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37 - #92. 아현 (1)
작곡가.
한 때는 그녀도 화려한 무대 위에 서서 노래를 부르고 싶었을 때가 있었다.
그 꿈을 이루기에는 현실이라는 벽이 너무 높았다.
'재능도 부족했지.'
그나마 과거를 후회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노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데뷔에 실패했고, 때문에 그녀는 쿨하진 않았지만 꿈을 포기할 수 있었다.
다만 꿈을 포기한 후유증이 바로 나은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생각하기에 본인의 인생 중 최고의 암흑기는 허니 엔터에서 직원으로 일할 때였다.
'해솔이를 위해 일할 수 있었다는 걸로 위안을 받긴 했지만, 그걸로는 부족하지.'
스타가 된다는 건 정말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도 그때 납득했던 것 같다.
직원으로 일하면서 스타들을 보조해주는 스태프들의 노력이 얼마나 큰지도 알게 됐다.
그리고 자신은 이런 수고와 노력을 들일만큼 대단한 사람이 되지 못한다는 것도 뼈저리게 느꼈고 말이다.
'연예인은 주아 언니나 해솔이 같은 사람이 되는 거지.'
죽었다 깨어나도 자신은 주아 언니나 해솔이처럼은 못 될 거다.
특히 주아 언니는 굉장히 리스펙하는 편이다.
아이돌로 데뷔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좌절하지 않고 회사를 나와 배우로 멋지게 성공하지 않았는가?
반면 자신은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게 없는 지라 사회로 나오는 것이 두려워 회사 직원으로 취직했었다.
‘그땐 하고 싶은 것도 없었으니까.’
정말 막막했다.
앞으로 뭘 하고 살아야 할지 몰라서 회사가 준 기회를 차마 놓을 수가 없었다.
해솔이가 아니었다면?
아마 아현은 아직도 허니엔터에서 직원으로 일하고 있었으리라.
그랬다면 다른 평범한 사람들처럼 월급을 받아서 꼬박꼬박 저축하고, 남자와 만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면서 사회에 찌들어 갔겠지.
‘그런 인생이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솔직히 지금이랑 비교하면 힘든 게 사실이잖아. 꿈도 희망도 없는 삶이니까.’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돈을 벌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을 거다.
할 줄 아는 거라곤 노래와 춤 뿐이었다.
문제는 그녀가 남을 가르칠 만큼 노래를 잘 하는 것도, 춤을 특출나게 잘 추는 것도 아니었다는 점이다.
‘살짝 돌아가긴 했어도 여전히 음악을 할 수 있어서 다행이야.’
그런 점에서 자신이 작곡가가 될 수 있었던 건 정말 큰 행운이었다.
작곡을 시작했을 때만 해도 이쪽에 재주가 있을 거란 생각조차도 하지 못했다.
'솔직히 그땐 평범했으니까.'
춤과 노래를 집중적으로 배우긴 했지만, 작곡을 아예 한 번도 안 배웠던 건 아니다.
허니 엔터에서는 연습생이 배우고 싶어 하는 것이 있으면 인색하게 굴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때 배웠을 때는 '역시 어렵네.' 하고 제대로 시작도 하기 전에 포기해버렸던 것 같다.
더욱이 작곡가는 어릴 적 꿈 후보에도 들지 않았던 직업인지라 관심도 없었다.
'그랬던 작곡이었는데...'
이젠 작곡을 하지 못하면 안 될 것 같은 삶을 살고 있다.
“진짜 잘 하네.”
“이게? 뭔가 부족한 것 같지 않아?”
작곡에 흥미를 갖고 배우기 시작했을 무렵에도 상황은 비슷했던 것 같다.
그리 특별하게 잘 한다는 생각이 안 들었다.
어렵다~ 너무 어려워!! 포기할까? 근데 이것도 안 하면 난 뭘 하고 살지? 라는 생각을 수 백번은 했을 거다.
작곡이 아니면 안 되는 상황이었기에 어려워도 무작정 작곡을 부여잡고 살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달라졌지.’
마냥 어렵던 작곡이 쉬워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기계 조작에 익숙해져서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사실 그게 아니라 그녀의 남자친구 진해솔.
그와 함께 작곡을 했던 경험이 현재 그녀를 만든 원동력이 되어 준 거다.
불쑥 나타나 대수롭지 않게 들려주는 음악들.
전혀 생각해보지 못했던 특별한 멜로디들이 들려올 때마다 역시 해솔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곤 했다.
'나는 언제쯤 이런 음악을 만들 수 있을까. 아니, 가능하긴 한가?'
