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녀역전 세계의 아이돌-604화 (602/849)

Chapter 604 - #88. (외전) 진주아 (4)

“주아야! 이렇게 또 같은 작품을 하게 될 줄 몰랐네. 너무 반갑다~!”

“아~ 호영 선배님도 이 작품에 출연하셨어요?”

주아는 얼굴에 잔뜩 호감을 담은 채 다가오는 남자를 보며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며칠 전 있었던 화끈한 밤을 떠올리고 있던 중인지라 방해하는 사람의 등장이 마냥 곱지가 않았다.

남편이 있고, 아이도 있다는 걸 모르지 않을 텐데도 그가 보여주는 호감은 줄어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일부러 무심하게 굴거나 좀 싸가지 없이 굴어도 말이다.

“으응. 주아는 몰랐나보구나? 하긴, 바쁘니까 그럴 수 있지. 이번에도 같이 호흡 잘 맞춰보자. 하하! 저번에는 주아랑 자주 부딪치는 역할이 아니어서 아쉬웠는데, 이번에는 자주 만날 수 있겠다.”

그녀의 입장에선 상대하기 귀찮은 남자에 불과하지만, 그 부족한 얼굴로도 남자가 적다는 이유로 제법 인지도 있는 남자배우가 됐다.

그녀가 캐스팅 된 후에 들어 온 지라 미리 알아서 피할 수도 없었다.

‘서브 남주였지. 그것도 내 첫사랑 역할의.’

그녀가 첫사랑이자 짝사랑을 하는 대상이 호영 선배가 역할을 해야 하는 캐릭터이다.

솔직히 이 설정 부분은 역할의 몰입에 방해가 됐다.

도대체 어떻게 저런 부족한 남자를 짝사랑하란 건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치아도 이상하고 생긴 것도 이상하잖아. 목소리도 느끼해서 마음에 안 들어.’

저런 얼굴을 좋다고 쫓아다니는 사람들이 이해가 안 된다.

‘내가 너무 기준이 높아져버렸나?’

집에 들어가면 보이는 얼굴이 진해솔이다.

그의 얼굴은 세계적으로도 유명해서 세계 미남 순위 TOP10에서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는 남자이기도 하다.

그런 남자를 보고 살다 보니 어떤 남자를 봐도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애초에 그럴 필요도 없지만 말이다.

“같이 촬영하면 정말 재밌겠다. 내가 성격이 소심해서 새작품 들어가면 낯선 사람들이랑 통성명하고 같은 공간에 있는 게 되게 곤욕이었거든.”

별로 알고 싶지 않았던 TMI까지 말해댄다.

“아, 네.”

주아는 죽은 동태 눈깔로 무성의하게 대답했다.

그런데 눈치가 없는 건지, 아니면 눈치 없는 척 하는 건지 모를 그가 포기도 않고 계속해서 말을 걸었다.

“응. 근데 이번에는 친한 너랑 같이 촬영하니까 한결 편할 것 같아.”

주아는 오늘따라 유난히 거슬리게 말하는 걸 보며 참지 못하고 말했다.

“선배님, 저희가 친한가요?”

“어?”

“선배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앞으로 촬영장에서 자주 부딪쳐야 할 텐데, 적당히 거리 유지 부탁드려요. 이 바닥에서 괜한 오해 불러일으키는 건 좋지 않잖아요?”

“아니, 나는 그러니까….”

“저희가 서로 전화번호를 아나요? 사적으로 연락을 주고받아서 따로 만난 적이 있나요? 제가 알기론 그런 적 한 번도 없었던 걸로 압니다. 촬영장에서도 자주 본 적 없고요.”

“…그, 그렇긴 하지.”

“그런 사이는 ‘친하다’고 말하기보단 ‘친하지 않다’라고 말하는 게 맞습니다.”

호영 선배가 충격을 받았는지 입을 꾹 다물었다.

하지만 이렇게 확실하게 정리해주지 않으면 앞으로 촬영이 고될 것이므로 한 번 할 때 제대로 경고해주는 게 맞다고 봤다.

