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39 - #92. 아현 (3)
-아, 안녕하세요.
-안녕.
X-Monster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는 중인 유명 작곡가 로잘린.
빌보드를 씹어 먹는 작곡가였기에 아현이는 자신의 눈앞에 서 있는 여자가 엑몬 작곡가라는 사실이 믿을 수가 없었다.
“너, 너 설마 작곡가님이랑도…?”
“아니야.”
-뭐라고 하는 거야?
-눈앞에 있는 사람이 누나라서 안 믿기나 봐.
-흥, 자기가 만든 곡이랑 전혀 다른 녀석이네.
-아앗! 제 곡 들어보셨어요??
-그래. 그랬으니까 시간을 낸 거지. 네 음악에 흥미가 있으니까.
-로잘린은 아무리 내가 부탁해도 네 음악이 안 좋았으면 안 만났을 거야.
해솔이의 말에 아현의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다.
엑스 몬스터 작곡가님이 내 음악에 관심이 생겼다?
그보다 영광스러운 일이 어디 있을까!
-감사합니다!!!!
고개를 팍 숙여서 감사 인사를 넙죽했다.
-얘가 정말 그런 음악을 만들었다는 게 믿어지질 않네. 노래는 그렇게 도도하면서 왜 이렇게 싸게 굴어?
-헤헤헤. 그래도 엑스 몬스터 작곡가님이시잖아요.
-난 여자 애교 싫어해. 그리고 로잘린이라고 불러.
-네!! 로잘린님!
-님은 무슨. 너네 나라 말에 그 뭐였지? 누나? 그걸로 불러.
-누나는 남자가 여자를 부를 때 쓰는 말이고, 아현이처럼 여자인 경우에는 언니라고 부르는 거야.
-언니? 어감이 나쁘지 않네. 그걸로 불러!
-정말 그래도 되나요?
-된다니까? 빨리 불러봐.
-어, 언니이...
-좋네! 맘에 들어.
로잘린을 언니라고 부를 수 있는 특혜를 얻은 아현은 헤실헤실 웃었다.
로잘린은 아현을 가르쳐야 하는 사람으로 보기보단 같은 직종에서 일하는 작곡가로 서로를 대하기를 바랐다.
-나 존경하고 팬이고 어쩌고 하는 거 지겨우니까 그만해. 너 말고도 어딜 가든 다 그 소리를 하거든. 그리고 난 제자 키울 생각없어.
-네! 그럴게요!
-그리고 야, 진해솔. 맛있는 거는? 네가 산다고 했잖아.
-당연히 사줘야지. 어디 좋은 곳 알아?
-가격은 상관없어?
-설마 나한테 가격 따지는 거야?
-칫! 재수없는 새끼. 좋아, 오늘 네 지갑 제대로 뜯어먹어주마.
로잘린이 그녀의 팔짱을 서슴없이 끼고 이동했다.
아현은 지금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알 수가 없어 연신 눈을 비벼야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지금 이 순간이 현실이라는 것도, 그리고 다신 오지 않을 1분 1초가 중요한 순간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아현은 해솔이가 준 기회를 허투루 날릴 수 없다는 생각에 입을 열었다.
-해솔이랑은 어떻게 아시게 된 거에요?
-내가 얘네 곡 써준 적 있거든. 그리고 제키랑 친구임.
-아! 제키씨랑요? 저도 제키씨는 뵌 적 있어요. 해솔이랑 같은 그룹이기도 하고 작곡 쪽으로 교류를 하곤 하거든요.
-제키 걔가 음악에 미친 놈이긴 하지.
로잘린과 뜻밖의 공통점을 통해 운을 떼면서 긴장감을 털어낸 아현이 묻고 싶었던 걸 물었다.
-언니 같이 대단한 작곡가는 자주 이런 부탁을 받죠? 자기 곡 좀 봐달라는.
-아무래도 그렇지. 옛날에는.
-옛날에는요? 그럼 요즘은 안 해주시는 거에요?
-어. 내가 왜 해줘야 하냐? 그런 거 해준들 그쪽에서 듣고 싶지 않아하는데.
-언니가 해주는 조언이 얼마나 귀한데요! 말도 안 돼요.
로잘린은 뭘 모른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너 같이 생각하는 애가 얼마 안 돼. 아니, 정확히 말하면 바뀌는 거지. 절대 기분 안 나쁘다고 조언을 꼭 듣고 싶다고 한 사람도 정작 들으면 기분 나빠서 욕하거든. 말을 그렇게까지 심하게 할 필요는 없지 않았냐면서. 그 정도 각오도 안 된 주제에 나한테 뭘 듣겠다는 건지, 쯧!
로잘린의 거침없는 발언에 긴장이 된 그녀가 침을 꼴깍꼴깍 삼켜댔다.
그녀에게 자신의 곡을 들려주면 상상 이상으로 거친 욕이 튀어나올 거라는 직감이 들었던 것이다.