만들고 싶은 음악 영감은 꾸준히 떠오르고 있긴 하다.
그런데 정작 그녀는 떠오르는 영감들을 따라가는 것조차도 벅찼다.
문제는 그녀가 생각해낸 영감들이 해솔이의 음악에 비하면 부족한 점이 많다는 것이다.
그때부터 유학에 대한 생각을 구체적으로 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유학 가보고 싶다.’ 라는 생각에서 ‘유학 한 번 가볼까?’ 라는 생각으로 말이다.
하지만 그 나라 언어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그녀가 유학을 가고 싶어 한들 쉽게 가능할 리가 없었다.
유학을 가기 전까지 많은 준비가 필요했다.
그 과정을 도와준 것은 의외로 그녀의 남자친구였다.
겁이 많아 포기하려는 그녀에게 용기를 주고 계속해서 유학을 권해줬다.
덕분에 용기내서 준비할 수 있었다.
“드디어 간다!!! 유학!”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통해 유학 준비를 끝냈다.
해솔이의 특별함을 알릴 수 없는 가족 이외의 사람들에게는 굳이 유학을 간다는 말을 해두지는 않았다.
그 나라에는 오로지 배움을 위해 가는 것.
그 외의 생활은 이곳으로 이동해서 할 생각이었기에 혹여나 마주쳤을 때 문제를 만들지 않기 위한 방법이었다.
“나처럼 호사스러운 유학을 다니는 사람은 없을 거야. 정말 고마워, 해솔아. 네가 아니었으면 엄두도 못 냈을 거야.”
아현의 평소 성격상 혼자서 타지에 나가 살아갈 자신이 없어서 유학은 상상으로 그쳤을 터.
솔직히 유학을 준비하는 내내 갈대처럼 마음이 자꾸 바뀌어서 곤욕을 치러야 했다.
유학을 가는 것이 자신에게 훨씬 도움이 되는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한편으로는 이 정도면 되지 않았나 하는 안일한 생각이 드는 것이다.
지금 만들고 있는 곡들도 못 사서 안달이 난 사람들로 가득하다.
안주하려 했다면 충분히 가능한 상황.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현은 해솔이의 용기에 힘입어 좀 더 성장하기 위한 선택을 했다.
“이럴 게 아니라 나갈 땐 같이 가자.”
“같이 가자고? 배웅해주겠다는 거야?”
“아니, 네가 유학할 때 살 집까지 같이 가겠다는 거야. 혼자서 적응하려면 힘들 거 아냐. 같이 가서 며칠 지내면서 도와줄게.”
“헉! 진짜? 보통 한 번은 괜찮다고 할 텐데, 솔직히 많이 무섭긴 했거든. 고마워엉. 히잉….”
“우리 겁쟁이 토끼를 어떻게 혼자 보내? 결심한 것 만도 대견하고 기특한 건데 이 정도는 해줘야지. 사실 이렇게 해야 마음이 놓일 것 같기도 하고 말이야.”
이렇게 든든한 남자가 자신의 애인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애인의 달콤함에 흐물흐물하게 녹아내린 아현이 그의 품 안에서 온갖 애교를 부렸다.
남들 시선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말이다!
“너 없으면 나 어떻게 살았을까?”
“안 되지. 그런 상상은 왜 해? 일어날 일 없는 상황인데.”
"히히히! 사랑해, 자기야~!"
"나도 사랑하지."
한 쌍의 커퀴벌레가 되어 한참동안 서로에게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해솔이의 따듯한 품속에 안겨 있으면 평생 살라고 해도 기꺼이 그러겠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런 안온한 공간을 유학 때문에 포기한다?
절대 못할 일이다.
그런데 그녀의 유능한 애인은 유학을 가서도 얼마든지 이 품에 안겨 있을 수 있는 방법을 만들어줬다.
“이렇게까지 판을 다 깔아줬는데 못하면 바보겠지? 나 잘 하고 올게.”
“그럼~ 당연히 잘 할 수 있을 거야. 괜히 주눅 들지 말고, 당차게! 알지?”
“응! 나 열심히 할게.”
그래서 네가 부르고 싶어 할 정도로 대단한 곡을 쓸 것이다.
'이럴 땐 얘가 작곡을 안 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긴 하는데...'
그가 작곡을 한다는 것이 좋을 때가 있고, 싫을 때가 있다.
작곡이라는 주제로 그와 대화를 나누면 서로를 어렵지 않게 공감할 수 있다는 점에서 좋았고, 그의 뛰어난 재능을 보며 자꾸만 질투심이 몰려온다는 점이 싫었다.
