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76 - #85. 개봉 (7)
“언니도 아시는 구나! 해솔 오빠한테서 나는 향기 좋은 거!!”
“????”
얘가 지금 뭐라는 거야.
“으응! 알죠. 어떻게 모를 수가 있겠어요. 해솔이는 향도 좋고 맛도 좋아요.”
“네? 맛이요? 냄새인데 어떻게 맛을 아세요?”
“그, 그건 아직 어려서 신애씨는 알면 안 되는 거에요. 조, 좀 더 크면 알려줄게요.”
“에에?! 저 성인이거든요! 그리고 그게 뭔데 제가 어려서 안 된다는 거에요?”
엎친데 덮친 격으로 두 여자가 정신 나간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다.
나는 재빨리 두 사람의 대화를 끊었다.
“누나. 누나는 화장실 좀 다녀오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렇지?”
내 향기를 듬뿍 맡았으니 아마 아래가 축축하게 젖어 있을 거다.
“으응,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것 같아. 빨리 다녀올게.”
“그래요. 그대로 나갈 건 아니지? 마스크 쓰고 다녀와야지?”
“응!”
그걸 수습하고 오라는 뜻으로 그녀를 화장실로 보냈다.
민영 누나도 자각은 하고 있는지 힘겹게 내게 떨어져서 화장실로 향했다.
“…….”
“…….”
“…….”
이제 남은 건 대기실에 남겨진 이들 사이에서 도는 서늘한 정적을 해치우는 것이었다.
“크흠.”
“내가 방금 뭘 본…읍!”
“쉿! 쉿! 쉿!!!”
멤버들이 필사적으로 슬비씨의 폭주를 막아낸다.
민영 누나가 한 말의 의미를 못 알아들은 신애와 달리 멤버들은 대충 눈치를 챈 듯했다.
다행이라면 멤버들이 알아들은 그걸 신애에게 말해줄 생각은 없어 보인다는 거다.
나는 잘 부탁한다는 의미를 담아 웃음을 보이고 신애에게 말했다.
“나는 그럼 이만 가볼게. 팬미팅 준비하느라 바쁠 텐데, 나 때문에 시간을 너무 많이 쓴 것 같네.”
“아니에요. 괜찮아요!”
“내가 팬미팅 안 해본 것도 아닌데 뭐. 아! 그리고 너무 늦었지만 꽃은 선물이야.”
“정말 예뻐요. 감사해요.”
“그리고 이건 무대 올라가기 전에 하나씩 먹으라고 가져왔어.”
“이게 뭐에요?”
“긴장을 풀게 해주고, 건강에도 좋은 거.”
내게 자주 뭔가를 얻어먹었다보니 신애는 그렇구나 하며 금박에 쌓인 동그란 것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부끄러움이 다 가시지 않은 멤버들에게 하나씩 나눠주었다.
“어? 이거 초콜릿이네요? 우와, 대박 맛있어.”
“무슨 초콜릿인데 이렇게 맛있지?”
“어때? 긴장이 확 풀리는 것 같지 않아? 힘도 막 날 텐데.”
“흐흥~ 그런 것 같기도 하네요.”
내가 초콜릿을 약이라고 속였다 생각한 모양이다.
그런데 그거 진짜 약 맞다.
“빡세게 다이어트 하느라 오랜만에 먹는 건데, 진짜 맛있다.”
“앞으로 고생할 거 생각하면 이 정도는 먹어도 된다고 봐.”
멤버들이 초콜릿이라는 오해를 하며 내가 준 것을 입에 넣는다.
코인으로 산 거라서 그런지 맛은 두 말 할 것도 없는 수준이었다.
지금은 효과가 안 나타나도 무대 위에서 춤을 추다 보면 효과를 받기 시작할 거다.
내가 아주 중요한 무대에서만 멤버들에게 주는 약이었다.
한계를 넘어서는, 기대 이상의 무대를 만들고 싶을 때 이 약을 먹으면 멤버들이 무대 위에서 마음껏 날뛰곤 했던 것이다.
무대에서 체력을 쏟아낸 만큼 효과가 떨어지면 몸이 무거워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게 유일한 단점이었다.
그래도 몸을 상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니, 오늘 팬미팅을 잘 치르길 바라는 입장에서 이 정도 선물은 충분히 해줄 만 했다.
“정말 가시는 거에요?”
“응. 이제 자리 앉아서 팬미팅 하는 거 봐야지.”
“얼마 얘기도 못 나눴는데…. 그분이랑 만나면 무슨 얘기 할지도 잔뜩 생각해뒀단 말이에요.”
아쉬워 하는 신애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팬미팅 끝나고 보면 되지. 기다리고 있을게.”
“읏!”
자극을 받았는지 신애의 두 볼에 홍조가 생긴다.
‘아닌가? 화장인가?’
홍조를 띈 얼굴이 너무 예뻤다.
나를 올려보고 있는 신애의 눈빛이 무언가를 바라는 듯 간절해 보이기도 했다.
