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녀역전 세계의 아이돌-563화 (563/849)

부우우웅~

고속도로를 시원하게 달리는 차.

두 사람 모두 오랜만의 일탈에 절로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냥 집을 나섰을 뿐인데도 이렇게 기분 전환을 할 수 있다니.

실은 이 세계가 평화롭다는 사실이 새삼 부러워졌다.

“이렇게 오랜만에 나와서 달리니까 갑자기 바다 보고 싶다. 이대로 확 바다로 가버릴까?”

“바다를 가고 싶으신 겁니까?”

“아하하! 그냥 해본 말이야. 고속도로 타고 달리면 얼마 안 걸리긴 하는데, 쌍둥이가 있으니까 못 가지. 바다 바람 쐬면 쌍둥이들 감기 걸려.”

“그거라면 걱정하지 마세요. 정령이 잘 돌볼 수 있어요. 차가운 바람 쐬지 않도록 공기를 막아줄 겁니다.”

“…정말? 그럼 쌍둥이들한테 바다 보여줄 수 있는 건가?”

쌍둥이들이 쌀쌀한 바다 바람을 맞고 감기에 걸리면 안 된다는 생각에 가고 싶어도 선뜻 말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정령이 아이들을 돌볼 수 있다고 하니 솔깃해지지 않을 수가 없는 듯했다.

“그럼 바다로 진짜 달린다? 쌍둥이들 필요한 거 다 챙기긴 했지?”

“네. 넉넉하게 챙겼습니다. 부족할 일 없이요.”

“그럼 진짜 가는 거야. 와~ 이렇게 즉흥적으로 바다까지 달리다니. 너무 신나! 젊었을 때 이런 거 한 번 해보고 싶었거든.”

“지금도 충분히 젊으신데요.”

“호호! 내 나이가 몇인데 젊기는.”

진심으로 기분이 좋아 보였다.

지금 이 시간을 즐기고 있는 게 분명하다.

실은 그녀를 데리고 나온 것이 올바른 선택이었다 생각하며 덩달아 기분 좋게 미소를 지었다.

그녀들은 몇 시간을 달려 바다에 도착했다.

쌍둥이들은 난생 처음 보는 바다에 흥미를 가졌다.

아이들에게 바다를 실컷 구경시켜주고 약속대로 맛있는 것도 먹으면서 스트레스를 전부 풀었다.

“이렇게 좋은 곳에 오니까 가족 생각이 나네. 다들 같이 왔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야. 칸나라도 데려 올걸 그랬지?”

“가족 분들과 정말 사이가 좋으신 것 같습니다. 제가 여럿 집을 돌아다녀봤지만 이렇게 화목한 곳은 처음입니다.”

“우리가? 딱히 특별하다는 생각은 안 해봤는데. 사람 사는 곳은 다 비슷비슷하잖니.”

“아닙니다. 조금 솔직하게 말하면 사장님처럼 여러 여자 분들을 가족으로 삼으시면 대부분 집안 분위기가 좋지 않았습니다. 물밑에서 서로 경쟁하고, 견제를 하죠.”

“그러고 보니 실은 여러 집을 다녀봤다고 했지? 주로 귀족 집을 다녔고.”

“네. 아무래도 제 월급을 지불해줄 수 있는 사람은 어느 정도 지위를 갖고 있어야 가능하니까요.”

차원을 아우르는 화폐인 코인의 값어치는 높다.

이 세계 화폐로는 1코인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이 귀함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었다.

막말로 1조를 줘도 코인과는 교환이 불가능한 것이다.

“우리가 친하게 지내는 게 신기한 것 같네.”

“평화로워서 좋기는 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신기하다는 생각을 안 할 수가 없기는 합니다.”

새로운 여자가 생겼다고 했는데도 이토록 동요가 없는 이유.

단순히 그 여자가 스쳐지나갈 바람에 불과하다고 생각해서인 건지.

아니면 정말 새로운 여자가 들어와도 상관이 없는 건지.

“여자가 많기는 하지. 그래도 서로 다들 잘 지내보려고 노력하는 편이야. 해솔이가 가족에 대한 집착이 좀 있거든.”

“사장님께서요?”

“응. 특히 화목한 가족을 갖고 싶어 해. 그래서 집안에 분란이 일어나는 걸 정말 싫어하더라고. 여태까지 해솔이가 진지하게 화를 내는 걸 본 적이 한 번도 없는데, 우리끼리 싸우면 아마 진심으로 화내는 걸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

대놓고 말을 하진 않았지만, 여자들끼리 진지하게 감정싸움을 하면 정색을 하며 싫어할 거라는 걸 모두가 안다.

“우리는 아마 그게 그 아이가 가진 결핍이자 상처가 아닐까 생각해. 그래서 그 아이가 바라는 가정을 만들어주기 위해 다들 노력하고 있는 거고.”

더 할 말이 있는 것 같았지만, 가족이 아닌 그녀에게 깊은 속 이야기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는지 말을 줄인다.

