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12 - #90. (외전) 조연주 (2)
가정적인 남편이 싫은 건 아니다.
다만 자신이 어릴 적 미련 없이 버려버렸던 것을 그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을 보며 납득하지 못했을 뿐.
사슴 같은 남편과 토끼 같은 자식이 있는 그녀가 가족의 소중함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모든 것 중 가장 맨 위에 가족을 올려놓는 것은 그녀 입장에선 쉽지 않은 일이었다.
만약 그녀가 모든 것 중에 가족을 가장 소중하게 여겼다면 지금과 같은 위치에 있지 않았을 것이다.
‘망할 노친네의 아래에서 지금도 삶의 이것저것을 참견 받으면서 살았겠지.’
그렇기에 그녀는 가족을 1순위로 두는 남편을 평생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소중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모든 것으로 만들어버리기엔 그녀의 인생이 너무 고됐다.
“알고도 당하면 무능한 거다. 그리고 난 무능한 사람이 아니야.”
대형 기획사들이 손을 잡고 허니 엔터를 압박할 계획을 짰다는 사실에 분노한 남편이 뭐든 도와주겠다는 걸 겨우 진정시켰다.
“어째 누나들은 내가 뭘 도와주려고 해도 싫어하는 것 같아요. 제가 그렇게 못 미더워 보여요?”
그녀가 재차 거절하자 남편은 조금 삐진 티를 냈다.
그녀가 모르는 사이 가족들에게 도움을 주겠다는 걸 여러 번 거절당했었던 모양이다.
솔직히 그의 도움을 거절한 사람의 심정이 충분히 이해가 된다.
성차별이 사회적 문제로 크게 대두 된 탓에 조심해야 한다는 건 알지만, 남자에게 도움을 받는 여자는 꼴사납다는 생각이 안 들 수가 없다.
남편은 편견 없이 순수한 호의로 도움을 주려는 것임을 알지만, 여자들 그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려는 것이지만, 받아들이는 여자 쪽 입장에서는 순수한 호의를 쉽게 받기 어려운 것이다.
“싫은 게 아니라 든든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서겠지. 네 도움을 받을 정도로 위기에 처한 것도 아니었을 거고.”
“누님도 그래서 제 도움을 거절하신 거에요?”
“그래, 고작 그런 것들 때문에 네 도움을 받는다는 건 말이 안 돼.”
그녀의 말이 위로가 되었는지 삐진 듯 보였던 남편의 표정이 풀린다.
“대형 기획사들이 뭉친 거라면서요. 그 사람들이 방송국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데요.”
“나는 뭐 가만히 있겠니? 너희들이 든든하게 버티고 있는 이상 우리 회사는 흔들리지 않아.”
“레이블 회사 차려서 나갔는데도요?”
“그 회사 레이블 지분을 우리 회사가 갖고 있으니까.”
전부는 아니어도 허니 엔터에서 레이블에 대한 지분을 만만치 않게 갖고 있다.
그렇기에 에어플레인이 레이블을 차려서 나갔어도 사람들은 여전히 그들을 허니 엔터 소속 아이돌이라고 보는 것이다.
“늙은이들이 방송국에 미치는 영향? 물론 아예 없지는 않겠지. 그 인맥으로 권력을 누리고 있으니까. 하지만 하나씩 무너지기 시작하면 사정이 달라질 거다.”
“누님이 그 사람들을 무너트릴 수 있는 거에요?”
“물론이지.”
이런 날이 온다면 쓰려고 수십년 간 증거를 모아왔다.
분명 언젠가는 저들이 허니 엔터에 걸림돌이 될 날이 올 거라고 예상했다.
‘예전부터 은근히 견제를 해오기도 했고.’
다만 이 정보들이 그녀의 손에 걸쳐 터졌다는 사실은 반드시 비밀로 해야 했다.
각종 불법 루트로 전달해준 뇌물들이 그들을 지켜주진 못해도 보복을 해줄 순 있기 때문이었다.
‘어떤 방법을 쓸까.’
그들 중 하나를 처리하는 건 쉽다.
하지만 대형 기획사를 운영하고 있는 대표 셋을 단숨에 몰아붙여서 끝내버리는 건 그녀로서도 꽤나 리스크가 큰일이었다.
그렇다고 한 명씩 처리를 하기에는 서로 으쌰으쌰해서 어떻게든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 게 뻔했다.
‘한 번에 터트려야 한 명도 안 빠지고 무너트릴 수 있을 거야. 더군다나 저것들이 손 대고 있는 선이 만만치 않으니까.’
그들이 각종 로비로 손을 대고 있는 윗선들.
한 명씩 공략한다면 그들에게 도움을 받아서 빠져나갈 확률이 매우 높았다.
이 나라의 솜방망이 처벌은 언제나 그렇듯 돈 많은 자들에게 유리하니 말이다.