충동적으로 그녀의 입술에 얼굴을 가져다대려다가 꺄악! 하는 비명 소리를 듣고 어쩔 수 없이 볼로 방향을 바꿨다.
쪽-!
“지금은 이걸로 참아줘. 이따 만나면 제대로 해줄게.”
쿵.
문을 닫고 복도로 나왔다.
마침 맞은편에서 민영 누나가 다가오고 있었다.
꺄아아악!!!
안에서 들려오는 비명 소리.
멤버들이 뒤늦게 신애와 나의 뽀뽀에 반응하고 있는 듯했다.
‘다들 귀엽네.’
키스도 아니고 뽀뽀인데 저런 격한 반응이라니.
“벌써 가는 거야? 아직 대화도 못 나눴는데….”
“팬미팅 끝나고 다시 만나기로 했어.”
“그래? 다행이다. 힘들었을 텐데 맛있는 거 사주자.”
“그래.”
민영 누나는 처음 만난 신애가 생각보다 마음에 들었는지 너무 예쁘고 귀여웠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아까 전에 참지 못하고 중독(?)증세를 보였던 것을 걱정했다.
“나 너무 이상해 보였지? 끝까지 참았어야 했는데 못 참아버렸어. 히잉…. 나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어떡하지?”
“전혀. 그럴 정신도 없을 걸? 누나가 너무 예뻤는지 갑자기 어깨가 축 늘어졌더라.”
“정말? 나 예쁘대? 제대로 꾸미고 오지도 못했는데….”
확실히 이 누나가 제대로 꾸미면 정말 입이 안 다물어질 정도로 예뻐지긴 한다.
근데 오늘은 모자도 쓰고 있었고, 마스크를 쓰느라 화장도 진하게 못한 상태였다.
‘내가 얼굴을 잘 만들긴 했어.’
우리는 팬미팅장에 들어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안경을 다시 끼고 있었기에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나와 민영 누나를 알아보는 일은 없었다.
“근데 안경 빼야 하는 거 아니야? 이따가 무대 위에서 너 찾을 것 같은데.”
별 생각 없이 팬미팅이 시작되길 기다리던 중.
민영 누나가 문득 떠올랐다는 듯 말했다.
“아! 그건 생각 못했네.”
초대석은 자리가 따로 정해져 있었기에 신애가 찾으려고 들면 충분히 찾을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럼 안경 빼는 게 나을까?”
“지금은 어수선하니까 이따가 팬미팅 시작 되면 슬쩍 빼는 게 어때? 그러면 들키는 시간을 좀 줄일 수 있잖아.”
“응, 그러는 게 좋겠네.”
민영 누나의 조언을 따르기로 하고, 대화를 나누고 있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팬미팅이 시작 되었다.
여태까지 무대 위에서만 서 있었을 뿐, 아래에 내려와 있었던 적이 거의 없어 색다른 기분이 들었다.
‘무대 아래에 있는 게 되게 어색하네.’
어색함도 잠시.
나와 민영 누나는 신애의 팬미팅에 조금씩 빠져들었다.
비주얼로 그룹의 인기가 갈리는 남자 아이돌에 비해 여자 아이돌은 살아남기 위해서 많은 것들이 필요했다.
일단 실력과 외모는 기본적으로 필요하고, 끼와 넘치는 매력 그리고 튼튼한 멘탈까지 필요했다.
한 마디로 모든 능력치가 기본 이상이어야 하는데, 대부분 그 능력치를 기본으로 갖고 데뷔를 하니 S급 중에서도 S+와 S++들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세계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렇다 보니 여자 아이돌 사이에서의 치열함은 전쟁이라고 표현해도 부족함이 없다.
‘회사가 주아 누나를 포기했을 만큼 여돌의 세계가 엄청나게 빡세다는 거지.’
주아 누나는 누가 봐도 완성 된 연예인이었다.
그런데도 끝내 아이돌로 데뷔하지 못하고 배우가 됐다.
그러니 여돌로 팬미팅을 하고 있다는 건 신애와 그 멤버들이 대단한 사람이라는 걸 증명하는 일이었다.
“우와, 응원법도 있나봐. 재밌다.”
민영 누나는 낯선 아이돌 팬 문화에 금방 적응해서 열심히 응원을 따라 불렀다.
“팬미팅에 이 정도면 콘서트 갔을 땐 난리 나겠는데?”
그동안 가족들이 내 콘서트에 초대 돼서 온 적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민영 누나는 이상하게도 타이밍이 맞지 않아서 여태까지 내 콘서트에 온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언젠가는 꼭 보러 갈 거라는 말을 하곤 했는데 바쁘게 활동하고 있는 누나다 보니 스케줄 맞추는 게 쉽지가 않았다.
“다음 공연에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갈 거야!”
“응응. 알았어.”
“네가 무대 위에서 춤추는 걸 보면…나 기저귀 차고 가야 할지도 몰라.”
쿨럭!
‘이 누나가…부끄러운 줄을 모르네.’
