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15 - #90. (외전) 조연주 (5)
다른 사람이면 좀 고민했겠지만, 로즈는 지현이와 현오가 워낙 친해 그나마 가족 중에서는 가장 익숙한 사람이었다.
같은 회사에서 일했던 사이이기도 하고.
“시간이 지나면 벗겨질 오해이니, 참고 견디는 중입니다.”
“언니가 터트렸다는 걸 알리면 안 되는 거죠?”
“물론이죠. 숨겨야 합니다. 아무도 모르게요.”
보복을 할 여유가 아직 존재한 이들이다.
사람들의 불편한 시선과 오해를 풀자고 밝히기엔 리스크가 컸다.
“좋은 일을 해도 보복이 무서워서 밝힐 수 없다니. 정말 나라 꼴 대단하네요. 그래도 너무 서운해 하지 말아주셨으면 좋겠어요. 저희는 알잖아요. 언니가 해낸 일이라는 거.”
“…그렇게 대단한 일을 한 건 아닙니다.”
“대단한 일 맞죠! 원래 시작이 중요한 거잖아요. 언니가 알리지 않았으면 지금도 피해자들이 계속 저 나쁜 것들한테 이용당하고 있었을 거에요. 적어도 저한테는 은인인 거죠. 이번 일 덕분에 학원 쪽도 싹 쓸려가서 마음 졸일 필요가 없어졌거든요.”
로즈씨의 학원을 위협해오던 쪽도 이번 일과 연관 되어 싹 쓸려 나갔다고 한다.
애초에 불법 자금으로 만든 학원이다.
다만 폐업 과정에서 학원생들이 피해를 입었고, 그쪽으로 이직한 선생들도 순식간에 일자리를 잃어 그녀에게 다시 돌아오게 해달라고 찡찡대는 모양이었다.
“깔끔하게 쳐내서 속이 시원했는데, 제가 그 사람들을 왜 받아주겠어요. 업계에서도 그쪽이랑 연관 된 학원이라서 그런지 받아주는 곳이 없다고 들었어요. 속 시원한 일이죠. 완전 사이다! 안타까운 건 상황이 좀 잠잠해지면 결국 취직은 할 거라는 거죠. 인성에 문제가 있는 거지 실력이 부족한 건 아니라서.”
로즈는 완전히 그쪽 세력이 정리 된 것이 기뻤는지 표정이 좋아보였다.
남편도 참 잘했다며 그런 쓰레기들을 조금이라도 일찍 쓸어버릴 수 있어 다행이라고 말해왔다.
“이런 일이 또 벌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요즘 세상에 노예라니…. 너무 끔찍하잖아요. 그런 것들이랑 같이 하하호호 대화를 나눴다는 것만으로도 속이 안 좋아요. 언니도 충격 많이 받으셨죠?”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습니다. 물론 금수만도 못한 짓까지 할 줄은 몰랐지만요.”
“에이! 우리 그 사람들 일 그만 말할까요? 말해봤자 기분만 더러워지는데. 그리고 술은 한 잔씩 하는 거 어떻게 생각해요? 식사도 좋지만 이런 일에는 역시 술이 빠지면 섭하잖아요.”
로즈가 적극적으로 술자리를 권하자 연주는 못 이기는 척 제안을 받았다.
“그럴까요?”
보통 그녀가 술을 마실 경우에는 대부분 접대를 하는 자리였다.
원래도 술이 센데, 자주 접대를 다니다 보니 지금은 웬만큼 마셔도 취하지 않는 수준이 됐다.
그녀에게 술은 ‘일’의 일환이라서 이렇게 개인적인 시간에 편한 사람과 술을 마신다는 게 익숙하지 않았다.
“술 있어? 밖에 나가서 사올까?”
남편의 물음에 로즈씨가 말했다.
“아니, 괜찮아. 제가 오늘 쓸 일이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해서 준비해둔 술이 있거든요. 언니 입에 맞을지는 모르겠네요.”
로즈씨가 준비해온 술을 확인하니 제법 가격이 센 와인이었다.
“와인을 즐겨 마시진 않는데, 이게 되게 귀한 거라고 하더라고요.”
“맞습니다. 좋은 와인이네요.”
그녀가 좋은 와인임을 증명해주니 로즈씨의 표정이 밝아졌다.
다만 연주는 그녀에게 이 정도로 대접을 받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기에 말했다.
“사실 대접은 제가 로즈씨한테 하는 게 맞지 않나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저한테 언니가요?”
“로즈씨 덕분에 우리 회사 연습생들 실력이 얼마나 늘었는지 잘 아니까요. 실력파로 성장할 수 있었던 건 전부 로즈씨가 아이들을 잘 가르쳐줬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거라면 충분히 대가를 받았어요. 월급을 얼마나 빵빵하게 챙겨줬는데요. 그 덕분에 지금 학원도 차릴 수 있었던 거잖아요.”
