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쌓인 피로를 술로 싹 날려 보내겠다는 듯 스태프들이며 감독님이며 목구멍에 목젖이 없는 것처럼 술을 들이켰다.
어차피 잘 취하지도 않는 몸.
나도 빼지 않고 주는 술을 모두 받아먹었다.
회식하는 내내 분위기가 무척 좋았다.
기분 좋게 술을 나눠 마시며 피로를 잊고, 스트레스를 풀어내는 시간이 깊어져 갔다.
“아까 현장에서도 느꼈지만 분위기가 되게 좋은데? 다들 많이 친해 보여.”
“아무렴! 누가 지휘하는 현장인데. 분위기 씹창 낼 년이 어디 있다고.”
“아무리 분위기 좋은 현장이라도 이렇게 다 친해 보이는 현장은 몇 안 되잖아. 감독님도 대놓고는 아니어도 은근히 인정하고 있는 게 있는데, 현장 분위기를 잡는 건 감독이 아니라 주연 배우라는 거야.”
“제가요?”
“응. 물론 감독이 현장을 자기가 다 쥐어 잡는 걸 좋아하면 상황이 달라지겠지만, 우리 연감독님은 그런 스타일 아니거든. 주연 배우가 현장 분위기를 잡을 줄 아는 사람이면 은근히 쥔 고삐를 놓는 사람이야. 나는 네가 주연이 처음이다 보니 당연히 감독님이 잡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맞어. 나도 보고 놀랐잖아. 현장을 네가 꽉 잡고 있대? 내가 속으로 많이 놀랐다고.”
소원 형님까지 지용이 형의 말에 맞장구를 치신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가 현장을 잡고 있다는 말이 공감 되지 않는다.
스태프들에게 영향력을 줄 만큼의 일을 한 적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전 딱히 뭔가 한 적이 없는데요? 현장에서도 별 일 없었고요. 영화 찍는데 정신이 팔려 있어서 그런 거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어요. 형님이 말하셨던 것처럼 이제 막 주연으로 영화 촬영 하고 있는데 현장 분위기를 잡는 걸 제가 어떻게 하겠어요.”
“어허이,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는 거야. 아님 진짜 몰라서 하는 소리야?”
“정말 모르는 것 같은데?”
“맞아. 쟤가 아직 그것까진 몰라. 그냥 자기가 해놓고도 모르는 거야. 무의식중에 한 일이니까.”
“이야~ 부럽네. 부러워. 무의식중에 저절로 현장 분위기를 잡는다? 뭣도 모르던 옛날의 내가 들었으면 부러워서 질투났을 거야.”
“???”
형들이 말하는 ‘현장 분위기 잡는다’라는 게 정확히 뭘 말하는 건지 모르겠다.
“스태프들이 너한테 잘 해주지?”
“네? 네.”
“캬~ 넌 그게 당연한 줄 아는 거고?”
“…친절한 게 이상한 거에요?”
그들도 처음부터 나한테 친절했던 건 아니다.
하지만 그런 불친절한 태도도 촬영에 들어가면서 점점 사라졌다.
지금은 살갑게 서로 웃으면서 인사하고 웃고 떠든다.
“그래. 인마! 그거 대단한 거야. 자리가 자리인지라 자세한 얘기는 못해주는데 대충 알아 들어.”
“솔직히 얘는 액션하는 거 한 번 보면 다 눈 깔지 않겠냐?”
“흐흐, 그건 그래.”
지용이 형의 말이 여전히 아리송해서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는데 감독님이 화제를 바꿨다.
“그 얘긴 그만하고. 몸은 좀 어떠냐? 정신이 없어서 못 물어봤는데, 오늘 액션 하면서 다친 곳은 없는 거야? 보는 내내 조마조마했거든.”
“그러고 보니 너 그런 걸 하고도 몸이 멀쩡해?”
“맞어맞어. 막 철봉에 매달려서 빙글빙글 돌고 그랬지? 나는 너무 신기했잖아. 어떻게 철봉에서 두 팔로 그렇게 꼿꼿하게 서 있을 수 있는 거야? 몸이 근육으로 꽉 차 있나? 만져봐도 돼?”
철봉에 물구나무 서는 것처럼 팔을 이용해 꼿꼿하게 몸을 세우는 것.
누구나 쉽게 할 수 없는 액션이기는 했다.
“아잇! 남자는 사양입니다. 팔뚝으로 만족하세요.”
아예 사양은 못하고 팔뚝을 제물로 바치니, 형들이 냉큼 내 팔뚝을 만지며 근육에 감탄했다.
“이야~ 알이 꽉 차 있네. 엄청 단단하다.”
“이러니까 그런 액션이 가능한 거구나. 나도 운동은 좀 했는데 얘에 비하면 물살이야.”
“운동을 어떻게 하기에 이런 몸이 되는 거야? 이런 몸이면 그런 걸 해도 멀쩡한 거야?”
