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13 - #90. (외전) 조연주 (3)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자리가 무르익었다.
슬슬 이 자리가 마련 된 이유를 말할 때가 왔다는 것을 느낀 연주가 입을 열었다.
“사실 내가 오늘 널 부른 건 처리해야 할 인간이 생겨서야.”
“예, 말씀하십시오.”
관이는 그녀가 운을 떼자 기다렸다는 듯이 눈을 반짝였다.
당장이라도 어디 땅 아래에 사람을 묻고 시멘트를 발라 버릴 것 같은 기세였다.
“그 치들을 보내버리려면 구린 걸 터트려야 하거든. 근데 그것들이 정치권이랑 인연이 깊어.”
“저희랑 연결 되어 있는 정치권 인사들과 반대파에 있는 사람이겠군요.”
“그렇지.”
만약 그 정치인들이 관이와 연관 되어 있는 쪽이었다면 이런 부탁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거라면 제가 부탁을 받는 게 아니라 오히려 언니께 도움을 받는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얽혀 있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아. 내가 목표로 한 인물들은 논란이 터지면 금방 쓸려가겠지. 문제는 내가 밝힐 비리를 파고들면 그 윗선으로 정치권 인사들이 나온다는 거다.”
최관은 그녀가 하는 말의 의미를 충분히 알고 있었다.
“너무 위험합니다. 비리를 누가 밝혔는지 찾아내서 보복 할 겁니다.”
“그렇지. 자기가 누굴 짓밟는 건 상관없지만, 본인이 짓밟힘 당하면 절대 참지 않는 작자들이니까.”
“꼭 윗선까지 손을 대셔야 하는 겁니까?”
“물이 고이다 못해 썩어서 주변을 곪게 만드는 인사들이다. 이번 기회에 치워야 해. 그래야 이쪽이 한결 나아질 테니까.”
솔직히 신경 안 쓰고 방치하고 싶기도 하다.
굳이 그녀가 나서야 하는 일인가 의문도 들고.
하지만 그녀가 이번에 나서서 터트리지 않는다면 그들은 계속해서 더러운 짓을 하고 다닐 것이다.
결국 그 여파는 이 바닥에 영향을 미칠 것이고 말이다.
“내가 쓰레기를 치운다고 해서 이 바닥이 깨끗해질 수 없다는 건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쓰레기를 치워야 할 때가 있는 거야.”
그걸 할 수 있는 사람이 현재 그녀밖에 없다는 것이 참 안타까운 일이다.
“그래서 네 도움이 필요한 거다. 최대한 내 목적을 숨기고 정치권 싸움으로 터트리고 싶어.”
목표가 아닌 시작으로 꾸며서 당하는 사람들이 오해를 하도록 만드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최관의 도움이 필요했다.
엔터 회사를 운영하는 자신과 같은 사람보다는 조직을 운영하는 관이가 훨씬 더 정치권과 친밀하고 할 수 있는 일이 컸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아마 그쪽 인사들 비리를 받으면 아주 좋아할 겁니다. 다만 그 자들이 이걸 바로 사용할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런 것들은 바로 쓰는 것보단 묵혀둬서 필요할 때 쓰는 걸 좋아하는 자들입니다.”
그렇게 묵혀지는 사이 피해를 입는 사람들의 입장은 전혀 고려할 대상이 아닐 것이다.
좀 더 완벽한 타이밍에, 적들의 숨통을 끊을 수 있도록.
그래서 본인들에게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순간에 터트리려 할 거다.
혹은 이 비리 증거를 통해 그들과 거래를 하는 것도 예상해볼 수 있는 방법 중 하나였다.
“예상하고 있는 일이야. 그래서 이걸 넘기기 전에 내 쪽에서 살짝 불씨를 만들어 놓을 거다. 불이 붙기 시작해서 더 이상 끌 수 없어진다면 그자들도 지금이 타이밍이라고 생각하겠지.”
안 쓰고는 못 배기도록 할 방법은 다양하다.
워낙 다양하게 범죄를 저지르고 다니는 놈들이다 보니 불을 붙여놓을 곳이 많았다.
“너도 일단 증거가 뭔지 봐야 감을 잡을 수 있겠지. 한 번 살펴보렴.”
그녀는 준비해온 서류를 관이에게 넘겼다.
관이는 서류 안에 있는 증거들을 하나씩 살펴봤다.
절로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사진들과 각종 영상 자료들이 적나라하게 들어있는 증거들이었다.