하지만 지금 이 대답으로 실이 가진 의문은 해결이 됐다.

‘사장님한테 가정불화는 큰 상처. 그래서 새로운 여자가 들어와도 다들 싸우지 않고 쉬쉬하는 거구나. 그럼 내가 사장님과 하룻밤을 보내는 것 정도는 너그럽게 지나갈까?’

이 평화가 지켜질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는 사장님이 가족들에게 차별 없는 사랑을 주기 때문이다.

자신은 그에게 사랑을 받을 의도는 없다.

바라는 것은 그저 하룻밤 보내서 정령의 약속을 지키는 것 뿐.

그러니 하룻밤 도둑고양이가 되어 보내는 것 정도는 집안 분위기를 크게 해치지 않을 지도 몰랐다.

‘나쁘지 않은 것 같아.’

정령의 부탁에 불가능하다며 소리쳤었는데, 어느새 가능성의 유무를 떠올리고 있다는 사실에 살짝 자죄감이 든다.

하지만 되돌릴 수 없는 일이다.

정령은 이미 그날의 소리를 모으려고 단단히 마음을 먹었다.

‘그래도 아직은….’

새 여자가 생겼다는데 자신이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사장님이 여자를 밝히는 성격이라는 거다.

일편단심이었으면 그와 잠자리를 가지는 것조차도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많은 여성들을 가족으로 만들만큼 여성에 대한 욕심이 많은 분이니 그녀가 유혹을 하면 쉽게 넘어올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실은 그렇게 생각했다.

여자를 밝히는 사장님이니 유혹을 하면 금방 침대로 이끌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 ♧ ♧

-액션 연기하는 거 보고 싶어요.

“나중에 영화로 봐. 시사회 초대해줄게.”

-오빠 엄청 멋있게 나오겠죠?

“글쎄다. 감독님이 잘 찍어줘야 가능한 거 아닐까? 하하.”

-너무 무리하지 마시고, 다치지 않게 조심해서 찍으세요.

“응. 너도 오늘 촬영 잘 해.”

이젠 익숙해진 전화 통화.

오히려 하지 않으면 어색해질 지경인 일과를 끝냈다.

우리 스탭들이 있는 대기실에 들어가니 떠들썩하게 놀고 있었다.

영화 첫 촬영 날이었기에 다들 은근하게 어깨에 힘이 들어가 있는 중이었는데, 대화를 나누며 긴장을 푼 것 같아 다행이었다.

요즘 내가 꾸준히 연락을 주고받는 상대가 있다는 걸 아는지라 스탭들은 화장실 다녀오겠다고 해놓고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은 나를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해솔아!”

그때, 대기실 문이 열리고 익숙한 사람이 들어왔다.

“사범님, 오셨어요?”

“흐흐, 이제 감독님이라고 불러라. 액션 감독!”

“하하! 그러네요. 오늘부터 잘 부탁드립니다.”

연화정 감독님 영화에서 액션 감독 데뷔를 하게 될 홍주은 사범님.

액션 스쿨에서 나를 전담해서 가르쳐주셨기에 인연이 깊었다.

“이제 슬슬 몸 풀어야지?”

“넵.”

“내 액션을 하는 게 너라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홍주은 사범님도 액션 감독으로 첫 데뷔인지라 여러모로 긴장이 되는 모양이었다.

사범님은 나와 함께 몸을 풀면서 긴장을 풀어내려는 눈치였다.

“그나저나 정말 대역 없이 괜찮겠어? 네 실력은 나무랄 게 없다는 건 알지만…. 배우한테 너무 못할 짓 하는 거 아닌가 싶은데.”

“제가 할 수 있으니까 하겠다고 한 거에요. 걱정하지 마세요. 그리고 여기 올 때까지 이미 걱정은 배가 두둑해질 정도로 먹고 와서요. 부디 사범님까지는 그러지 말아주세요. 누구보다도 잘 아시잖아요. 제가 얼마나 잘 해낼지.”

“알지. 너무 잘 알지. 네가 얼마나 잘 하는지. 그래서 든든하기도 하고, 걱정도 되고 그러는 거야. 자꾸 욕심이 나니까.”

홍 사범님은 내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잘 알고 있기에 욕심을 버릴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난이도가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화면에 찍히는 장면은 화려해진다.

하지만 화려해진 만큼 액션 위험도가 올라가며 부상 위험도가 올라간다.

즉, 액션 감독은 난이도와 위험성을 적절하게 조절해서 액션 시퀀스를 만들어야 했다.

“너는 뭐든 다 잘 할 수 있을 거잖냐. 근데 그거 믿고 너무 난이도를 올려버렸다가 다치기라도 하면? 가뜩이나 대역도 없는데 말이야.”

“확실히 사범님 아니, 감독님이 어려워하실 만한 상황이네요.”

“그치? 내가 진짜 요즘 머리가 빠게지려고 해. 이러다가 대머리 되겠어.”