그래서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한 번에 처리를 해야 하는 것이다.
‘늙은이들이 눈치는 좋아서 엮여 있는 게 하필 거물이란 말이지.’
특히 정치권과 얽혀 있는 일은 섣불리 움직이면 안 됐다.
자칫 잘못하면 증거가 소용없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그게 가능하냐고?
‘증거가 나와도 수사 과정에서 은폐하고 적당한 죄를 밝혀서 눈 가리고 아웅할 수 있는 게 그들이니까.’
정치권 인사가 무너지는 것은 반대편에서 푸쉬를 해주어야만 가능한 거였다.
그래서 웬만하면 정치 쪽을 건드리지 않으려고 한 거다.
증거가 나와도 무너트리는 게 쉽지 않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들을 한 번에 처리하기 위해서는 그 윗선을 건드릴 필요가 있었다.
1~2년 붙어먹은 게 아니다 보니 하나를 건드리면 필연적으로 줄줄 엮어서 나오게 된다.
‘오래 해먹었으니 한 번 물갈이 할 때가 됐어.’
대형 기획사도 고인물이 됐는데 정치권이라고 물이 고이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그쪽은 아마 오물이 되어 시궁창보다 더 썩은 내를 풀풀 풍기고 있었다.
그런 일에 남편을 끼워넣는다?
‘절대 안 될 일이지.’
그녀는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어 하는 남편을 현우에게 하는 것처럼 어르고 달래면서 이쪽에 신경을 쓰지 않도록 했다.
그녀에게 남편은 지켜야 할 존재이지, 도움을 받아야 할 사람이 아니었다.
안전을 위해 누군가와 손을 잡아야 한다면 차라리….
‘역시 그쪽밖에 답이 없는 건가.’
그녀는 옛날이었다면 결단코 선택지에 올려놓지도 않았을 방법을 선택하기로 했다.
남편의 성향에 감화 된 것인지 아니면 아이를 낳은 것이 그녀를 변화시킨 것인지는 모르겠다.
달그락 달그락-
“어라? 아들, 지금 편식하는 거야?”
“앗! 들켜따. 헤헤.”
“하긴, 나도 네 나이 때는 콩 안 먹었어.”
“그럼 나 안 머거두 대?”
“음~ 딱 하나만 먹으면 나머지는 아빠가 먹어줄게.”
“하나만?”
“응. 딱 하나만.”
“으웅…아라써.”
남편이 현오에게 콩 한 쪽을 먹이겠다고 갖은 수작을 부리는 걸 보고 있으니 심난했던 속이 빠르게 가라앉았다.
저곳에 그녀의 행복이 있었다.
그리고 저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못 할 게 없다는 걸 다시 한 번 깨닫는다.
‘안전을 위해서라면 나도 물 불 안 가리는 게 맞겠지.’
더욱이 그녀에겐 이용하기 너무 쉬운 튼튼한 안전장치가 따로 있었다.
♧ ♧ ♧
“아가씨! 오랜만에 뵙습니다.”
“아가씨라니. 아직도 그 버릇 못 고쳤니?”
“아! 죄송합니다. 언니.”
“…아니, 사과 받으려고 한 소린 아니었다. 부탁하러 온 입장인데 네가 이렇게 나오면 부담 돼서 어떻게 말을 하겠니? 편하게 있어.”
최관.
친동생은 아니지만, 차라리 그녀가 친동생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여러 번 생각했을 정도로 자신을 끔찍이 챙겨주는 아이다.
정작 친동생은 지금 뭐하고 사는지 알지도 못하는, 남보다 못한 관계인데 말이다.
“제 도움이 필요로 한 일이 있다는 걸 듣고 정말 놀랐습니다.”
“이해해. 나도 너한테 도움을 청하는 날이 올 줄 몰랐으니까.”
“무슨 일인지 모두 말씀해주십시오. 제가 다 해결해드리겠습니다.”
처음으로 요청하는 부탁이어서일까?
관이의 어깨에 힘이 바짝 들어가 있었다.
실제로 그녀가 말을 하면 관이는 불에 뛰어들라는 소리에도 기꺼이 뛰어드는 시늉을 할 것이 분명하다.
그녀가 관이와 만나는 걸 불편하게 생각하는 이유도 이런 태도 때문이다.
사이가 좋지 않은 ‘그 사람’의 핏줄이라는 이유로 관이에게 이런 대접을 받고 있는 것이지 않은가?
그 사람으로부터 받은 모든 것을 거부하고 집을 나온 바 있는 그녀는 관이의 이런 태도도 반갑지 않은 일이었다.
“내가 무슨 부탁을 할 줄 알고 그렇게 호언장담을 하는 거니?”