“선배님께서 저를 좋게 봐주시는 건 감사한 일이지만, 그 이상 선을 넘지는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내, 내가 아무래도 너무 바, 반가운 마음에 널 부담스럽게 했나보다. 하, 하하.”

그래도 부끄러운 건 알았는지 그녀의 단호한 말을 듣고 악당이 도망치는 것처럼 후다닥 사라져버렸다.

속이 다 시원하다.

“너무 강하게 나간 거 아니야? 저치가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아니지. 그냥 내버려뒀다가 어디까지 갈 줄 알고 저걸 그냥 둬? 지금이라도 확실하게 선 긋는 게 맞아. 괜히 저 사람이랑 얽혀서 고생하고 싶지 않아.”

“적어도 장소는 가리지 그랬어. 스태프들이 들어서 소문 다 날 텐데.”

“그러라고 한 거야. 오늘 일로 못된 마음을 먹어도 스태프들이 목격한 게 있으니까.”

연예계는 치열하다.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는데 들이는 노력은 어마어마한 반면, 정작 내려올 때는 미끄럼틀이다.

등 뒤에서 누군가가 떠밀면 속수무책으로 떨어지고 만다.

미끄럼틀이 너무 미끄러워서 어떻게든 발버둥 쳐봐도 몸은 계속해서 아래로 추락해버린다.

그러지 않기 위해서는 남과 척지지 않는 적절한 사교력이 필요했다.

또한 남과 척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독기도 필요하다.

더불어 남의 척을 졌을 때는 우의를 점할 수 있게 사전 작업을 해놓는 게 중요하다.

그녀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게 있다면, 호영 선배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소심하고 치졸하다는 점이었다.

“호영 그 사람이 술 마시고 SNS에 쓸데없는 소리를 해놨어. 지금 난리야.”

“설마 나한테 차인 거?”

“응. 제작진 쪽에서 사실여부 묻는데 어떡하지?”

“어떡하긴 뭘 어떡해? 사실대로 말하고 먼저 선수쳐야지.”

호영이 술을 마시고 잔뜩 취해서 쓸데없는 소리를 SNS에 올렸다.

이래서 SNS는 인생 낭비라는 말이 있나보다.

“뭐 어떻게 썼어?”

“지도 술 깨고 정신 차렸는지 내렸는데 이미 퍼질 대로 다 퍼졌지.”

“내 이름을 직접적으로 언급했어?”

“널 언급한 거나 마찬가지야.”

[나를 짝사랑한다는 너는 내 짝사랑을 짓밟아버린다.]

라는 황당한 글귀를 적은 채로 빈 소주병을 찍은 사진을 SNS에 올린 것이다.

호영의 다음 작품에 들어갔고, 그 작품에서 그를 짝사랑하는 역할을 하는 게 바로 진주아 그녀라는 사실은 빠르게 인터넷으로 전파가 됐다.

그녀를 직접적으로 언급한 것은 아니지만 글귀를 통해 충분히 짐작이 되도록 쓴 것이다.

-이거 100% ㅈㅈㅇ아님?

-눈치 챙겨, 친구.

-그 여자는 뭔 복을 타고 나서 ㅈㅎㅅ이랑 결혼해놓고 호영 오빠까지 차지하는 거냐?

-이쁘잖아 시발.

-애엄마 주제에 시발, 우리 오빠 지켜!!!!

-웅~링~ 옹~빵~ ㅇㅈㄹ. ㅈㅈㅇ 눈에 ㅎㅇ이 들어오기나 하겠냐? ㅈㅎㅅ 얼굴을 보고 사는데?ㅋㅋㅋㅋㅋ

-근데 유부녀 짝사랑하는 ㅎㅇ 제정신임? 남의 여자를 건드리냐 ㅋㅋ

-ㅈㅎㅅ 개빡쳤겠는데?

-나 이번에 ㅎㅇ 지랑 ㅈㅈㅇ 들어가는 작품 스탭인데 ㅎㅇ이 ㅈㅈㅇ한테 찝쩍대다가 ㅈㅈㅇ가 불편하니까 친한 척 좀 하지 말아달라고 함. 완전 사이다였다. 질척거리는 거 꼴불견이었거든. 가정 있는 여자한테 찝적대는 게 정상은 아니지 않음? 문제 될 것 같아서 5분 후 제삭함.

