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장난치면 안 된다고 했지?”
휘이잉~
바람이 또 소리를 가져왔다.
사장님과 사모님들이 대화를 나누는 것을 말이다.
따끔하게 혼을 내려는 실에게 정령이 정보 하나를 알려줬다.
“…사장님한테 새로운 여자가 생겼다고? 그, 그걸 왜 나한테 말해? 나랑 상관없는 일이야.”
정령이 가져 온 소식은 사장님에게 새 여자가 생겼다는 것이었다.
저도 모르게 정령이 가져다 준 정보에 무의식적으로 귀를 기울이던 실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선을 그었다.
정령이 아무리 흔들어도 실은 끄떡하지 않았다.
‘약속 지켜야지! 소원!! 들어준다고 했잖아!’
정령의 땍땍거리는 항의가 실의 귓가를 시끄럽게 만든다.
실은 못 들은 척 무시하며 열심히 이유식을 만들었다.
“나중에. 아직은 아니라니까? 여기서 계속 일해야 하는데, 그런 짓 했다가는 바로 쫓겨날 거라고! 지금도 봐. 새로운 여자가 생겼다며. 집안 분위기가 엉망일 텐데 거기에 기름을 끼얹자고?”
사장님이 새로운 여자를 만들었고, 그 사실을 사모님들이 알았으니 분위기가 좋지 않을 수밖에 없을 터.
그런데 거기에 자기까지 사장님에게 꼬리를 치라니.
당장 해고 되어도 할 말이 없는 수준이었다.
‘분위기? 그냥 평범해! 평소랑 똑같아.’
“평소랑 똑같다고? 그거 되게 무서운 말인데….”
남편에게 새 여자가 생겼는데 사모님들 반응이 그저 그렇다?
이런 경우는 오히려 터졌을 때보다 더 위험한 거다.
남편에게 쌓인 스트레스를 주변인들에게 풀 확률이 매우 높기 때문이었다.
‘당분간 더 조심해야겠어.’
이번 고용인들은 솔직히 난이도 최하라고 볼 수 있는 매우 자비롭고 따스하며 착한 분들이었다.
더욱이 그녀가 하는 일도 굉장히 쉬웠다.
착한 아가 두 명을 전담으로 돌보고, 가끔 두 명의 도련님과 아가씨를 돌보는 일을 하면 됐으니 말이다.
그녀에게 따로 집안일을 시키거나 음흉한 짓거리를 하는 사람도 없고, 일정한 휴식 시간을 완벽하게 보장해주었으며, 함께 일하는 사람도 텃세를 부리지 않았다.
각종의 다양한 텃세에 항상 일하기가 힘들었던 그녀에게 이곳은 천국 그 자체였다.
그동안은 일을 하는 게 힘들지 않아도 주변 사람들이 그녀를 가만히 두질 않아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항상 갖고 있어야 했으니 말이다.
“우웅!!”
“냠냠. 한 번 더 먹어볼까요? 냠냠냠.”
“아암!”
“부우우웅~ 비행기 날아갑니다~ 슈우우우웅~”
“갸아!!”
아직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아가들이 그녀의 조그마한 손짓에 세상 행복하게 웃을 때를 보면 가슴이 따듯해지고, 그녀도 아가들처럼 행복함을 느끼게 된다.
“어? 애기들 밥 먹네요? 나 부르지 그랬어요. 혼자서 두 명 먹이기 힘들 텐데.”
“쉬고 계시지 왜 나오셨어요?”
그리고 그때, 쌍둥이 엄마인 정화가 주방으로 나왔다.
자신을 사모님이 아닌 언니라고 친근하게 불러달라고 말한 그녀는 실이 이곳에서 적응할 때 가장 큰 도움을 준 은인이기도 했다.
사려 깊고, 행동 하나하나 기품이 있어서 이런 분이야 말로 귀부인의 모범이 되는 분이라고 생각했다.
절로 존경심이 드는 분이었다.
‘정작 정실은 정화 언니 따님이셨지만….’
관계를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두 분이 유난히 닮아서 친척 관계일 거라 추측했는데, 사모님이 정화 언니에게 엄마라고 불러서 하마터면 표정 관리를 못할 뻔했다.
나중에 정화 언니에게서 사정을 듣게 됐다.
사장님과 사모님이 연인 관계가 되고, 집에 인사를 오며 자주 왕례하다 보니 서로 마음을 갖게 됐다고.
가장 놀라웠던 건 사모님들 사이가 생각보다 나쁘지 않다는 거다.
단순히 겉으로는 친한 척 하면서 뒤로 수작질을 부리는, 그런 대외적인 친분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녀들은 서로를 친구처럼 여겼다.
어떻게 그게 가능한지는….
‘사장님의 전륜함 덕분이겠지?’
아마도 사장님의 엄청난 밤일 능력에 비밀이 있지 않을까 싶다.
여자들끼리 다툰다고 해봤자 사장님과 하룻밤을 치르고 나면 곱고 순한 새색시가 되는 그녀들.