자신에게 한없이 잘 해주는 남자 친구를 생각하면 자신의 쪼잔한 미운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아현은 자신이 남자 친구의 재능을 부러워하는 것이 좋지 않은 일이라는 걸 분명히 자각하고 있었다.
남자 친구가 그녀의 질투심을 알면서도 크게 개의치 않아 해서 다행이었다.
그는 오히려 자신을 질투하는 그녀를 달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유학 가서 제대로 배우기 시작하면 이런 생각도 쏙 들어가겠지.'
그렇기에 이번 유학이 그녀에게 중요한 거다.
올바르게 발전할 수 있는 기회는 자주 오지 않으니 말이다.
“내가 진짜 복 받은 년이야. 전생에 나라를 구한 게 틀림없어. 그러니까 널 만날 수 있었던 거지.”
아현이의 거침없는 말에 남자 친구가 웃었다.
그녀 입장에서는 진심을 담아 한 말이었는데 말이다.
“내가 그렇게 좋아?”
“응. 네가 없었으면 난 계속 회사에 다니면서 살았을 거야. 작곡 해볼 생각도 못하고 만약 했다고 해도 단숨에 이렇게 좋은 곡을 만들지도 못했겠지. 곡을 팔아서 작곡가로 자리를 잡을 때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했을지 상상이 안 가.”
해솔이가 보여주는 음악들은 그녀에게 엄청난 도움이 되어주었다.
작곡을 하기 위해서 다른 노래를 들어보는 것만큼 도움이 되는 공부가 따로 없었다.
특히 이 곡을 만든 해솔이가 그녀에게 어떤 생각으로 이 곡을 만들었는지 직접 풀어 얘기를 해주기까지 하니 실력 향상에 도움이 안 될 수가 없는 거다.
“그렇게 서방님이 좋으시면 애교 좀 부려보시지요? 그리고 유학 가서 공부해야 한다고 바쁘다면서 나 소홀하게 대하면 삐질 거야.”
“내가 어떻게 너한테 소홀할 수 있겠어? 그건 불가능한 일이야.”
“지금은 이래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하면 자꾸 욕심이 나서 나는 뒷전이 될 수도 있잖아.”
“난 외로움을 많이 타서 절대 그렇게 못해.”
애초에 학창시절 책과 거리가 먼 생활을 하던 그녀이다.
공부에 정신이 팔려서 남자 친구를 멀리한다?
그게 아무리 음악 공부라 해도 상상이 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나 목표가 하나 생겼거든.”
“목표?”
“열심히 공부해서 너한테 곡을 써주는 거야. 그걸로 네가 멋지게 활동했으면 좋겠어.”
“이미 나한테 곡 써준 게 있잖아. 난 그 곡도 좋았는데?”
“아니야! 그런 곡들로는 만족 못해! 오로지 너만 생각해서 만든, 너한테 잘 어울려서 이 세상에서 부를 사람이 너밖에 없을 정도의 곡을 만들 거야. 그래서 이 곡을 꼭 부르고 싶다고 나한테 부탁할 수준이어야 해.”
지금은 모두에게 비웃음 당할 지도 모르는 꿈이다.
에어플레인이라는 그룹에서 떼어놓고 진해솔 한 사람의 가치만 봐도 그녀가 비비기엔 너무 차이가 심하게 많이 났다.
그래놓고 여자 친구라는 지위를 이용해서 곡을 선물해주겠다니!
그에게 자신의 곡이 불리길 바라는 수많은 작곡가들에게 욕을 쳐 먹을 일이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내 목표라는데!’
음악을 하는데 들어가는 돈 이외에 씀씀이가 크지 않은지라 지금부터 돈을 벌지 않아도 먹고 사는데 문제가 없을 정도로 벌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음악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목표가 있기 때문이었다.
“진짜 그게 목표야?”
“응.”
“나 좀 감동 받으려고 하는데.”
“아직 감동 받지 마. 내가 제대로 된 곡을 만들어주면 그때 감동 받아. 물론 그 곡이 마음에 들었을 때 말이야.”
남자 친구가 벌써 곡을 받은 것처럼 호들갑을 떨며 기뻐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얼굴이 화끈거렸다.
아직 만족할 만한 곡을 만들어낸 것도 아닌데 말이다.
‘진짜 열심히 해야지.’
반드시 열심히 공부해야 할 이유가 생겼다.
애인이 저렇게 감동 받아서 기뻐하는데, 형편없는 노래를 만들어줄 순 없다.
그녀는 넘쳐 나는 의욕에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며 유학을 떠날 준비를 끝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