부끄러운 척은 자주하는데, 하는 행동이나 말을 들어보면 부끄럼 타는 사람 같지가 않다.
지금도 봐라.
저 누나 표정 보면 방금 한 말이 결코 농담으로 한 소리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차라리 농담이었으면 했는데 말이지.’
남들에겐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아 보여도 민영 누나를 잘 아는 나는 저게 결코 쉰소리가 아님을 알았다.
방금 전 내 향기를 맡았다가 아래를 흥건하게 적신 누나이지 않은가?
그때 흥분이 아직 다 가시지 않았는데, 내 무대를 상상하고 있으니 저런 소리를 할 법도 했다.
“아이돌은 정말 대단한 것 같아. 어쩜 저렇게 잘 하는 게 많은지 모르겠어. 나는 연기 하나만 하는 것도 힘든데 말이야.”
“각자 직업마다 장단점이 있는 거지.”
무대 위에서 춤추고 노래를 부르는 신애는 굉장히 멋있었다.
멤버들과 호흡이 굉장히 잘 맞는다는 걸 느낄 수 있었고, 저 작은 몸에서 어떻게 저런 파워가 나올 수 있는지 신기하기도 했다.
‘내가 준 게 효과가 있는 것 같긴 한데….’
무대 위에서 노래 부르고 있는 신애는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으로 보였다.
그리고 나도 그녀가 어떤 기분일지 상상이 되었기에 절로 미소가 따라 나왔다.
‘저때 진짜 행복하지.’
활동할 때 이미 팬사인회도 하고, 팬미팅도 했었다.
그래서 부러워 할 필요가 없는데도 신애의 미소를 보니 절로 부러움이 들었다.
또 팬미팅 하고 싶다는 욕심도 들고 말이다.
때마침 신애가 시선을 우리 쪽으로 돌렸다.
누가 봐도 나를 찾는 움직임인지라 재빨리 안경을 벗어서 신애와 시선을 맞췄다.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신애가 더 행복하게 웃는다.
저 아이에게서 행복을 지켜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애 말이야. 너무 예쁘게 웃는 것 같아. 저 미소를 지켜줘야한다는 생각이 들 만큼.”
“그러게. 예쁘네.”
신애는 자기가 계획한 걸 지켰다.
자신이 가장 사랑스럽고 예쁠 때 내 가족을 만나서 기선 제압한다는 계획 말이다.
본인은 결코 말도 안 된다며 호들갑을 떨겠지만 말이다.
“네가 왜 저 아이를 좋아하게 됐는지 알 것 같아.”
“그 정도로 마음에 들어?”
“내가 마음에 든다고 달라지는 건 없겠지만….”
“달라지는 게 왜 없어? 오늘 신애가 가족이랑 같이 오라고 했던 것도 친하게 지내고 싶어서인 건데.”
“저렇게 예쁜 애라면 누구든 환영할 거야.”
확실히 신애의 걱정은 쓸데없긴 하다.
신애 같이 귀여운 아이를 싫어할 사람이 어디 있겠나?
팬들을 위해 준비한 무대가 끝나고 본격적으로 사회자와 함께 토크쇼가 시작 됐다.
번호를 불러서 당첨 된 팬에게 포옹도 해주고 선물을 준다거나 팬이 바라는 소원을 들어준다거나 쪽지를 뽑아서 나온 질문에 응답을 해주기도 하고, 멤버들끼리 서로를 장난스럽게 디스하면서 케미를 보여주기도 했다.
“내가 남자였다면 사귀고 싶은 멤버는 누구일까요?”
“어…꼭 멤버들 중에 골라야 하는 거죠?”
“아하하!! 네. 반드시 멤버들 중에 골라야 합니다.”
“으음…그럼 저는 슬비씨요.”
각자 한 명씩 멤버를 골라서 대답을 했는데 짜고 친 것인지 몰라도 신애만 0표를 받았다.
“아니, 시애씨! 혼자만 0표에요! 이게 무슨 일입니까?”
“왜죠? 이건 인정할 수 없어요!”
신애는 왜 자신이 이런 참담(?)한 결과를 받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스스로의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멤버의 말에 심장 부위에 손을 턱 얹은 신애가 당당하게 턱을 내밀었다.
자긴 전혀 납득할 수 없다는 무언의 제스쳐였다.
“시애씨 보니까 전혀 납득하지 못하고 계십니다. 불만이 가득하시거든요. 살짝 삐지신 것 같기도 한데 멤버분들이 납득시켜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왜 시애씨를 선택하지 않으신 건가요?”
신애가 어디 한 번 말해보라는 듯 눈을 흘기며 입술을 삐죽 내민다.
그걸 본 팬들이 귀엽다며 난리를 쳤다.
우어억!!
귀여워!!!!
팬들의 반응이 웃겼는지 사회자가 계속 웃으면서 대답을 재촉했다.
“빨리 말씀해주셔야 합니다. 시애씨 입술이 점점 길게 튀어나오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