“생각보다 훨씬 적나라하고 확실한 증거들이군요. 얼굴까지 완벽하게 나와 있으니 말입니다.”
“기획사 쪽에서 정치권 인사들 로비하는데 가장 쉬운 방법이 몸로비니까.”
“근데 이건 언니께서 만드신 증거들인가요?”
“응. 다른 쪽에서 구한 거 아니니 보안은 걱정하지 마.”
“이 사람은 대선 후보군요…. 이 자까지 끼어 있을 줄이야.”
관이는 그녀가 준 증거들에 거물이 불쑥불쑥 튀어나오자 당황했다.
“이 정도로 큰 건을 터트려서 해치우고 싶은 사람이 도대체 누굽니까? 언니의 심기를 어떻게 건드렸기에….”
“사실 네가 들으면 우스울 거다. 대형 기획사 사장들이거든.”
“…기획사 사장이요? 고작 그자들 쳐내겠다고 이걸 터트리신다고요?”
“나를 건드렸으니 그만한 대가는 받아내야지.”
그녀는 궁금해 하는 관이에게 요 근래 일어났던 일을 얘기해주었다.
그러지 관이가 엉뚱한 말을 해왔다.
“그치들을 처리하려고 쓰기엔 너무 증거가 아깝지만, 언니께서 필요한 일이라 하시니 따르겠습니다. 그리고 불씨를 놓는 것도 제게 맡겨주십시오.”
“그것도? 어떻게 하려고?”
“방법이야 다양합니다. 일단 미성년자 성추행 아니, 성폭행으로 작업을 해서 언론에 논란을 일으키는 겁니다. 기왕이면 세 사람이 미성년자 한 명을 성폭행하고 영상을 제작했다고 하면 치명적이겠군요. 그런 후에 스폰 문제를 터트리면 그 작자들이 얼마나 오래 그 자리를 유지할 수 있겠습니까?”
미성년자 성폭행.
없던 죄를 작업해서 만들겠다는 뜻이었다.
‘없던 죄를 만드는 건 아닌가? 그놈들은 그보다 더 심한 짓을 저지르고 다녔을 테니.’
그 세 명이 뭉쳐 다니면서 뭐 얼마나 깨끗한 짓을 하고 다니겠나?
미성년자를 건드리는 건 아니어도 남자를 데리고 와서 더러운 짓을 해왔을 것이다.
그녀가 생각했던 불씨와는 조금 방향이 다르긴 하지만, 그렇게 시작하는 것도 썩 나쁜 일은 아니었다.
“네가 작업했다는 걸 들키지 않을 자신은 있는 거니?”
“솔직히 들켜도 크게 상관은 없습니다. 더 큰 비리는 정치권에서 터트려줄 테니까요. 그리고 언니께서 작업을 하셔도 위험한 건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차라리 저희 쪽에서 하는 게 나을 겁니다. 적어도 저는 쉽게 건드리지 못할 테니 말입니다.”
허니 엔터의 대표라는 직함보다는 뒷세계를 지배하는 조직의 보스가 더 건드리기 힘든 건 사실이었다.
“내 일인데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고 너한테 전부 맡기라는 거니?”
“대신 저도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부탁? 네가 나한테 할 부탁이 뭐가 있다고.”
“있습니다.”
부탁을 해온다면 상황이 달라지기는 하다.
“무슨 부탁인지 들어보자.”
“…보스께서 현오랑 같이 여행을 다녀오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또 그놈의 늙은이를…!
“네가 부탁할 게 있다는 말에 설마 했는데 예상에서 벗어나질 않는구나. 그 인간이 그렇게 좋니?”
“보스께서 소원 하신 일입니다. 현오한테도 좋은 일일 겁니다. 여행으로 다양한 경험을 하게 될 테니까요.”
“아니. 내가 미쳤다고 그 사람한테 현오를 맡길까! 같이 다니다가 위험해지면 어쩌려고? 지금도 그 인간 배에 칼 박아 넣고 싶은 사람이 백 명은 넘을 거다. 그런데 그런 사람한테 현오를 보내라고?”
“저도 무리한 일이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한 번쯤은 어떻게 안 되시겠습니까? 보스는 해외에서 안전하게 여행을 즐기고 계십니다. 제가 최선을 다해서 현오 안전을 책임지겠습니다.”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지금은 허락할 수 없어.”
그 사람한테 보냈다가 현오가 다치기라도 한다면?
그땐 그 사람과의 관계는 회복이 불가능해질 것이다.
