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72 - #85. 개봉 (3)
란나의 표정이 급격히 시들해진다.
가뜩이나 오늘 표정이 안 좋았는데 타이밍이 안 좋았다.
겸허하게 실수를 인정하고 서둘러 수습하기 위해 말했다.
“내가 또 부담준 것 같네. 이러지 말아야지 했는데 미안해.”
“아니에요. 제 문제인 걸요. 사장님은 잘못 없어요. 결혼하자는 말에 정색하는 제가 이상한 년이죠.”
“불편하면 우리 다른 얘기 할까?”
“하아~ 아니에요. 오히려 사장님이 저 때문에 불편해 하시는 거 보는 게 더 괴로워요.”
과거 나는 란나의 임신 소식을 듣고 본격적으로 결혼 준비를 했었다.
하지만 란나가 유산을 하게 되면서 결혼 준비는 무로 돌아갔다.
그녀가 도저히 결혼할 수 없을 것 같다며 거절을 했던 것이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하지.’
자칫 잘못하면 헤어질 뻔했다.
아이를 유산한 란나는 심한 우울증에 빠졌고, 자신의 실수로 아이를 잃어서 나를 볼 면목이 없다고까지 했다.
그때 내가 말을 돌리지 않았다면 헤어지자는 말이 나왔을 것이다.
‘100% 확실하지.’
그 위기를 겨우 모면한 나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란나를 대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꾸준히 결혼에 대한 의지를 보임으로써 그녀에게 내 마음이 변하지 않았다는 걸 확인시켰다.
그러지 않으면 헤어지자고 말할 게 분명하니 말이다.
란나는 유산이 온전히 자신의 잘못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내 잘못이 어찌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나는 그 아이가 죽지 않도록 할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이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녀가 유산으로 혼자 끙끙 앓을 때, 다른 일을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물론 그녀가 유산하기 전에 미리 나한테 조언을 구했다면 상황이 달라졌을 거라는 아쉬움을 아예 안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생각을 해서 그녀를 원망의 대상으로 삼아버리면 우리 관계가 너무 위태로워질 것 같아 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저렇게 자책하는 사람한테 다음부터는 나한테 좀 더 일찍 말해줬으면 좋았을 거라고 말하는 건 너무 잔인한 일이잖아. 그냥 혼자 삭히는 게 낮지.’
다음에는 내가 알아서 미리 일처리를 해놓으면 된다.
란나가 다시는 아이를 유산하지 않도록 그녀의 건강을 각별하게 신경 쓰는 거다.
물론 그런 끔찍한 일이 두 번이나 벌어지는 건 상상으로도 떠올려선 안 되는 일이다.
란나는 아이를 유산하고 1년이 넘는 시간을 미소를 잃은 사람처럼 살았다.
지금은 예전처럼 다시 웃고 다니지만, 아이를 유산했던 기일이 되면 집에 틀어박혀 나올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날은 꼭 시간을 내서 하루 종일 그녀의 곁을 지켜주는 편이었다.
“건강은 잘 챙기고 있는 거야?”
“그럼요. 잘 챙기고 있어요. 사장님이 가져다주신 영양제가 효과가 좋더라고요.”
“말 나온 김에 하는 소리인데, 오늘도 영양제 잔뜩 갖고 왔거든.”
“네? 어디에요?”
“현관에 두고 왔어.”
나는 일어나서 현관에 둔 짐들을 가져와서 펼쳐 보여줬다.
“이거랑 이거는 하루에 한 알 챙겨 먹으면 되고, 이건 즙으로 낸 건데 아침에 먹으면 돼.”
“또 이렇게 잔뜩 챙겨오셨어요?”
“다 먹어줄 거지?”
“…그럼요. 그럴게요.”
란나가 아이를 유산한 건 그녀 입장에서도 예상하지 못했던 비극이다.
어떻게 알았겠는가?
가볍게 생각했던 접촉사고에서 아이가 유산 당해버릴 줄.
큰 사고도 아니었다.
그녀는 목에 작은 근육통만 오고 크게 아픈 곳이 없었다고 한다.
피가 난 것도 아니었고, 차가 살짝 찌그러지고 만 사고여서 병원에서 검진도 받지 않고 그냥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게 평생 후회할 일이 된 거다.
다음날 아침, 배가 너무 아파서 잠에서 깨어났고 그녀는 하혈을 하고 있었다.
그때 란나는 직감적으로 큰일이 났다는 걸 깨달았다고 한다.
불길한 직감이 너무 확연해서 차마 나한테 연락을 할 수 없었고, 혼자서 허겁지겁 병원에 갔을 때 의사는 아이가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는 비극적인 결과를 받아야 했다.
‘유산한 이유가 너무 별 게 아니라서 더 어이가 없었지.’
