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20 - #90. (외전) 조연주 (10)
“신정경씨가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회사에서 전혀 해명에 도움을 주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회사는 나를 알아봤을 테니 그럴 만도 하죠.”
“저희는 그럼 어떻게 할까요?”
“이 정도도 깔끔하게 해결을 못하는 모습을 보이면 안 되죠. 저희가 나서죠.”
말을 다 맞춰놓긴 했지만 아직 그의 소속 회사는 허니 엔터가 아니다.
“정말 이런 식으로 일을 하는 곳이 대형 기획사였다는 게 믿어지질 않아요. 이런 식으로 행동하면 소문이 나서 아무도 계약을 하려고 하지 않을 텐데 말이에요.”
“미래를 생각할 만큼 여유가 없는 거겠죠.”
“이런 상황이면 앞으로 주가가 더 떨어질 것 같습니다. 다들 신나게 뜯어먹고 있는데, 좀 더 욕심을 내보시는 게 어떨까요?”
“당연히 그럴 겁니다. 지금 나서지 않은 건 꽁꽁 숨겨두고 있는 알짜베기들이 나오기까지 기다릴 필요가 있어서였습니다. 다른 회사들이 쭉정이들을 데리고 힘 빼는 사이에 저희는 진짜 이득을 줄 수 있는 것들을 뺏을 겁니다.”
신정경은 쭉정이들 사이에 있기엔 아까운 면이 있어서 그녀가 컨택을 한 거였다.
그 외에 연예인들은 다른 협력 회사들에게 일부러 양보를 한 거였다.
그래야 허니 엔터에서 알짜를 빼먹어도 뭐라 할 수 없을 테니 말이다.
허니 엔터에서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연예인들을 빼가려고 했다면 어땠을까?
협력 회사들은 손가락만 빨면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을 거다.
대부분의 연예인들이 허니 엔터를 선택했을 테니까.
‘그 정도 자신은 있으니.’
신정경도 회사에 크게 대였음에도 불구하고 허니 엔터의 접촉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러니 허니 엔터가 움직이지 않았다는 것 자체가 다른 회사에 기회를 준 거나 다름없는 일인 것이다.
물론 그들이 그러한 사실을 알게 됐을 땐, 늦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미 배부르게 먹어서 먹고 싶어도 더 이상 소화할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을.
더욱이 대형 기획사가 전부 무너진 상황에서 유일하게 큰 피해 없이 살아남은 허니 엔터의 심기를 건드릴 회사는 없을 것이다.
“신정경씨 입장에서 내지 말고, 저희 쪽 입장을 기사에 내도록 하죠. 신정경씨와 긍정적인 방향으로 접촉 중이라고요. 전 회사에서 신정경씨한테 저지른 일들도 폭로합시다.”
“예, 알겠습니다.”
“될 수 있으면 시간을 두고 밝혀서 다른 소식에 휩쓸려가지 않게 하려고 했지만, 신정경씨를 최대한 빨리 회사에서 빼오는 게 나을 것 같네요.”
협조를 해주기는커녕 신정경이 넘어지길 바라는 회사.
그런 회사에 계속 뒀다가 커리어에 문제가 생기면 곤란하다.
회사에서 그를 괴롭히려고 한다면 얼마든지 가능했다.
‘행사 뺑뺑이를 시켜서 목을 아작 내는 게 가장 위험해.’
신정경이 가진 가창력은 특별하다.
그 가창력에 오물이 뿌려진다?
절대 두고 볼 수 없는 일이었다.
신정경의 가치가 떨어지기 전에 그를 빼내와야 했다.
[신정경의 그녀, 알고 보니 허니 엔터 대표!]
[신정경 이적하나? 발등에 불 떨어진 진성경 소속 회사. 여전히 묵묵부답!]
[피앙세인 줄 알았던 그녀, 놀랍게도 허니 엔터 대표로 밝혀져.]
[허니 엔터 신정경과 접촉 중!]
[묵묵부답이었던 소속사, 왜 그럴 수밖에 없었을까?]
[신정경 “현 소속사와 계약한 것 후회해.” 소속사 옮기는 것 가능할까?]
“이젠 사람들이 지겨워하고 있어요.”
“쉴 세 없이 터지니까 그럴 수밖에 없겠죠.”
“대체적인 반응을 살펴보면 얘네들은 그냥 답이 없다, 지긋지긋하다, 언제까지 이럴 거냐, 그냥 접어라 등등입니다. 여론이 답이 없다는 쪽으로 모이는데는 성공했지만, 계속 터지는 논란으로 큰 충격을 주진 못한 것 같습니다.”