”에이, 멀쩡하진 않죠. 당연히 아픈 곳 투성이에요. 몸에 멍도 들고, 근육통도 있고요.”
“뭐야! 다친 곳 있었어?!”
내 말에 연화정 감독님이 기겁을 한다.
“그냥 긁힌 정도의 상처에요. 그런 걸로 엄살 피우면 촬영을 어떻게 하겠어요. 이 정도는 무대 설 때 연습실에서 경험하는 거랑 비슷해요. 제가 그런 경험이 없었으면 엄살을 좀 부렸을 텐데, 연습실에서 무대 연습할 땐 이것보다 더 심각하게 다쳐보고 아파보고 그랬거든요. 그래서 이게 별 거 아니라는 걸 알죠.”
나한테는 이 정도 부상도 아니었다.
우리가 무대를 완성하기 위해 연습실에서 흘리는 땀이 얼마인가?
무릎에 나는 멍은 당연한 거였고 근육통은 없으면 허전한 현상이다.
반면 촬영을 위한 액션은 짧고 굵게 하는 것이었기에 피로가 덜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래도 상처가 생기면 의사한테 갔어야지!”
내 덤덤한 말을 들은 감독님은 발작하듯이 의사를 부르려고 했고, 소원 형님과 지용 형은 그런 감독님을 말리면서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에헤이! 좀 가만히 있어 봐요. 애가 괜찮다잖아.”
“그게 평범한 거라고? 아이돌 진짜 쉽게 볼 게 아니라니까. 아까 그 액션도 다 아이돌 하면서 얻은 경험의 산물인 거잖아.”
“그렇죠.”
“나는 사람이 그렇게 움직일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어.”
술에 취한 세 사람은 내 액션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초반에는 감독님을 칭찬했던 것 같은데, 나중에 금칠을 당하고 있는 건 나였다.
영화가 잘 되는 건 감독님의 능력이 맞지만 영화를 잘 되게 만드는 이유의 근본을 따져보면 내 액션 덕이 컸기 때문이다.
“액션 배운 곳이 어디라고 했지?”
“액션 스쿨이요? 감독님이 추천해주셔서 간 곳이에요.”
“나도 거기 함 다녀볼까? 거기 괜찮냐?”
“정말 액션 도전하시게요?”
“네가 보기에 나는 못 할 것 같아 보여?”
“아뇨. 못하는 게 어딨어요. 누구든 연습만 하면 가능하죠. 그냥 너무 어려운 길을 선택하시는 것 같아서요.”
우리 영화가 개봉하면 맨액션이 유행으로 번질 거라고 생각하는 지용이 형.
“나는 트렌드에 뒤처지고 싶지가 않아. 이제 슬슬 나이도 있으니 뒷 물결에 넘겨줘야 한다고들 하는데, 도대체 내가 왜 나이 때문에 뒷 물결이 되어야 하냐? 난 평생 앞 물결 할 거야.”
“어이구~ 그려요. 평생 해먹으세요.”
소원 형님이 눈이 불 타오르고 있는 지용 형의 술잔에 소주를 따랐다.
“당연하지.”
결국 지용이 형에게 내가 다닌 액션 스쿨을 소개해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술자리가 이어졌다.
기분 좋게 술자리를 끝내고 다음날 아침.
♪♪♩♪~
핸드폰에서 난 울림소리가 내 잠을 깨웠다.
전날 회식으로 늦은 새벽에 잠들었기에 벨소리가 반갑지는 않았다.
“…여보세요.”
그런데 전화를 받고 나니 생각보다 꽤 심각한 내용이 전달 됐다.
-자고 있었니? 아, 어제 회식했다고 했었지!
“괜찮아요. 후, 어제 술을 좀 마셔서…말씀하세요. 잠 다 깼어요.”
-푹 쉬고 싶었을 텐데 미안. 근데 전달을 안 할 수가 없는 내용이라서.
“네. 무슨 일이에요? 문제 생긴 거에요?”
-응. 어제 우지용랑 박소원씨 카메오 출연했었던 게 유출 됐어.
“카메오 출연 사실이요?”
-아니! 그것보다 좀 심각해. 네가 액션 연기 하는 게 고스란히 올라왔거든.
“설마 제가 어제 찍었던 봉 액션이요?!”
-응.
그게 유출이 되는 건 꽤 치명적이다.
반대로 홍보 효과로 이번 사건은 확실히 큰 효과를 볼 것 같았다.
-그 영상이 꽤 적나라해서 지금 난리다. 영상은 최대한 빨리 내리게 움직이고 있는 중이야.
“감독님은요? 아세요?”
-그쪽도 알고 있지. 아주 사색이 됐어. 이렇게 적나라하게 액션을 보여줄 생각이 없었는데 다 털려버렸으니 말이야. 아! 영상 내렸단다. 휴, 그나마 좀 다행인데…. 하필 올린 녀석이 새벽에 올려놔서 몇 사람이나 봤는지 모르겠네.