만약 엄청 크게 사고가 났다면 납득이라도 쉽게 했을 것 같다.
큰 사고가 났으니 어쩔 수 없었다고.
란나가 건강을 회복한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고 말이다.
그런데 유산의 원인이 작은 접촉사고였다.
어떻게 이렇게 허무하게 아이를 잃을 수가 있는 건가.
그래서 란나가 더 좌절했던 것 같다.
본인의 부주의로 아이가 유산 된 것이니 말이다.
가벼운 접촉사고였어도 임신한 상태이니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았어야 했다고 말이다.
‘검사 받았으면 달라졌을까?’
이런 생각을 하고 싶진 않지만 하지 않을 수가 없는 생각이기도 했다.
아무튼 그날의 일 때문인지 란나는 내가 챙겨오는 영양제를 꼬박꼬박 잘 챙겨먹기 시작했다.
얘기를 들어보니 그 전에는 내가 준 영양제들을 꼬박꼬박 챙겨먹지 않는 편이었단다.
아직 20대인 그녀이니 영양제의 중요함을 모를 수 있기는 했다.
‘나도 젊을 땐 영양제를 먹는 게 귀찮아서 자주 빼먹었으니까.’
20대를 경험해 보았기에 그녀가 꼬박꼬박 챙겨 먹지 않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30대에 접어들면 자연스럽게 건강에 관심이 가고 영양제의 중요성을 알게 될 테니 말이다.
그게 얼마나 안일한 생각인지 모르고 말이다.
아무튼 그 일 때문에 란나와 결혼은 무기한 연기 됐다.
그녀의 상처는 몇 년이 지나도 아물 생각을 하지 않았고, 오늘처럼 결혼에 대한 생각을 은근하게 떠봐도 영 긍정적인 반응이 나오지 않았다.
‘결국 그 방법밖에 없는 건가?’
란나와는 헤어질 생각이 없으므로 반드시 결혼을 해야 했다.
그런데 이 고집불통 여자가 도통 고집을 꺾을 생각을 안 하는 거다.
그럼 나는 뭘 해야 겠는가?
란나가 마음을 추스를 수 있도록 배려를 해주는 것도 1~2년이다.
이대로는 계속 그녀를 방치하는 게 좋은 결과를 만들어낼 리 없었기에 다소 무리를 해서라도 그녀를 설득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란나가 말로 설득한다고 뜻을 꺾을 사람이 아니라는 거지.’
그렇다면 란나의 고집을 꺾을 방법은 뭐가 있을까?
‘고민 할 필요도 없지.’
임신으로 상처 받은 마음을 다시 임신으로 회복시키는 것.
그것이 내가 란나의 마음을 되돌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최대한 상처가 아물 때까지 기다리려고 했는데….’
자식을 가슴에 묻은 거다.
이 상처가 과연 시간이 지난다고 아물까?
그럴 리가!
애초에 나을 수 없는 상처가 날 때까지 기다리는 건 어리석은 선택이었다.
처음부터 잘못 된 방법이었고, 계속 잘못을 할 수는 없었다.
‘란나도 다시 임신을 하게 되면 마음을 좀 잡겠지.’
오늘 확실한 임신을 위해 상점에서 약까지 복용하고 온 참이었다.
란나는 전혀 모르고 있지만 말이다.
‘아무런 말도 없이 저지르는 건 란나한테 너무 폭력적인 일이겠지.’
그래서 오늘 날을 잡은 거였다.
친구들과 만나서 기분이 좋을 그녀에게 임신에 대해 물으려고 말이다.
문제가 된 건 친구와 만나고 온 그녀가 내 예상과 달리 기분이 별로라는 점이다.
기분 좋을 때 물어보려고 열심히 잰 각인데 말이다!
그렇다고 계획을 이대로 멈출 수는 없었다.
이미 약을 복용한 상태였으니까.
그녀를 보면 마음이 약해질 것 같아서 일부러 먼저 먹고 왔다.
“란나.”
“네?”
“혹시 임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
내가 머뭇거리다가 내지른 말에 란나의 눈이 커진다.
지금까지 우리 두 사람 사이에선 임신과 아이에 대한 말은 절대 언급 되지 않았던 금지어였다.
그걸 내가 깼으니 그녀가 놀랄 만도 했다.
“설마 제가 또 임신하길 바라시는 거에요?”
“응.”
“저랑 결혼하고 싶어서요?”
“결혼이 문제가 아니야. 나는 이미 우리가 가족이라고 생각하니까.”
“그런데 갑자기 임신 얘기는 왜 하시는 거에요?”
“그동안은 시간이 지나면 네 상처가 조금은 아물 거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시간을 두고 지켜보는 게 낫다고 생각했고.”
“…….”