“이미 예상한 일이에요. 이 정도 손해는 어쩔 수 없죠. 신정경씨를 얻는데 도움은 될 겁니다.”
“저희 쪽과 이미 얘기가 끝난 상황 아닌가요?”
“벌써 다 잡은 물고기라면서 밥을 안 주겠다는 마인드를 갖고 있으면 당장 버려요. 우리가 그놈들이 하는 짓을 똑같이 할 순 없죠.”
“아! 죄송합니다.”
그놈들의 트롤짓을 비웃었던 거 엊그제인데, 우리 회사가 그런 짓을 하는 건 절대 봐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번 일은 반면교사 삼을 필요가 있어요. 다른 직원들한테도 전했으면 좋겠어요.”
“예, 알겠습니다. 대표님.”
비서가 나가고 혼자 방에 남은 그녀는 핸드폰을 꺼냈다.
“휴우.”
스캔들이 나자마자 가장 먼저 연락을 받은 건 회사가 아니라 남편이었다.
남편은 오보라는 것을 알면서도 질투심을 서슴없이 내보였다.
남자는 남자가 제일 잘 안다고, 신정경씨의 눈빛에서 그녀에 대한 호감을 읽었다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그리고 매우 애석하게도 그의 짐작은 매우 예리하게 맞아 떨어졌다.
그녀의 번호를 받아간 신정경으로부터 꾸준히 개인적인 연락이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계약을 하기 전까지는 받아줘야 하는 연락들이었다.
하지만 이런 일들을 남편에게 거짓말하고 숨길 수는 없었다.
그녀의 성격에 맞지 않은 일이기도 하고 말이다.
“어서와요.”
“응. 많이 기다렸니?”
“아뇨. 앉으세요.”
남편에게 모두 얘기를 해주겠다며 마련한 자리.
그녀는 남편이 오랜만에 풀장착하고 나타난 것을 보고 속으로 피식 웃었다.
‘귀여워라.’
질투심 때문에 일부러 저렇게 잔뜩 꾸미고 나타났다는 것을 아는 그녀에겐 남편이 귀여워보였지만,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풍문으로만 들어봤던 진해솔의 실물을 보며 경악하고 있었다.
“안경 안 썼구나.”
“보여주려고 이렇게 꾸미고 온 건데 안경을 쓰면 안 되죠.”
“정말 스캔들을 내야 직성이 풀리겠다는 거야?”
“인정을 안 하면 되죠. 겉보기에는 그냥 전 회사 대표님과 식사 하는 걸로 보일 걸요?”
이럴 때는 그와 나이 차이가 많이 난다는 점이 유리하게 다가온다.
진해솔 같이 다 가진 남자가 나이 차이 많이 나는 ‘아줌마’를 만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할 테니 말이다.
상황을 수습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 가늠해본 그녀는 순순히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주문을 하고 곧 식사가 차려졌다.
식사를 하면서 그녀는 신정경과 얽혀 있는 상황을 차분하게 설명했다.
남편은 흥분하지 않고 차분하게 그녀의 상황을 귀 기울여 들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오는 연락을 받아주고 있는 거군요.”
“언제까지 아이돌만 키울 순 없으니까. 배우 쪽으로도 인프라를 넓혀 볼 생각이다. 오랫동안 생각해오던 일이고, 마침 좋은 매물이 나와 있는 상황이라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어.”
무너지고 있는 대형 기획사 중에는 배우 쪽에서도 좋은 인프라를 갖춰놓은 회사가 있었다.
문제가 터진 것은 아이돌 쪽이지, 배우 쪽은 의외로 좋은 인력들이 많아서 잡아 먹기 매력적인 매물이었다.
“우리 회사에도 배우 쪽 인프라는 잘 갖춰져 있는 거 아닌가요? 제가 연기했을 때 서포트 잘 해주셨잖아요.”
“그쪽 회사랑 합쳐지면 힘들이지 않고 자리를 잡을 수 있으니까. 신정경은 그런 점에서 좋은 본보기가 될 거다.”
신정경은 뛰어난 실력파 가수이기도 하지만 연기 쪽으로도 꽤 성공적으로 자리를 잡은 배우이기도 했다.
비주얼이 되는 가수를 노래만 시키는 바보는 없었고, 대사를 어색하지 않게 읽을 줄 아는 수준이라면 무조건 연기를 시키고는 했다.
인지도에서 먹고 들어가니 심각한 연기 고자만 아니면 대부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주었기 때문이다.
‘그 문화가 아이돌로 전파 되면서 발연기를 해도 인지도 때문에 캐스팅이 되다 보니 욕을 먹게 됐지.’