“제가 정말 안 될 것 같으면 안 되겠다고 할게요. 제가 다치면 영화가 올 스톱 되는데 무리할 만큼 어리석지 않아요.”

큰 사고가 나지 않도록 내 한계를 정해두는 것이 이번 촬영 때 가장 주의해야 할 일이었다.

사고가 난다고 해서 내 몸에 큰 문제가 생기는 일은 없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다치지 않았다고 변명할 수 없는 수준의 사고가 난다면 영화는 무조건 올 스톱이다.

“후, 아무튼 내가 몇 가지 단계별로 준비를 해봤거든? 하나씩 해보고 네 수준을 확인해볼 거야. 이게 원래 연습 때랑 실전일 때랑 많이 다르거든. 카메라 돌아가면 실수할 확률이 매우 높아요. 그러니까 연습 때 능숙하게 할 수 있는 수준에서 한 단계 낮출 거야.”

“뭐든 시켜주세요. 해보겠습니다.”

“그래그래. 역시 우리 해솔이가 진국이라니까!”

“준비는 다 했으니까 지금부터 슬슬 연습 해볼까요?”

홍사범님이 많이 불안해 하는 것 같아서 연습 하자는 말을 하니 매우 좋아하셨다.

그리고 스태프들이 촬영을 준비하는 내내 나를 붙잡고 놓아주질 않았다.

연화정 감독님이 참다못해 나를 데려갈 때까지 말이다.

“오늘 촬영이 액션만 있는 게 아닌데, 애를 그렇게 부여잡고 놔주질 않으면 어쩌자는 거야.”

연화정 감독님이 나에게만 들릴 정도로 투덜댔다.

“하하.”

“오늘 첫 촬영인데 기분이 좀 어때?”

이 세계에도 영화의 첫 촬영날 고사를 지낸다.

업계에서 오랫동안 이어져 내려온 전통.

어떤 사람들은 미신을 안 믿으니 돈만 쓰게 만드는 고사를 하지 않을 수도 있겠으나 연화정 감독은 반드시 고사를 하는 편이었다.

“저 때문에 오랫동안 기다려주셨으니까, 딱 기다리신 만큼 보여드려야겠다라는 각오랄까요?”

“나 정말 목 빠져라 너 기다렸어.”

“알죠. 그래서 한 말이에요. 목이 빠질 만큼의 액션 연기 보여드리겠습니다.”

“크하하! 자신감 있는 모습 참 보기 좋다니까. 자자. 고사 준비 다 됐다. 가자.”

“네.”

첫 촬영 메이킹 영상과 고사 장면을 찍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카메라도 한 켠에 준비되어 빨간불이 들어왔다.

“모든 연기자들, 스태프들 무사고로 촬영할 수 있게 도와주시고 영화 대박나게 해주십시오!”

와아아~!

대박납시다!

주연 배우인 나를 중심으로 함께 출연하게 된 배우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했다.

고사에 오신 선배님들에게 찾아가 일일이 인사를 나눴다.

그들과 처음 만나는 건 아니었다.

고사를 하기 전에 대본 리딩이 있어서 그곳에서 첫 인사를 드렸었다.

인사를 잘 해서 그런지, 의외로 선배님들이 내 인사를 잘 받아줬다.

덕분에 고사가 진행 되고 첫 촬영에 들어가는 내내 촬영장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

오늘 촬영이 없는 선배 배우도 촬영장에 모습을 드러냈는데, 아무래도 첫 촬영이자 나의 첫 액션 촬영에 대한 궁금증 때문인 것 같았다.

쟤가 정말 액션을 그렇게 잘한다고? 하는 눈빛이 이곳저곳에서 쏟아졌다.

홍사범님도 그 눈빛을 읽었는지 긴장감에 침을 꼴깍꼴깍 삼키면서 내게 액션 지도를 계속해서 반복하셨다.

연화정 감독님도 고생 끝에 드디어 시작 된 첫 촬영에 부쩍 힘이 들어간 상황.

모두가 긴장한 채로 첫 촬영을 바라보고 있는 가운데, 나는 무대 위에 올라가 팬들에게 첫 컴백 무대를 보여주는 심정으로 카메라 앞에 섰다.

컴백 무대를 할 때 멤버들도 그렇겠지만 나 같은 경우 지금 이 현장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홀려버리겠다는 생각으로 무대를 시작하곤 했다.

그리고 그건 무대 위가 아닌 영화 촬영장 앞에 섰을 때도 다르지 않았다.

오늘 내 액션 연기를 구경하러 온 사람들 모두가 나한테 홀딱 빠져버리도록.

모두가 입을 쩍 벌릴 만큼의 액션 연기를 보여줄 것이다.

자신만만하게 씨익 웃고 있는 사이 연화정 감독님이 첫 씬 촬영의 시작을 알렸다.

"레디, 액션!"

나는 이제 아이돌 진해솔이 아니라 배우 진해솔이 되는 거였다.

하루 아침에 다른 사람이 되는 것에는 충분한 경험이 있는 나에게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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