“뭐든 괜찮습니다. 제 걱정은 하지 마십시오. 이번에 조직을 싹 개편해서 깔끔하게 정리를 해둔 상태입니다.”
자신이 확실히 후계자로서 인정을 받았으니 무슨 일이든 기꺼이 도와줄 수 있다는 말이었다.
“네게 큰 손해가 되는 부탁이었다면 널 부르지 않았을 거야. 이게 너한테 마냥 손해를 보는 일은 아닐 거라 부탁하는 거다. 네가 반대편 쪽에 선을 대고 있다고 들었거든.”
“언니께서 부담 되는 부탁을 하셨어도 기꺼이 최선을 다해 도와드렸을 겁니다.”
언제나 그렇듯 최관은 그녀에게 진심이었다.
그 진심이 그녀에겐 부담으로 다가와서 탓일 뿐이지.
“보스가 그런 소릴 함부로 해도 되는 거니? 조직을 위해서 행동해야지.”
“어차피 언니께서 물려받아야 했을 자리 아닙니까? 언니를 돕다가 손해를 본다 해도 상관없습니다.”
“아직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어?”
연주는 관이의 말을 듣고 역시 오지 않는 게 맞지 않았나 싶어 살짝 후회를 했다.
저런 모습을 보여줄 게 뻔해서 더 부탁하고 싶지 않았던 거다.
“예전에도 여러 번 말했던 것 같은데 조직은 이제 네 거가 맞아. 이제와 후계자 자리를 돌려 달라고 한들, 거기에 있는 사람 중 누가 나한테 동조를 하겠니? 거기랑 인연 끊고 산지가 몇 십년이다. 그러니 아무리 나라도 너와 조직에 부담이 되는 부탁이라면 거절하는 게 맞아.”
“그럴 리 없습니다. 언니께서 돌아온다고 한다면 모두가 환영할 겁니다.”
“설득을 들어 먹질 않는구나. 내가 이대로 그냥 돌아가야 직성이 풀리겠니?”
고집을 부리는 관이에게 연주가 물러서지 않고 말했다.
그러자 관이가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죄송합니다. 불편하게 해드릴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그만하자. 이런 걸로 말싸움 하려고 부른 게 아니다.”
“예.”
정갈한 한정식 한 상이 테이블에 차려진다.
그녀들은 조용히 밥을 먹으면서 가볍게 소주도 한 잔씩 걸쳤다.
“보통 일은 잘 하고 있는지 물을 텐데, 그쪽 일이라고 해봤자 알고 싶은 게 하나도 없으니 그나마 덜 듣기 싫은 걸 물어봐야겠구나. 그 사람은 요즘 뭐하고 지내니?”
여기서 연주가 말하는 그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다.
최관도 그것을 당연히 알아듣고 대답했다.
“보스께서는 요즘 편하게 여행을 다니고 계십니다.”
“늙어서도 편하게 여행은 못 다닐 거라고 생각했는데, 네 덕분에 그 노친네가 호강을 하는 구나.”
하도 적이 많고, 원한을 진 관계가 많아서 함부로 돌아다닐 수 없었던 사람이다.
해외에 나가면 총 맞고 죽었다는 소식이 전달 될 수도 있었다.
그런 사람이 남편의 기적과도 같은 도움을 받아 젊음을 회복하며 때 아닌 노년의 황금기를 보내고 있었다.
더불어 최관이 조직을 이어받으면서 어그로란 어그로를 전부 끌어주었기에 타깃이 되는 건 다 늙어가는 노인네가 아닌 새로운 후계자가 된 보스 최관이 됐다.
“나쁜 짓이란 나쁜 짓은 다 하고 다닌 사람인데, 권선징악 같은 건 옛말이 된 것 같구나.”
관이는 차마 그녀의 말에 맞장구를 쳐줄 수도, 그렇다고 아니라고 할 수도 없었는지 입을 다물었다.
대신 다른 말로 화제를 돌렸다.
“현오는 잘 크고 있습니까? 못 본지 꽤 됐더군요. 제가 너무 무심했습니다.”
“달에 한 번씩은 꼭 보면서 무심하기는. 매주 보내오는 선물도 있는데.”
“현오가 절 잊진 않았을까 걱정이 됩니다.”
“그럴 일 없으니 걱정하지 마렴. 네가 오면 기뻐할 거야.”
“자주 들리고 싶지만 마음먹은 대로 상황이 되지가 않네요.”
최관은 언제 어디서 칼침을 맞을지 모르는 위치에 있다 보니 시간이 난다고 해서 현오를 보러 편하게 움직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한 번 움직여도 주변에 붙은 미행은 없는지, 혹여나 불온한 움직임은 없는지 살펴봐야 했다.
현오가 그녀의 약점이라는 사실이 들키면 그 약점을 쥐려고 할 사람들이 수두룩 빽빽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