“그런데 그게 아니잖아. 계속 아파하고 있잖아.”
“그래서 다른 아이로 제 상처를 메꾸겠다는 거에요? 유산 된 아이를 잊는 수단으로요?”
란나의 숨이 거칠어진다.
한 가지 생각에 꽂혀서 앞뒤 모두 잘라먹고 분노하기 직전이었다.
나는 황급히 그녀의 두 손을 꽉 잡고 진정시키기 위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그렇게 쓰레기였으면 네가 날 만났을까? 너한테 내가 그런 사람이야?”
“…방금 전까지는 아니었죠. 그럼 방금 그 말은 무슨 뜻이었는데요? 제가 오해를 한 거에요?”
“그래, 오해야. 우리 첫 아이는 영원히 내 가슴 속에 남아 있을 거야. 첫 아이는 첫 아이인 거고, 나는 너랑 둘째 아이를 갖고 싶은 거야.”
“갑자기 둘째는 왜요? 저는 지금이 만족스러워요. 일도 잘 되고 있고, 사장님이랑 관계도 괜찮았어요. 아니, 좋았죠. 이젠 모르겠지만요.”
란나에게 임신은 이토록 예민하게 반응을 하게 만들 만큼 아픈 단어인가보다.
“…내 말이 상처가 됐다면 미안해. 나도 사람이라서 어쩔 수가 없었어.”
“제가 사장님한테 뭔가 서운하게 한 거라도 있었어요?”
“시간이 지나도 곁을 내주지 않았잖아. 그래서 마음이 조급해졌나봐. 너를 붙잡을 수 있는 방법이 이것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
“내가 헤어지자고 할 줄 알았다는 거에요? 도대체 사장님 같은 남자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은 왜 하시는 거에요? 내가 그 정도로 미친년은 아니에요.”
응, 아니야.
내가 지금까지 너랑 안 헤어지려고 발버둥친 게 얼만데.
“내가 남자라서? 돈이 많아서? 그건 우리 관계를 모르는 사람들이 생각할 편견일 뿐이잖아. 내가 아는 너는 이대로 계속 시간이 흐르면 헤어지자고 했을 거야. 그래서 널 잡아야 했고, 내가 생각해낸 방법은 이것밖에 없었어. 둘째 아이를 만들어서 진짜 가족이 되는 거.”
“도대체 왜 이렇게 나한테 집착해요? 나 그렇게 대단한 사람 아니에요.”
“나한테 너는 세상에서 제일 귀한 사람이야. 남들이 겉모습만 보고 뭐라 하는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 이 세상에서 란나라는 사람은 너 하나뿐이잖아.”
내 말을 들은 란나의 표정에 물기가 서린다.
“오늘 제가 기분이 안 좋았던 건 사장님 때문이 아니었어요. 친구들이…좀 별로인 얘기를 꺼내서 그랬을 뿐이에요.”
“어떤 이야기였는데?”
란나가 머뭇거리다가 한숨을 쉬며 털어놨다.
“사장님이랑 결혼 언제 할 거냐고 묻더라고요. 누가 봐도 이상한 상황이긴 하죠. 남자가 여자한테 결혼하자고 매달리다니. 드라마 아니냐고 할 거에요.”
평소보다 예민함의 역치가 낮았던 그녀의 모습에 좀 이상하다 싶었는데 이런 사정이 있을 줄이야.
확실한 건 내가 날을 완벽하게 최악으로 잡았다는 거다.
주변에서도 그녀에게 결혼에 대한 문제로 걱정을 드러냈는데, 엎친데덮친 격으로 나까지 결혼 얘기를 꺼냈던 거다.
그녀의 과한 예민함이 그제야 이해가 됐다.
“아무튼! 그래서 기분이 안 좋았던 거에요. 사장님 때문 아니라고요. "
내가 믿지 못하겠다는 듯 표정을 지으니 그녀가 재차 말했다.
"정말 헤어질 생각 한 적 없다니까요? 사장님도 앞으로 그런 생각 하지 마세요. 친구들이 결혼 얘기 꺼낸 것도 제가 사장님한테 버림 받을까봐 걱정해서 얘기를 꺼낸 거에요. 제가 사장님이랑 헤어지자고 한다고요? 말도 안 돼요.”
“거짓말. 난 너를 버릴 수 없지만, 너는 아니야. 그래서 지금도 버림받지 않으려고 이렇게나 노력하고 있는 거고.”
상황이 이렇게 됐으니 할 수 있는 건 동정심 유발밖에 없다.
어떻게든 상황을 반전시켜서 그녀가 갖고 있는 임신에 대한 거부감을 풀어내야 했다.
아마 지금쯤 내 말에 찔리고 있긴 할 거다.
아이를 유산했을 때, 갈등했던 걸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