이나 내게 여자가 많다는 걸 듣고 실망해 인연을 끊으려 했던 신애와 다시 만난지 며칠 지나지도 않은 지금 상황에서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