“적어도 그 사람이 멀쩡하게 살아서 돌아다니는 걸 몇 년은 봐야겠다. 안전하다는 게 증명 되어야 해. 그리고 현오가 좀 더 커서 자기 몸을 지킬 수 있을 때가 된다면….”
그때쯤이라면 한 번쯤은 보낼지 말지 생각은 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말에 관이의 표정이 환하게 펴졌다.
“정말 그 정도면 되겠습니까?”
아예 불가능할 줄 알았는데, 생각은 해보겠다고 하니 반쯤은 허락을 했다는 걸 깨달은 모양이다.
“나는 그 사람과 아예 연락을 하고 지낼 생각이 없었어. 이 정도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양보다.”
“물론입니다. 언니께서 얼마나 큰 배려를 해주셨는지 잘 압니다. 사실 보스도 큰 기대없이 하신 말씀이셨습니다.”
“너한테는 별 거 아닌 소리로 들리지 않았겠지.”
어떻게든 그 양반이 한 말을 이뤄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마침 기회가 와서 잽싸게 말을 한 걸 테고 말이다.
‘예정보다 더 빨리 운동을 시켜야겠군.’
아직 아가임에도 불구하고 현오의 운동 능력이 심상치 않았다.
애가 얌전한 편이라서 어릴 때는 잘 몰랐는데, 지현이와 함께 놀 때를 보면 남편이 깜짝 놀랄 정도로 날래고 힘이 세다고 한다.
아이가 건강하다는 건 기분 좋은 일이지만, 뛰어난 신체 능력을 폭력 휘두르는데 쓸까 걱정이 됐다.
아이를 바르게 키워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것도 모두 이 때문이다.
현오의 주변 환경이 나쁜 길로 빠지기 쉬우니 어느 때보다도 인성을 바르게 키워야 하는 것이다.
“맡기신 일은 걱정하지 말고 맡겨주십시오. 끝까지 책임지고 해결하겠습니다.”
“…그래, 믿고 맡기마.”
최관도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후일에 보스의 소원을 이룰 수 있는 단서를 얻었고, 그녀도 원했던 가족과 회사의 안전을 얻었으니 서로에게 win-win이 될 수 있는 거래였다.
“그나저나 관아.”
“네, 언니.”
“너 요즘 연애는 어떻게 되고 있니?”
“…연, 애요?”
“그래, 잘 되고 있던 걸로 아는데, 영 소식이 없어서. 그 사람이 따로 말하는 것도 못 봤고.”
“그냥 형부가 언니를 봐서 제게 조금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겁니다.”
“그게 끝이라고? 나는 네가 그 사람이랑 잘 됐으면 했는데.”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이신가요?”
“내 남편이라서 하는 소리는 아닌데, 그 사람이라면 널 품어 줄 수 있을 거다. 웬만하면 놓치지 말고 잡아.”
그녀가 이런 소릴 할 거라곤 생각 못했는지 많이 놀란 눈치였다.
“그 사람 아니고선 너 같은 여자를 누가 받아주겠니? 넌 그 사람한테 벗어나기 전까진 정상적으로 남자 못 만난다. 그 남자가 널 진심으로 사랑해주지도 확신할 수 없고.”
“…예. 잘 알고 있습니다.”
관이가 가진 재물을 탐하는 남자라면 그녀의 곁에 붙어 있기는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남자를 만나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녀의 남편보다 모든 면모에서 떨어지는 것들일 텐데.
“나한테 미안해서라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그 사람을 포기하려고 하는 거라면 난 오히려 반대한다. 그 사람과 자주 만나렴. 너도 가정이 생기고 아이가 생기면 많은 게 바뀔 거다.”
문득 말하고 나니 제법 그럴 듯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도 바꿔 준 남편인데, 관이라고 다를까?
어머니의 뒤를 따르기만 하는 그녀에게 다른 세상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남편이 필요했다.
“시간이 부족하더라도 꾸준히 만나.”
“질투를 하셔야 하는 게 정상 아닌가요? 이렇게 만남을 적극적으로 권유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질투 안 한다. 여자가 몇 명인데 질투를 할까. 내가 직접 약속을 잡아서 너한테 데려오기 전에 그 사람 꼭 붙잡아. 네가 바란다면 마다하지 않을 거다.”
“…감사합니다, 언니.”
“나야말로 오늘 시간 내줘서 고마웠다.”
생각이 많아 보이는 관이와의 만남은 그렇게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