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84 - #86. 정리 (2)
‘남녀역전 하니까 갑자기 걔가 생각나네.’
포니 얘는 요즘 뭐하고 사나 모르겠다.
란나가 임신했는데도 소식이 없다.
사실 이건 란나가 처음 임신 했을 때도 그랬다.
주아 누나가 임신 했을 때나 다른 가족이 임신했을 땐 먼저 찾아와서 선물과 보너스를 주고 갔던 녀석이었는데 말이다.
미션이 걸린 일이니 아이를 낳은 후에 나타나겠거니 하고 말았는데, 예상치 못하게 아이를 유산하면서 그 생각도 흐지부지 됐었다.
솔직히 포니가 주는 보너스를 기대하고 있다기 보단 그의 상사인 칠리와 미션에 관련 돼서 물어 볼 말이 있어서 녀석이 필요했다.
‘미션을 빨리 정리하고 싶달까.’
란나와 함께 할 때마다 항상 미션이 걸렸다.
그녀와의 첫 만남이 우연이 아닌 수작이었다는 점에서 마음이 불편했고, 미션의 성공 보상을 미리 선지급 받아 누리고 있다는 점에서 불편한 점이 있었다.
비록 미션 때문에 생긴 인연이지만, 그 인연을 가볍게 여긴 적 한 번도 없다.
그러니 이젠 미션을 확실히 정리하고 마음 편하게 그녀와 만나고 싶었다.
‘진짜 신분을 밝히는 건….’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해봐야 하는 일이다.
내 진짜 신분을 그녀에게 말하는 게 옳은 일일지는 아직도 확신이 서지 않는다.
내 마음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신분을 말해서 란나를 괴롭게 할 생각은 없다.
철저하게 란나를 위해서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할 것이다.
한편, 시상식이 시작 되고, 감독님과 나는 예상한 바대로 상을 잔뜩 받았다.
“최우수 작품상입니다. 축하드립니다! 그림자의 연화정 감독님!”
짝짝짝짝짝!
“남우주연상입니다. 축하드립니다! ‘예솔’의 수원 배우님 그리고 ‘그림자’의 진해솔 배우님!”
짝짝짝짝짝!!!!!
솔직히 내 남우주연상은 논란이 좀 있었다.
스크린 데뷔하자마자 주연상을 받은 것에 너무 과했다는 평가가 있었다.
영화제도 그걸 알았는지 공동수상으로 상의 권위를 살짝 떨어트렸다.
머리를 잘 쓴 것이다.
내가 혼자 수상을 받았으면 부정적인 여론이 강했을 것이다.
이날 상을 받은 것을 이후로, 나와 감독님은 상을 수집하는 것처럼 이곳저곳에서 받고 돌아다녔다.
주로 감독님이 상을 받으러 무대를 왔다 갔다 했는데, 나름 몇 개의 상을 받아 챙겼다.
특히 액션에 관련 된 상은 빠짐없이 내가 챙겼다.
필름예술대상, 아카데미 시상식, 작가 조합상, 비평가 협회상, 국제영화제 등등.
각종 영화제에서 준 상들로 집에 놓인 진열대가 꽉 차서 새로운 진열대를 추가로 구매해야 했다.
물론 진열대를 채운 것 중 가장 많은 자리를 차지한 건 아이돌로 받은 상이긴 하다.
‘나중에는 배우용 진열대, 아이돌용 진열대로 만들 날이 오겠지?’
연화정 감독님의 영화에 출연해서 본 가장 큰 이득은 연기에 재미를 붙였다는 점이다.
여태까지 연기는 인지도를 올리기 위해, 혹은 개인 활동을 위해서 하는 아이돌 부업 정도로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생각이 완전히 바뀐 상태다.
연화정 감독님은 내가 보여준 노력이 아까워서라도 꾸준히 연기 활동을 하길 바라셨고, 나도 그녀의 생각에 동의했다.
♧ ♧ ♧
한동안 시상식에 참여하며 바쁘게 돌아다녔던 나는 조금씩 화제가 잦아들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주변에서 느껴지던 사람들의 과한 흥미와 관심들이 슬슬 다른 곳으로 향해 움직인 것이다.
이래서 연예인들이 인기에 중독 돼서 정신을 못 차리는 거다.
후끈 달아올랐을 때의 열기와 관심이 사라지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다가 무리수를 두게 되는 것이고 말이다.
나는 이미 아이돌 활동을 통해 수차례 이런 경험을 해봤다.
“드디어 휴가네요. 저 당분간 푹 쉴게요. 해외 시상식 때까지 저 찾지 마세요!”
회사에 단단히 말을 해놓고 집돌이 생활을 시작했다.
예전에 생각을 해뒀던 대로 한 명씩 시간을 잡아서 1:1로 데이트를 즐기기도 하고, 아이들과 함께 놀이동산에 가서 놀기도 하는 등의 행복한 시간을 보낸 것이다.
우리 쌍둥이들에게 아빠 노릇도 제대로 했다.
그 과정에서 회사는 꾸준히 들어오는 섭외 목록을 나에게 보여주었지만 모두 거절했다.