“발견이 늦었던 거에요?”
-응. 우리도 화제가 된 이후에야 소식이 와서 말이야. 일단 상황이 이렇다는 것만 알아두고 있어.
“넵. 근데 영상은 도대체 누가 올린 거에요? 설마 스태프는 아니죠?”
이 바닥에서 더 이상 일하고 싶지 않고서야 스태프가 그런 짓을 할 리가 없다.
그러니 스태프가 아닐 확률이 높은데, 그럼 어떻게 내 액션을 찍을 수 있는지 의문이었다.
-아무래도 우지용씨 팬인 것 같아. 영상 올린 곳이 우지용씨 팬질 하는 거 올리는 카페였거든.
“아~!”
지용이 형을 따라다니다가 영화 촬영을 찍은 건가?
재주가 대단하다고밖에 볼 수 없다.
분명 스태프가 아니면 촬영장 근처로 접근할 수 없을 텐데, 거길 은밀하게 들어와서 영상 촬영까지 한 것이니 말이다.
“지용이 형도 사생팬 때문에 힘드나보네요. 아무튼 알겠어요.”
회사와 전화를 끊고 인터넷에 들어가서 영상을 찾아봤다.
영상이 내렸다고 하는데 그 영상을 퍼간 사람들로부터 2차적으로 영상이 올라오고 있었다.
그것도 얼마 지나지 않아 내려가겠지만 아직까지는 찾아보려면 볼 수 있는 상황인 것이다.
“쓰읍, 이거 난리 나겠는데?”
영상을 확인한 나는 이번 일이 영화에 마냥 부정적인 일만은 아닐 거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오히려 빨리 영화를 개봉하라는 사람들이 늘어나지 않을까 싶다.
영상에 나오고 있는 나는 와이어를 착용한 채로 철조물 위를 날아다니고 있었다.
대중들이 상상하는 액션, 그 이상의 모습이었을 게 분명했다.
실제로 댓글들도 이게 왜 CG가 아니라 찐이냐면서 당황하는 반응이 많았다.
-????????내가 지금 뭘 본 거임?
-계속 돌려보고 있다. 시바, 진해솔이 이 정도였어?
-이거 100% CG임. 아무튼 CG임.
-ㅈㄹ하지마라. 이게 어떻게 CG냐 ㅋㅋㅋㅋㅋㅋㅋㅋ
-액션 미쳤다. 역시 연화정 감독님! 크~ 믿고 있었다구우!!!!!!
-액션무비스타 시벌 개쎅시해
-물구나무를 땅에서 설 때도 힘들어 디지는데 봉 위에서 서네 ㅋㅋㅋㅋ 사람이가?ㅋㅋㅋ
-잘 서겟노
-윗댓 성희롱으로 신고합니다.
-연화정 감독이 맨액션에 꽂혔다고 해서 이번 영화는 걸러야겠다 생각했는데 이걸 살리네ㅋ
-이름값 오지네. 여윽시 믿보연!
-믿고 보자 연화정 감독!
-근데 진해솔이 사기캐라더니, 진짜인가 보네. 어떻게 얘는 못 하는 게 없음?
-노래 잘 부르고, 얼굴 잘 생기고, 작곡도 잘 하고, 심지어 이젠 연기도 잘 하는 거임? 미친. 세상 혼자 사네.
-어쩌면 이것도 홍보 마케팅일 수도 ㅋ
-그건 아닌 듯. 우지용 사생팬이 몰래 찍어서 올린 거랬음.
-이야~ 용자네. 영상 올린 걸로 고소 당하면 어쩌려고 ㅋㅋㅋㅋㅋ
-무식하니까 용감한 거지.
영상을 본 사람들의 댓글을 구경하고 있는 사이.
지용이 형 쪽도 상황파악이 됐는지 내게 전화가 왔다.
“네, 형. 잘 들어가셨어요?”
-어어~ 이게 뭔 날벼락이냐. 미안하다.
숙취 때문에 상태가 안 좋았는지 목소리가 맛이 가 있는 상태였다.
그런데도 나한테 사과한다고 전화를 한 게 대단했다.
“괜찮아요. 오히려 저희 쪽에서 제대로 막지 못해서 생긴 일이라 형한테 죄송하죠.”
일반인에게 구멍이 뚫린 스태프들은 아마 감독님한테 꽤나 호되게 혼나고 있지 않을까 싶다.
기분 좋게 회식하고 다음날 이런 일이 생겨서 참 안타까웠다.
-어쨌든 나 따라다니던 팬이 이런 일을 저지른 거잖아. 내가 사과 해야지.
“제가 그런 악질 팬한테 많이 당해봐서 하는 말인데요. 그 사람들이 저지른 일을 형 잘못이라고 생각하면 안 돼요. 그럼 오히려 그쪽에서 더 좋아해요. 그러니까 피해를 받은 거에 분노하세요. 죄책감 같은 거 느끼지 마시고요. 형 잘 못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