그녀는 댓글을 확인하고 있다가 드디어 기다리고 있던 댓글을 발견했다.

그 댓글은 인증없음 뭐다? 라는 식으로 믿지 못한다는 반응이 주를 이뤘다.

그러다가 또 다른 댓글에서 이거 찐임 ㅋㅋㅋ 이라는 댓글이 달리며 스탭이라 밝혔던 댓글의 진의여부가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스태프는 문제가 생길 것 같아 보이자 재빠르게 삭제를 했지만, 그 댓글은 이미 사람들에게 널리 퍼졌다.

“제작진 쪽으로 연락해서 두 사람 중 하나를 결정하라고 해.”

“그렇게 강하게?”

“그럼 그런 찌질한 짓 한 놈 짝사랑하는 역할을 연기하려고?”

“하…그건 그렇지.”

이미 갈 때까지 갔다.

작품에 남게 될 사람이 누구인지가 중요하다.

주연인 그녀와 서브남주에 불과한 호영.

아무리 그가 남자라 해도 그녀가 훨씬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니 제작진도 그녀를 선택할 수밖에 없으리라.

“그나저나 네 남편은 괜찮은 거야? 너희 사이가 워낙 좋아서 질투 심하게 할 것 같은데.”

매니저의 물음에 주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말도 마. 엄청 심해. 그 남자 찾아가서 가만 안 둔다는 걸 겨우 말렸어.”

“진짜?! 그 정도라고? 와~ 부럽다.”

“이게 뭐가 부러워! 걔는 터프해서 찾아가서 주먹질 할 수도 있다고. 다른 남자들처럼 말로 싸우고 그런 거 잘 안 해.”

“뭐야, 그거! 너무 멋있잖아! 맨크러쉬!!”

“그게 더 일을 키우는 거거든?”

호영이 진해솔에게 뒤지게 얻어 터졌다더라! 하면 연예계가 난리가 날 거다.

상상만 해도 아찔해지는 상황.

그녀는 이 일을 최대한 빨리 수습할 필요가 있었다.

남편이 나서기 전에!

“그리고 한 가지 더.”

“한 가지 더?”

“그 사람이 사과하고 싶다면서 나랑 만나고 싶어 하면 싹 다 거절해. 해솔이가 그 인간이랑 만난 거 알면 뒤집어질 거야. 겨우 달래놨어.”

“와, 진짜 사랑받고 사는구나. 너.”

“알겠냐구.”

“알았어. 네 뜻대로 해줄게.”

부디 골치 아픈 일 없이 이번 일이 해결 되기를 바라며, 매니저에게 확실히 말을 전달한 그녀는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았다.

제작진은 역시나 호영을 하차시키는 것을 택했다.

하차한 호영의 역할을 과연 누구로 캐스팅할지 제작진들은 머리를 싸맸다.

호영은 작품에서 하차가 됐음에도 불구하고 뻔뻔하게 거짓말로 수습을 하려고 했다.

술을 마시고 슬픈 노래를 듣고 별 생각 없이 적은 글이 큰 논란에 휘말려 깜짝 놀랐다는 식이다.

짝사랑의 대상으로 언급 됐던 그분은 절대 아니니 지나친 억측은 자재해달라고 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호영이 되도 않는 거짓말을 하며 수습을 하려고 한다며 비웃었지만, 그의 팬은 호영의 거짓말을 동앗줄처럼 붙잡아 으쌰으쌰하는 분위기였다.

더불어.

“이제 그만 좀 해애~!”

“누나가 약속만 해주면 되잖아.”

“나 그놈 전화번호도 몰라. 근데 어떻게 만나. 그리고 이번에 호되게 당해서 나랑은 눈도 마주치지 않으려고 할 걸?”

“그래도 약속해.”

“하아~ 진짜.”