참고로 나는 멤버들과 에어플레인 그룹으로 활동하기 전까지 다른 활동을 할 생각이 없었다.
“포니, 좀 나와 봐.”
란나도 어느새 임신 초기를 지나 안정기에 들어가고, 바쁜 활동으로 다소 소홀했던 가족들과의 관계도 다시 끈끈하게 다지고 난 후.
나는 하루 날을 잡아서 포니를 불렀다.
“포니포니포니포니포니포니포니포니.”
(ꐦ°᷄▿°) [시 끄 러 워 !!!!!]
오랜만에 보는 날파리 포니의 말풍선에 나는 반가움을 숨기지 않았다.
“이야~ 오랜만이다?”
[왜 불렀는데.]
포니의 태도가 삐딱하다.
“네 상사랑 할 얘기가 있어서 불렀어. 상사 좀 불러줘.”
[상사?]
“그래. 저번에 나랑 만났던 그 사람.”
사람은 아니지만, 그걸 뭐라고 지칭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그렇게 말했더니 포니가 떨떠름한 표정을 짓는다.
[그분이 네가 부르고 싶을 때 막 부를 수 있는 그런 분인 줄 아냐?!]
“쓰잘 때기 없는 소리 그만하고 말이나 전해.”
[일단 전달을 하긴 하겠는데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그분이 얼마나 바쁘신 분인데.]
뿅하고 사라진 포니가 돌아 온 건 10분 후였다.
정확히는 포니는 오지 않고 내가 용건이 있는 포니의 상사만 왔다.
“안녕. 오랜만이지?”
“뭐야? 너 날개가 원래 그랬나?”
원래 날개가 어떻게 생겼는지 머릿속이 흐릿하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처럼 나비 날개를 연상시키는 화려한 무늬에 번쩍번쩍 금색으로 빛이 나고 손바닥 만한 날개를 달고 있지는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아~ 내 날개? 진화해서 그래.”
“진화?”
“네가 그걸 자세히 알 필요는 없고, 그래서 날 부른 이유는?”
“너랑 했던 거래에 대해 얘기를 좀 나누려고.”
“아아~ 그거. 이미 끝난 거래인데 그건 왜?”
“끝났다고?”
“그래. 그 여자 임신시켰잖아.”
“…그렇지.”
지금 이 자가 말하고 있는 임신은 둘째를 말하는 게 아님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유산 된 아이를 말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그걸로 네가 해야 할 일은 끝난 거야.”
“왜 그게 끝난 건데? 첫 아이는 너도 알겠지만 유산해서 낳지도 못했는데.”
“으음~ 아니지. 우리가 한 정확한 거래는 네가 그 여자를 임신시키는 거였어. 네가 그 여자를 임신시켰으니까 된 거야. 낳지 않았어도 괜찮았다는 거지.”
“…….”
왜 이렇게 기분이 더럽지?
“난 아이를 낳는 것까지가 미션의 조건인 줄 알았어. 그때도 분명 아이를 낳으라고 하지 않았나?”
“아아~ 그렇게 오해해서 거래 조건 맞추려고 또 임신을 시켰구나? 좋아. 내가 그렇게 팍팍한 사람은 아니거든. 추가로 일해준 거에 보너스를 줄게. 근데 다음에는 없어.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일 거야.”
“필요 없어! 질문에나 대답해. 아이가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왜 거래가 끝났다는 거야?”
“거래 내용은 그 여자를 임신시키는 거였고, 넌 거래 조건대로 임신을 시켰어. 그게 전부야. 다른 건 없어.”
다른 게 없다는데 왜 이렇게 기분이 더러운가.
나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물었다.
“내 아이가 유산 된 거에 대해 너희들 개입이 조금이라도 들어가 있냐?”
“설마 그럴 리가. 우리는 이 세계에 직접적으로 손을 댈 수 없어. 너도 알잖아. 그게 불가능해서 널 이곳에 불러서 이러고 있는 거.”
“…….”
이들이 사용하고 있는 능력은 초능적이다.
적어도 남자 부족으로 세계가 망가지는 걸 막을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이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나를 불러들여서 이 세계의 흐름을 막으려고 애썼다.
쉬운 길을 두고 어려운 길로 돌아가야만 하는 이유가 있을 거라는 건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는 사실이었다.
“넌 네 할 일을 끝냈어. 거래는 종료 된 거야. 그 외에 다른 건 없어. 그러니 보너스는 받아두라고. 그걸 안 받는다고 해서 변하는 건 없고 네 손해일 뿐이니까.”
듣는 사람 열 받게 녀석이 손가락을 튕기니 황금색 복주머니가 나타났다.
안에 뭐가 들었는지 모르겠으나 두둑하게 챙기긴 했는지 부피가 크고 묵직했다.
“혹여나 불쾌해 할까봐 하는 말인데, 이건 분명히 ‘거래’한 내용이잖아?”
“…란나의 첫 아이가 유산 된 건 내가 임신시켰기 때문이구나.”
우리가 거래를 하기로 하면서 유산은 정해진 운명이었지 않을까?