하지만 이젠 아이돌 출신이라도 연기력이 부족하면 받아주지 않는, 실력파가 아니고선 살아남기 힘든 바닥이 됐다.
신정경은 그런 바닥에서 살아남은 가수 출신 연기자이고 말이다.
“일단 상황은 알겠어요. 그 사람이 필요하다는 거. 근데 남편이 있는 사람이 자기한테 호감 있는 남자 연락을 계속 받아주는 건 문제 있다고 봐요. 이건 비즈니스를 사적인 일에까지 끌고 온 거잖아요.”
“…그래.”
“허니 엔터는 사적인 문제를 비즈니스에 끌고 와야 할 만큼 매력이 떨어지는 회사가 아니에요. 그 사람한테 허니 엔터만큼 좋은 선택지가 더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죠.”
“…….”
보통 그녀가 일을 할 땐 효율성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개인적인 연락을 받아주다가 천천히 정을 떼게 하는 것은 그녀에게 매우 쉬운 일이었다.
한두 번 해온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조금만 참으면 일을 쉽게 해결할 수 있는데 어렵게 만들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지금까지는 남자가 없었기에 이런 행동을 해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걸 남편한테 이해해달라고 부탁해야 하는 건가? 언제까지 그래야 하지?’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행동했던 건데, 지금은 그때와 상황이 다르다는 걸 미리 눈치 챘어야 했다.
“사과하마.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걸 이제야 알았어. 과거에는 그래도 됐지만, 지금은 이런 식으로 행동하면 안 된다는 걸 알았어야 했는데….”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계신 거 맞아요?”
그녀의 대답이 마음을 풀리게 했는지 남편의 목소리가 많이 수그러들었다.
“널 만나기 전에는 항상 그렇게 해 와서 문제가 될 거라고 생각을 못했다.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쓰는 게 당연했어. 그런데 네 말을 듣고 나니 이젠 그러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구나. 너한테 굉장히 실례 된 행동이었다는 걸 말이야.”
“제가 이런 부분을 이해해주지 않고 싫어해서 서운하진 않으시고요?”
이어서 덧붙인 말이 남편의 화를 사그라지게 했는지 이젠 그녀의 눈치를 보기까지 한다.
본인이 여러 여자를 만난다는 이유로 이런 부분에 있어서는 화를 내기보단 이해해보려 노력하는 편인 남편이었다.
아내가 그를 배신할 리 없다는 믿음도 갖고 있었고 말이다.
다만 이번에는 그녀가 비즈니스 때문에 남자의 접근을 받아주고 있다는 점에서 남편을 진심으로 화나게 했던 것 같았다.
“오히려 내가 널 서운하게 했으니 사과를 해야지.”
“…우리 그 얘기는 이제 그만하고 맛있는 거 먹고 데이트나 하러가요. 오랜만에 이 시간에 같이 있는 거잖아요.”
“그럴까?”
연주는 남편의 화가 다 풀린 것을 느끼며 흐뭇하게 웃었다.
일 때문에 남편과 다투게 될 거라는 건 예전부터 각오했던 일이지만 그녀가 우려했던 것보다 훨씬 큰일이 되지 않고 부드럽게 말로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사실 과거의 그녀였다면 오히려 남편에게 이해를 바랐을 것이다.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건 회사.
‘마음을 받아주는 것도 아니고 당분간 적당히 받아주는 건데 뭐가 문제냐고 했겠지.’
본인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기에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과거에 그녀가 남자를 만나지 않았던 이유도 이 때문이다.
남자와 만나도 짧게 만나고 헤어질 수밖에 없었고 말이다.
‘일과 사랑을 선택하라고 한다면 나는 일을 선택할 사람이었어.’
하지만 이제는 달라졌다.
저 남자가 그녀를 달라지게 만들어버렸다.
일보다 사랑이 더 중요해질 수 있는 사람으로 말이다.
‘그런 짓을 해놓고도 얄밉지 않은 게 신기하지.’
더욱이 일을 해야 할 시간에 남편을 달래기 위해 시간을 냈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짓이었다.
갑작스러운 변화는 그녀를 두렵게 만들었다.
남편이 갖고 있는 특별한 능력으로 자신을 이렇게 변화시킨 것일까 의심을 했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남편을 의심하지 않았다.
무슨 수를 썼다 해도 탓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남편과 데이트 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을 누구보다 잘 즐기고 있는 사람이 바로 그녀였다.
그리고 이미 그녀는 자신의 낯선 변화를 받아 들인 상태였다.
되돌아갈 수 있다 해도 그걸 선택하지 않을 만큼 변한 자신을 마음에 들어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