회사 다니면서 돈을 모아 자기 회사를 차린다?
말이 쉽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로즈씨는 회사가 대가로 줬던 금액 이상의 일을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항상 감사 인사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럼 감사 인사 대신, 말이나 좀 놔주시면 안 될까요?”
“…예?”
“저는 언니라고 부르는데, 아직도 언니는 저를 로즈씨라고 부르잖아요. 좀 친하게 지내면 안 돼요? 너무 부담스러운 부탁이었을까요?”
“아닙니다. 제가 또 무심했네요. 앞으로 편하게 하겠습니다. 아니, 편하게 할게.”
“좋네요. 언니! 앞으로도 쭉 지금처럼 편하게 대해줘요. 가끔 술 생각나면 불러서 같이 마시는 것도 좋고요.”
술친구가 되어 주겠다는 말에 묘한 감정이 들었다.
누가 자신에게 술친구 하자는 말을 할까.
그녀 인생에 처음 듣는 말이었다.
“술친구라….”
“술친구 별로에요? 쉬는 날 가볍게 한 잔씩 마시면서 얘기 나누자는 거였어요. 편하게요. 회사 규모 차이는 있지만, 어쨌든 언니랑 저랑 회사 운영하는 사장이긴 하잖아요. 우리 서로 잘 맞지 않을까요?”
“두 사람 너무 나만 빼놓고 얘기하는 거 아냐? 서운해지려고 하는데. 나도 한 잔 줘.”
“아이구, 우리 삐돌이 또 삐졌어? 자! 짠하자. 짠!”
술이 한 잔, 두 잔 들어가기 시작한다.
술이 세서 잘 취하지 않은 그녀라도 알콜의 영향을 받는 건 필연적인 일이었다.
모두들 술을 잘 먹는 사람인지라 와인의 반으로 줄어들었음에도 볼이 살짝 붉어졌을 뿐 취한 사람은 없었다.
“나 잠깐 화장실 좀~”
로즈가 잠시 자리를 비웠다.
남편이 자기 손에 턱을 괸 채로 그녀를 빤히 바라보더니 갑자기 말해왔다.
“예쁘시네요. 누님.”
“뜬금없이?”
“요즘 살 빠지신 거 알아요?”
“…잘 먹고 다니라고 말하려고 하는 거야?”
“일이 잘 진행 되고 있는데 왜 그렇게 표정이 안 좋으신 거에요? 마음대로 안 되는 일 있어요?”
“그냥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것 자체가 마음에 안들뿐이야. 업계 자체가 망신을 당한 거나 다름없으니까.”
“앞으로 또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게만 하면 되죠. 이제 누님은 그럴 수 있는 힘이 있잖아요.”
왜 나라에서 독점이나 독주를 반기지 않는가.
그들이 가지는 권력으로 시장이 휘둘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일로 큰 충격을 받은지라 대형 기획사들의 앞날이 어두운데, 유일하게 살아남은 것이 허니 엔터다.
중소 기획사들이 여전히 살아 있기는 하지만, 대형 기획사의 힘과 비교할 수 없는 미미한 수준이다.
이제 연예계 생태계는 허니 엔터가 큰 영향을 미칠 게 분명하다.
“그래…내가 잘 해야지.”
“누님은 잘 하실 거에요. 원래 허니 엔터를 세웠던 것도 이런 문제가 벌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고 들었어요.”
“맞아. 내가 사장님이랑 허니 엔터를 만든 이유가 그거였어. 적어도 아이들이 몸을 함부로 버리진 않게 하는 거.”
“지금까지 충분히 잘 해내고 계셨어요. 이번 일로 다른 곳에서도 경각심을 갖게 됐을 거고요.”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하지만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뭐라도 하는 게 맞는 일이라는 걸 떠올렸다.
“내가 또 일에 신경 쓴다고 가정에 소홀해지면 어쩌려고 그렇게 부추기는 거니?”
“이젠 그러고 싶어도 못하실 걸요? 현오 소중하시잖아요.”
“소중하지. 내가 회사 일을 할 때 집중을 못하고 보고 싶어 할 정도로.”
“거봐요. 이제 일에만 신경 쓰고 싶어도 못 그럴 걸요? 현오 보고 싶어서 꼬박꼬박 야근도 잘 안 하고 들어오면서.”
“하하!”
남편이 그녀의 변화를 제대로 알고 있었다.
“그 일을 시작하면 지금보단 시간이 안 날 거야.”
“제가 현오 잘 돌볼 게요. 칸나도 잘 해주고 있고요.”
“너한테 맡겨도 되겠어?”
“네. 그 정도 내조는 해줘야죠.”
“네가 잘 해줄 건 아는데, 요즘 관이랑은 왜 안 만나는 거니? 시간이 부족한 것도 아닐 텐데.”