여자가 많아도 그토록 진하게 사랑을 받을 수 있는데 굳이 경쟁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배부른 암사자.
그것이 현재 사모님들의 상황을 빗대어 표현하기 딱이지 않을까 싶다.
문제는 그렇게 각자의 자리에 만족하고 있던 그들 사이로 새로운 여자가 들어왔다는 점이다.
‘알고 계시나? 아직 모르시는 건가?’
그녀는 정화 언니의 안색을 유심히 살피며 조심스럽게 대화를 이어갔다.
오늘 따님과 아드님이 얼마나 건강하게 잘 웃고 먹었는지, 기분은 어떤지, 변은 잘 봤는지 등등.
“항상 고마워. 덕분에 내가 편하게 잠 잘 수 있어. 주아 키울 때는 이런 호강은 상상도 못했는데 말이야.”
“제가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인 걸요.”
“이제 좀 쉬어. 이제 애들 내가 맡을게.”
“네, 언니.”
보통 저녁 9시부터 아침에 정화 언니가 깨어날 때까지 쌍둥이를 그녀가 전담해서 돌보는 편이었고, 이후에는 정화 언니와 칸나가 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하는 편이었다.
아침에 아이를 돌보는 것도 꽤 힘든 일이겠지만, 모두가 잠들어 있는 시간인 밤에 아이들을 돌보는 게 더 힘들기는 했다.
잠을 자더라도 수시로 깨서 잠투정을 부리고, 혹여나 갑자기 열이 오르거나 돌발 상황이 생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정화 언니에게 맡기면 그제야 그녀는 늦은 밥을 먹고 씻은 후 잠에 든다.
잠은 보통 오후 4시~5시쯤까지 자고 일어나며, 그 이후에는 다시 쌍둥이들을 돌보는 일에 합류하는 것이다.
그럼 쉴 시간, 개인시간은 어디 있냐고?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누구의 강요 없이 본인 스스로가 하겠다고 나서서 하는 일이어서 어쩔 수가 없다.
‘돈 값 못하는 건 내가 제일 경멸하는 행동이니까.’
그동안 고용인들은 그녀가 받은 돈 이상의 값어치를 해주기를 바라왔다.
코인이 귀한 값어치를 하는 화폐이기에 어쩔 수 없다는 건 알지만….
일을 시켜주는 걸 고마워하라는 태도는 정말 아니꼬왔다.
노동력을 제공하고, 그 값을 받는 건데 그녀가 왜 일방적으로 고마워해야 한단 말인가?
반면 이번에 고용 된 곳은 별 거 아닌 부분에서도 배려를 받고 있었다.
이러다가 버릇이 잘못 들어서 게을러질까 걱정이 될 정도로 말이다.
이젠 그들의 호의를 의심하지 않는다.
정말 좋으신 분들이다.
‘…딱 하루만이니까.’
하지만 그녀는 사모님들이 자신에게 잘 대해줄수록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이토록 호의를 보여준 분들의 뒤통수를 쳐야 했으니까.
이미 정령에게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했고, 그녀는 정령이 말한 소원을 무슨 일이 있어도 들어줘야 했다.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정령은 어디론가 떠나버릴 것이고 약속의 대가를 모두 치른 후에야 그녀에게 다시 돌아올 것이다.
‘아니면 영영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고.’
친구 사이도 그렇지 않은가?
좋았을 땐 평생 갈 것처럼 굴어도 한 번 삐끗해서 싸우고 나면 절교도 가능한 사이.
그래서 항상 조심해야 한다.
정령은 한 번 삐지면 오래가니까.
‘그래서 소원권은 최대한 신중하게 줬어야 했는데….’
정령과의 관계를 어그러트리지 않기 위해 서로 몇 가지 룰을 정했다.
그리고 반드시 그 룰을 어기지 않았다.
그건 정령도 마찬가지.
소원도 그 룰에 조항이 들어가 있었다.
상대방에게 크게 마음이 상했을 때 얻을 수 있는 소원권.
이 소원권을 사용하며 부탁을 받으면 무조건 들어줘야 한다는 것.
여기서 소원권의 부탁 범위는 상대방이 들어 줄 수 있는 범위 내여야만 했다.
‘사장님과 섹스하는 걸 소원으로 빌 줄 누가 알았겠어.’
섹스는 그녀가 들어 줄 수 있는 범위 내의 소원이다.
다만 그걸 하려면 지금의 안정적인 일자리가 위태로워지고, 자신을 따듯하게 대해줬던 사모님들을 배신하는 일이 된다.
때문에 실은 정령의 부탁을 들어주는 날을 계속해서 미루고 미룰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이번 의뢰가 끝나갈 때쯤에 저질러야 그녀가 버틸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죄송합니다.’
은혜를 원수로 갚게 되겠지만 그래도 어쩌겠는가?
그녀에겐 잠깐으로 끝날 의뢰에서의 인연보다 평생을 함께 할 정령이 더 중요했다.