저놈은 일부러 내가 오해하도록 말을 교묘하게 말을 했을 거다.
사실을 말했다면 받아들이지 않았을 테니까.
“하아~ 그렇게까지 진실을 알고 싶어?”
“그래. 무조건 알아야겠어. 그러니까 이딴 복주머니는 다시 가져가고, 묻는 말에나 대답해.”
“흠. 정 그렇게 알아야겠다면야. 그 여자가 낳았을 아이는 희대의 살인마가 됐을 거야. 단순히 한두 명을 죽이는 수준이 아니야. 전쟁을 일으켜서 어마어마하게 많은 사람들을 죽일 운명을 타고 났지. 그놈 때문에 네 도움으로 조금씩 회복 되고 있던 성별 비균형이 완전히 비틀리게 돼. 그리고 이 세계는 멸망하게 되는 거지.”
“…!!”
상상도 못했을 말인지라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어떤 남자랑 붙여놔도 그 여자가 임신해서 낳은 첫 번째 아이는 그런 끔찍한 운명을 타고 태어나게 됐을 거야. 그런데 너는 이 세계 사람이 아니라서 그런지 유일하게 그 여자랑 붙여놨을 때 결과물이 좋더라고.”
“내 아이로 태어났으면 전쟁을 일으키는 일은 생기지 않는다는 거야?”
“응. 그래서 너와 거래를 했던 거다. 그 아이가 유산 된 건 우리도 몰랐던 일이야. 수많은 운명 중 하나가 그렇게 결정 된 거지.”
“만약 그 아이가 태어났어도 문제는 없었다는 거네.”
“네 피를 이은 아이로 태어났다면 다른 운명을 갖게 됐을 테니 그랬겠지. 사실 가장 깔끔한 건 아예 태어나지 않는 거긴 했어. 마침 운 좋게도 그렇게 됐고. 아, 이러면 네가 기분 나쁘려나?”
“시발, 그걸 아는 놈이 그런 개소리를 지껄였냐?”
아이에 관련 된 일이다 보니 도무지 고운 말이 나가질 않는다.
그래도 이놈이 일부러 유산을 시킨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위안을 받았다.
만약 그랬다면 란나의 얼굴을 어떻게 볼 수 있겠는가?
“솔직히 그 여자는 너한테 감사해야 해. 그놈은 제 어미를 90% 확률로 죽이니까.”
“!!”
“전쟁을 일으켜서 세계 인구 절반을 삭제시킨 놈이야. 그런 놈이 멀쩡하게 성장할 수 있을 것 같아? 각종 사고를 일으키면서 제 어미 피와 살을 뜯어 먹으면서 컸을 거라고.”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를 두고 하는 말이 저급하다.
내가 낳은 아이는 그런 비극적인 운명을 피해가니 동일 인물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욱하는 기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알겠으니까 그만해. 마이너리티 리포트도 아니고, 일어나지도 않을 운명으로 아이를 욕하는 건 못 들어주겠으니까.”
“마이너리티 리포트? 그게 뭐야?”
“너는 모르는 그런 게 있다. 궁금한 건 다 풀렸으니까 이제 꺼져.”
나도 모르는 사이에 거래가 끝났다니 좀 허무하다.
어쩌다 보니 란나에게 얽힌 비밀도 알게 됐는데, 차라리 몰랐을 때가 더 낫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기분이 좋지 않았다.
“거래는 끝났지만 앞으로 꾸준히 일해주길 바래. 더 많은 여자들을 임신시키고 아이를 낳는다면 네 인생은 지금처럼 쭈욱 탄탄대로를 달릴 거야. 멸망 했을 세계를 구한 용사가 되는 거라고. 이 세계에서 사는 사람들 모두 너한테 목숨을 구명 받은 거나 다름없는 거지.”
“시발, 내가 종마냐? 만날 때마다 애 낳으라고 잔소리야?”
칠리가 이번에는 내 말을 이해했는지 깔깔 웃음을 터트렸다.
“본인 주제를 알긴 하는구나? 혈통이 좋은 네가 많이 낳아서 씨를 뿌리면 멸망이 막아지는 거니 딱 알맞은 비유네.”
“저 새끼가 진짜!”
“이러다가 한 대 때리겠다? 그럼 난 바빠서 이만 가볼게. 보너스는 여기 두고 갈 테니까 요긴하게 쓰라고.”
처음 만났을 땐 훨씬 딱딱했던 것 같은데, 진화라는 걸 해서 그런가 성격이 많이 능글맞아졌다.
예전에는 이 정도로 기분 나쁜 놈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포니가 사라지는 것처럼 저 녀석도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뿅하고 사라져버렸다.
황금색으로 번쩍이는 복주머니는 바닥에 내버려둔 채로 말이다.
나는 복주머니가 그 녀석인 것처럼 노려보다가 한숨을 푹 쉬고 복주머니를 집어들었다.
선심 쓰듯 준 보너스가 얼마나 대단할지 구경이나 해볼 생각이었다.
“쪼잔하게 몇 푼 넣어놓고 생색 낸 건 아니겠지?”
황금색 복주머니를 활짝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