‘나도 버틸 수 있을까?’
그녀도 다른 사람이 그랬듯이 버티지 못하고 로잘린을 원망하게 될 지도 모른다.
평소 본인의 모습을 이성적으로 따져보면 멘탈이 강한 편이 아니기 때문이다.
-너는 걱정하지 마. 네 애인이 네 멘탈 안 좋다고 좀 순하게 말해달라고 뇌물을 줬거든.
-해솔이가요?!
아현이 무슨 걱정을 하는지 안다는 듯 로잘린이 뒷말을 덧붙였다.
-어찌나 애지중지 걱정을 하던지. 내가 싫다고 하니까 거절도 못할 선물을 억지로 떠넘겼어.
-해솔아….
-얘는 누나처럼 강철 멘탈이 아니라서 어쩔 수 없었어. 딱 봐도 감이 오잖아.
-그러게. 토끼처럼 순딩이야. 눈도 축 쳐져서 독한 말을 하면 꽥 하고 기절해버릴 것 같잖아. 나도 사람이라 이런 얼굴 앞에서 독한 말 못한다고.
-으아아! 아니! 전 정말 괜찮은데요!
-그럼 순화 안 시키고 말해줘?
-아잇, 누나!
-알았어. 인마. 안 해. 나 담배 좀 피고 들어갈 테니까 먼저 들어가 있어.
가게 앞에 도착해 담배를 피우고 들어가겠다는 로잘린을 뒤로하고 해솔이와 함께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여기 비싸보인다.”
“비싼 만큼 맛있다니까.”
“근데 나 물어봐도 돼? 로잘린 언니한테 준 뇌물이 뭔지.”
“별 거 아니야.”
“언니가 쉽게 움직일 사람은 아닌 것 같던데? 그리고 나 정말 깜짝 놀랐어. 소개 시켜준다는 사람이 로잘린 언니였으면 진작 말을 해줬어야지! 나 별 생각없이 너 따라 왔다가 심장 떨어질 뻔 했잖아.”
“덕분에 뿌듯하긴 했어. 기왕 서프라이즈 선물이면 깜짝 놀라줘야 제 맛 아니야?”
해솔이가 소개시켜준 인맥은 앞으로 작곡가로 활동하면 큰 힘이 되어 줄 것이다.
그렇기에 그에게 감사 인사를 안 할 수가 없었다.
“근데 로잘린 언니를 소개시켜 준 거, 앞으로 해외에서 활동하라는 의미로 소개 시켜준 거야? 내가 정말 그럴 수 있을 것 같아?”
“못할 게 뭐가 있는데. 네가 뭐가 부족해서. 아니지, 네가 부족한 건 딱 하나야. 인지도. 네 곡을 정당하게 평가 받는다면 금방 이 바닥에서도 적응할 수 있을 거야. 그리고 네 음악이 점점 아이돌 쪽 장르가 아니라 팝 스타일 쪽으로 바뀌고 있는 건 알고 있지?”
생계를 위해 음악을 하는 게 아니라 만들고 싶은 음악을 만드는 현재의 상황에서 그녀의 작곡 장르가 점점 팝 쪽으로 향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가 생각해도 자신이 선호하는 장르가 팝이긴 했으니 말이다.
“여기서 바뀐 내 음악을 인정받으면 예전 음악을 바라던 사람들도 달라지겠지?
“할 수 있을 거야. 충분히 그럴 능력이 있어.”
언제나 그랬지만, 그가 해주는 응원은 그녀에게 큰힘이 되어준다.
담배를 피고 들어 온 로잘린이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얼마 후 시켰던 음식이 나오고, 로잘린과는 식사하는 동안 빌보드 작곡가로 사는 삶에 대한 주제로 대화를 나눴다.
-와~ 웬만한 스타들이랑은 거의 다 작업을 해보셨네요.
-걔네들 진짜 피곤해. 마냥 좋은 게 아니야. 노래를 잘 부른다고 해서 음악에 대해 잘 아는 건 아니거든. 근데 인기가 음악에 대한 지식을 늘려주는 것도 아닌데 자기가 음악에 대해 잘 아는 줄 알아. 고집이 세서 아니라는데도 꾸역꾸역 자기 자존심을 세우려고 하지.
-그럴 땐 어떻게 하세요?
-나랑 일하고 싶지 않으면 꺼지라고 욕을 먹여주지. 네가 인기가 많다고 해서 나보다 음악을 잘 아는 게 아니라는 것도 친절하게 설명해주고.
아현은 여기서 로잘린이 말하는 ‘친절하게’ 라는 단어가 결코 단어 그대로의 일은 아닐 것이라 장담할 수 있을 것 같다.