그리고 앙큼한 도둑 고양이가 되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는 그녀에게 사장님에게 새로운 여자가 생겼다는 것은 눈이 번쩍 뜨여질 만한 화제였다.
‘과연 사모님들이 어떻게 행동하실까.’
배부른 암사자가 새롭게 영역 안을 비집고 들어오는 암사자를 공격할까, 아니면 너그럽게 받아줄까?
지켜볼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사모님.”
“또 사모님이야? 나 사모님이라고 불리면 너무 불편하다니까.”
“…언니.”
“그래, 얼마나 듣기 좋아. 근데 왜 불렀어? 뭐 필요한 거 있니?”
“기분 괜찮으세요? 아이들 데리고 가볍게 드라이브라도 다녀오는 거 어떠세요?”
“내 기분? 나 오늘 기분 괜찮은데.”
새 여자가 등장했는데도 기분이 괜찮을 수 있나?
절대 그럴 리 없다.
“저한테는 숨기지 않으셔도 돼요.”
“내가 뭐 숨겼어?”
정화 언니는 여전히 감이 안 잡히는지 어리둥절한 눈치다.
“고용인이 이런 얘기 하면 불편하실 거라는 거 알지만, 언니가 워낙 저한테 잘해주셨잖아요. 그래서 조금 주제넘게 위로를 해드리고 싶었어요.”
“위로? 나 위로 받아야 할 일이라도 있는 거야?”
정화 언니가 금방 심각해져서 물었다.
“모르시세요? 사장님께 새로운 여자 분이 생긴 거요. 저도 우연히 말씀하시는 걸 들은 거긴 한데….”
“아! 그거? 호호, 그거 때문에 아침부터 그렇게 눈치를 본 거였어?”
숨긴다고 숨겼는데 정화 언니의 예리한 눈치를 벗어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네가 그 일로 왜 눈치를 봐.”
“아무래도 고용인들은 고용주 기분을 살필 수밖에 없어요.”
“여긴 그럴 필요 없는데…. 하긴, 네가 그동안 일하면서 하던 게 있으니 어쩔 수 없지. 우리 일로 너한테 화풀이 하는 사람은 없을 거야. 그러니까 눈치 보지 말고 평소처럼 일하렴.”
“어떻게 그러겠어요. 언니 기분이 안 좋으실 게 뻔한데. 그러지 말고 저랑 같이 드라이브해요.”
“호호호, 정말 그래도 되겠어?”
애들이 있으면 어딜 한 번 나가는 게 정말 힘들고 큰일이 된다.
챙길 것도 엄청 많은데, 한 명도 아니고 쌍둥이이지 않은가?
그런데도 나가자고 제안한 것은 그런 불편함을 감수해서라도 그녀의 기분을 풀어주고 싶다는 뜻이 된다.
“그럼 한 번 같이 나가서 기분 전환 해볼까?”
정화 언니도 기분이 꿀꿀하긴 했는지 결국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녀의 기분도 풀어주고, 하소연을 들으면서 적당히 정보를 모으고.
그녀 입장에서는 일석이조의 일이었다.
“히잉~ 저도 같이 가면 안 돼요?”
집에 남아야 했던 칸나가 아쉬움에 투정을 부리긴 했지만, 정화 언니 기분 풀어주려고 외출하는 것이어서 다음 기회에 함께 놀러 가자는 걸로 달랬다.
“이렇게 놀러 나온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네. 네 정령한테도 고맙다고 전해줘. 덕분에 너무 든든해.”
실은 운전을 하지 못하므로, 운전을 하는 사람은 정화 언니였다.
그녀는 운전을 하고 실과 정령은 익숙하게 쌍둥이를 돌보는 식이었다.
“아이들을 좋아해서 놀아주는 걸 즐거워해요.”
“응응. 저번에 다칠 뻔했던 것도 지켜줬잖아. 그때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잠깐만 방심해도 아가들은 다칠 수 있죠.”
“주아 때도 내가 한 번 아차 하는 사이에 침대에서 떨어진 적이 있었거든. 다행히 크게 다치진 않았지만 그때 정말 세상 무너지는 줄 알았잖아.”
그렇게 잘 자란 아이가 진주아.
사장님인 진해솔의 정실 부인이 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사위를 유혹해 첩이 되었고 말이다.
“그나저나 일하는데 불편한 점은 없니?”
“없습니다. 항상 배려해주시는데 불편한 일이 있을 리가요.”
“그럼 다행이고. 해솔이한테 새 여자가 생긴 걸 네가 신경 쓸 줄은 몰랐어.”
“…주제넘었다면 죄송합니다.”
“에잇, 그런 얘기 하지 말라니까? 언니한테 혼날래?”
“안 그러겠습니다!”
그러지 않겠다고 대답을 하니 정화 언니가 한결 가벼운 목소리로 웃으면서 말했다.
“이왕 이렇게 나온 거 오늘 맛있는 거 먹고 들어가자. 마음 같아서는 밤까지 신나게 먹고 놀자고 하고 싶은데 애들 있으니까 맛있는 거 먹는 걸로 대신 하자구.”
“네, 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