얘는 다른 여자를 그렇게 만나고 다니면서 내가 남자랑 조금이라도 얽히면 엄청난 질투심을 보여 온다.

남자의 질투라….

아마 다른 여자들이 이 얘기를 들으면 부러워서 죽으려고 할 거다.

솔직히 질투심을 드러내는 남편을 보는 게 그리 기분 나쁘지도 않았다.

‘이래서 연하랑 사는 건가? 후후. 귀엽기는.’

남편의 질투심이 무슨 짓까지 저지를 수 있는지 상상도 못한 채 남편의 귀여운 질투를 애교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하차한 호영의 자리에 깜짝 캐스팅 된 진해솔.]

[꿩 대신 닭이 아니라 닭 대신 꿩이 왔다! 진해솔, 서브 남주 출연 확정!]

[진해솔의 화려한 내조 "우리 사이 여전히 파란불!" 잉꼬부부 증명한다.]

[내 여자는 내가 지킨다. 진해솔, 진주아 드라마에 지원사격 나서...]

“미쳤어! 미쳤어! 미쳤어!”

퍽퍽퍽퍽!

그가 호영 선배의 자리를 대신해서 출연하기로 계약을 했다는 소식을 인터넷 뉴스로 알게 됐다.

그녀는 사고 치고도 태연하게 침대에 누워 있는 남편의 몸을 베개로 치며 혼을 냈다.

“악악! 아파! 여보!”

“여보는 무슨 여보얏!! 미친놈아. 그걸 왜 네가 받아!!”

“다른 사람들 다 좋아하는데 왜 누나만 이래! 악!”

어이구! 화상아!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어!”

“뭐라고 하긴! 잘 했다고 하지!”

남편 놈의 말에 환장하기 일보 직전이 된 그녀는 이마를 짚고 씩씩댔다.

“그래서 정말 출연을 하겠다고?”

“이미 계약서에 싸인했어.”

“스케줄을 어떻게 맞추려고.”

“내가 설마 그것도 못 할 건데 계약을 했겠어? 어차피 서브 남주 역이라 많이 나오지도 않더만.”

“드라마는 실시간이라 얼마나 네 역할이 늘어날지 알 수 없다고! 작가님이 막 넣으면 촬영해야 하는 건 너야!”

“아이! 몰라몰라.”

대책 없다는 듯 남편이 침대에 대(大)자로 뻗어서 죽은 척을 한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만 나온다.

“다음에 또 이러면 가만 안 둔다.”

“…….”

“이번만 넘어가는 거야. 알겠어?”

“…사랑해.”

사랑한다는 말로 때우는 남편이 밉지 않은 것은 왜 일까?

그냥 해프닝으로 넘기면 되는 일을 괜히 일 키운다며 제작진들 사이에서 그녀의 흉을 보는 이가 있었다.

그런데 남편이 호영 대신 출연을 하겠다고 하니 그런 불만이 쏙 들어갔다.

오히려 그가 출연해준다는 말에 환호하는 눈치였다.

‘내가 욕먹는 걸 두고 보기 싫었나 보네.’

남편의 마음 씀씀이가 고맙기도 하고, 자신을 신경 써줘서 고마움도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마음을 고스란히 표현하는 게 부끄러워 괜스레 베개로 한 번 더 남편을 때려버렸다.

“윽.”

남편이 장난스러운 신음을 내뱉는다.

주아는 참지 않고 남편의 입술에 진한 뽀뽀를 날렸다.

쪽!

“흐흐.”

쑥스러워서 말없이 뽀뽀만 하니 남편이 그녀의 어깨를 잡아 빙글 돌려 침대에 눕혀버렸다.

그리고 그녀를 꼭 끌어안아서는 말했다.

“우리 여보님이 그 남자 때문에 욕먹는 꼴은 진짜 못 보겠더라. 그러니까 이번만 봐줘.”

“…응. 고마워.”

누군가에게 지킴 받는다는 건 생각한 것보다 훨씬 감동적인 일이었다.

단단하게 그녀의 몸을 안아주는 남편 진해솔의 팔 근육을 느끼며 좀 더 깊게 그의 품에 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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