“처제요? 왜요? 나 보고싶대요?”
“흥, 뻔뻔하기는. 그걸 나한테 묻니?”
“하하. 죄송해요.”
남편이 머쓱한지 머리를 긁적인다.
“걔 좀 잘 챙겨줘. 외로운 애야. 그나마 너한테 마음 빗장을 좀 풀었는데 이대로 방치하다가 다시 닫히면 어쩌니? 한 번 닫히면 다시 열기 어려울 거다.”
“이 부분은 좀 억울한 게 있는데요.”
“억울한 거?”
“저는 연락을 꾸준히 하는데 처제가 절 만나주질 않아요.”
“걔가 그랬어?”
“네. 연락을 잘 받는 것도 아니고요.”
“뭐가 문제인 건데?”
“시간이 안 난다고만 들었어요. 제가 보기엔 위험해서 그런 것 같아요.”
“위험이라…. 지금도 마찬가지겠구나.”
“이번 일 때문에 더 못 만나게 되긴 했죠.”
“관이가 네 능력을 모르던가?”
“네, 아직 말 못 했어요.”
“그래서 더 못 만났겠구나. 안전이 걱정 되는 거였다면.”
“말하는 게 나을까요?”
“무슨 얘기해?”
그때 로즈가 화장실에서 볼 일을 보고 나왔다.
술기운 때문에 세수를 했는지 얼굴에 촉촉한 물기가 묻어 있었다.
“내 동생 얘기를 하는 중이었다.”
“동생? 저도 들어도 되는 얘기에요?”
“네 의견을 물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괜찮겠어요?”
남편이 그녀의 말에 깜짝 놀라 물었다.
“숨길 이유가 없지. 가족이잖니.”
“뭔지는 모르겠지만 언니한테 예민한 일이라면 굳이 말씀 안 해주셔도 돼요.”
“내 집안에 대한 얘기가 나와야 해서 썩 듣기 좋은 얘기는 아닐 거다. 아마 들으면 네가 불편하긴 할 거야.”
“언니는요?”
“난 상관없어. 자랑할 만한 일은 아니지만 숨길 것도 없는 얘기니까.”
과거였다면 남들에게 말할 생각이 절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관이가 보스 후계자가 되면서 완전히 그쪽과는 선을 그을 수 있게 됐기에 편하게 말할 수 있었다.
특히 그 대상이 남편의 여자인 ‘가족’의 울타리에 있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조폭이요?! 어머, 죄송해요. 이렇게 놀랄 건 아니었는데….”
“괜찮다. 누구나 이런 얘기를 들으면 놀랄 테니까.”
“그래서 얘가 그 조직 보스라는 동생 분이랑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된 상태라는 거죠?”
“그래.”
“너무…위험한 거 아니에요?”
“오히려 그 아이랑 친하게 지내는 게 현오를 위해 안전한 일이 될 거다. 관이는 나를 해칠 생각이 없지만, 어머니가 은퇴하고 난 이후 부하들은 그렇지가 않을 테니까.”
“너는 진짜 간도 크다! 어떻게 그런 사람을 꼬실 생각을 하니?”
로즈가 남편의 어깨를 퍽퍽 때렸다.
“아야아야!”
“언니는 기분 나쁘실 수 있지만 얘가 걱정이 돼서 몇 마디 안 할 수가 없는 것 같아요.”
“이해해.”
“아무튼 그 사람한테 얘 능력을 밝힐지 안 밝힐지 상의하고 있었다는 거죠?”
“응.”
“밝히지 않는 게 맞지 않아요? 그쪽에서 얘한테 폭력적으로 굴면 어떡해요? 전국 조직계를 다 합친 곳이라면서요.”
“그건 누나가 관이씨를 몰라서 그러는 거야. 내 능력을 이용해서 자기 이익 취할 사람이 아니야.”
“그래서 너는 알리고 싶은 거야?”
“위험하다고 날 만나주질 않으니까. 능력을 밝히면 적어도 위험해서 못 만난다는 소리는 안 할 거 아냐.”
관이를 직접 소개시켜준다 한들, 로즈가 안심하지는 않을 것이다.
로즈는 엄연히 최관 범위 바깥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런 위험한 사람은 꼭 만나야 하는 거고?”
“아마도? 그리고 위험한 사람 아니야. 누나가 너무 조폭 보스라는 거에 집중해서 편견을 갖고 있는데 전혀 안 그래. 현오 대모라니깐. 나랑 안 만나주는 것도 내 걱정이 돼서 그런 거잖아.”
남편은 걱정하는 로즈를 설득하기 위해 열심히 설명을 이어갔다.
“그리고 솔직히 처제가 나쁘게 나와도 나한테 큰 위협이 되지는 않아.”
“…….”
“…….”
남편의 거만한 말에 우리 두 사람 모두 할 말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