절대 쉽게 보이지 않은 인상에 걸걸한 목소리와 태도로 걸죽한 욕설을 내뱉으면 아무리 스타라고 해도 정신이 번쩍 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고 나면 반응은 두 가지로 나뉘지. 징징 울면서 회사에 이르고 계약을 파기하거나 잘못했다고 숙이고 들어와서 얌전히 내 말 듣고 녹음을 하거나.
-와…대단하세요.
잘 나가는 스타들이 안하무인으로 나오는 것을 찍소리도 못하게 찍어 눌렀기에 로잘린이 지금의 자리에 있을 수 있게 된 걸 거다.
-원래 유명해지면 똥을 싸도 금칠을 해주거든. 나는 그럴 명성과 실력을 갖췄으니 그런 새끼들한테 설설 길 이유가 없는 거야.
-그래도 팬들이 많은데 걱정 되진 않으셨어요?
-내가 왜 걱정을 해? 내 노래가 좋아서 부르고 싶다고 빈 건 그쪽인데.
로잘린과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자신이 얼마나 나약한 마음으로 작곡을 하고 있었는지 깨닫게 됐다.
그리고 제대로 된 작곡가가 되기 위해서는 로잘린의 태도를 본받을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얘가 들려준 노래 말고 그동안 더 쓴 곡 있어?
어느 정도 밥을 다 먹었을 무렵.
로잘린이 드디어 그녀에게 음악을 들려달라는 요청을 했다.
그녀와 만났을 때부터 고대하고 있던 일인지라 심장이 터질 것 같이 두근거렸다.
-가져 오긴 했는데….
-뭐야, 자신 없어?
-아, 아니요! 자신 있어요. 제 음악, 마음에 드실 거에요.
내 음악을 자신 없어 한다면 누가 그녀의 음악을 좋아해줄까?
오늘 로잘린을 보며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을 곧바로 실천했다.
물론 지금 내보인 자신감은 진심보다는 연기에 가까웠지만, 계속 바뀌려고 노력한다면 로잘린처럼 멋진 작곡가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행히도 로잘린은 그녀가 내뱉은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씨익 멋진 미소를 지어보였다.
-오늘 봤던 태도 중에 제일 마음에 드네. 작곡가라면 당연히 그래야지. 근데 자만이랑 자신감은 다른 거다? 오늘 마음 독하게 먹는 게 좋을 거야. 쟤가 살살해달라고 했어도 충격을 안 받을 순 없을 거거든.
로잘린의 경고에 아현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드려요! 정말 열심히 만든 곡이니까, 제대로 평가해주세요!
-일단 자리 옮기자. 이런 시끄러운 곳에서 들어봤자 방해만 되니까.
로잘린의 말에 따라 해솔과 그녀는 작업실로 이동했다.
무려 로잘린의 작업실이다.
도착하자마자 아현은 화려한 기계들의 향연에 넋을 놓고 구경을 해야 했다.
-우와아아. 미쳤다. 이거 진짜진짜 비싸서 살 엄두도 못 내던 장비인데….
-너도 장비에 관심이 많구나?
-당연하죠! 마음 같아서는 여기 있는 장비들 고스란히 제 작업실로 옮겨가고 싶을 지경이에요!
-아하하! 장비가 아무리 좋아도 본인 실력이 부족하면 쓸모없을 텐데.
-그건 제 곡을 들어주시고 확인해주세요. 제가 이런 수준의 장비를 가져도 될 정도인지.
말을 하면서 어색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지만, 그래도 직접 입으로 말한 게 효과가 있었는지 음악을 들려 줄 생각에 쿵쾅쿵쾅 뛰던 심장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너무 빨리 리스펙 하는 거 아니야?”
해솔이가 옆에서 그녀의 귓가에 속닥인다.
킥킥 웃은 아현이 자신의 클라우드로 들어가 완성곡을 넣어 둔 폴더를 열어줬다.
-여기에 있는 곡들이 제가 가장 최근에 작곡했던 곡들이에요. 아직 완성하지 못한 부분도 있지만요.
-좋아. 진지하게 들을 거니까, 다들 쉿!
로잘린이 헤드폰을 쓰고 본격적으로 감상을 시작했다.
진지하게 들을 거라는 말이 사실이었는지 눈까지 감으며 온 신경을 귀에 집중시켰다.
까득, 까득, 까득, 까득.
“에헤이.”
“어?”
“손톱 깨물고 있잖아.”
“어어. 미안.”
차분하게 가라앉았던 심장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뛰고 있었다.
그뿐인가?
다리는 덜덜덜 떨고 있고, 초조해져서 자꾸만 이가 갈렸다.
그녀가 이성을 잃고 덜덜 떨고 있는데 로잘린은 신경도 쓰지 않고 다음 곡으로 넘어갔다.
로잘린의 표정을 아무리 읽어보려고 해도 무표정한 그녀를 읽기는 쉽지 않았다.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것은 해솔이의 손을 꽉 잡는 것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