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40 - #92. 아현 (4)
-흐음.
꿀꺽!
로잘린의 얼굴을 뚫어버릴 듯이 쳐다보는 아현.
-내 얼굴이 취향이야? 너무 쳐다보잖아.
-아하하, 저 현기증나서 기절 할 것 같아요. 제발요~
-내가 네 음악을 쓰레기라고 욕하면 네 음악이 쓰레기가 되는 거냐? 내 말이 진리인 건 아니야.
장난기가 돌았는지 로잘린이 괜한 소리를 해온다.
그녀가 해준 말이 진리가 아니라면 뭐란 말인가!
그녀 정도 되는 사람이 하는 말이라면 쓰디 쓴 독설이라도 겸허하게 받아들여야만 한다.
-아아아!!!
발을 동동 구르며 선뜻 입을 열어주지 않는 로잘린의 행동에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니 그녀가 그제야 만족한 웃음과 함께 입을 열었다.
-네 음악이 완성 되어 가고 있다는 게 느껴졌어. 다만 보통 사람들과 달리 성장하는 과정이 너무 빨라서 혼란이 생긴 거야.
-성장이요…?
-그래. 솔직히 부럽네. 네가 하고 있는 음악에 확신이 들지 않는 건 당연한 거야.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고 있으니까. 지금 네가 할 일은 기초를 튼튼하게 다지는 거야. 추천을 해주자면 최대한 다양한 음악을 접해보고 공부하는 거지. 네가 공부하겠다고 유학을 선택한 건 개인적으로 최고의 선택이었다고 봐.
혹평이 들려올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녀의 입에서 나온 건 혹평이 아닌 응원이었다.
너무 감동적이어서 순간 감정이 북받쳤다.
욕 먹을 각오를 잔뜩 하고 있었는데 칭찬을 해주는 건 반칙이지 않은가?
-아잇! 왜 우는 거야! 나 말 심하게 안 했잖아! 난 억울해!
-아이고~ 결국 누나가 아현이를 울리는 구나.
해솔이가 옆에서 약을 올리기 시작했다.
깐죽댈 때는 정말 한 대 패고 싶다.
그랬다간 난리가 나니 절대 할 수 없는 일이지만 말이다.
-안 우러! 흐엉엉!
-아이구~ 갑자기 어디서 물개가 나타난 거야. 으하하! 귀여워.
결국 해솔이의 품에 안겨서 펑펑 울어버리고서야 눈물을 그칠 수 있었다.
그가 건네 준 휴지로 훌쩍훌쩍 코를 풀어내고 간신히 숨을 가라앉혔다.
로잘린은 여유롭게 다리를 꼬고 팔짱을 낀 채로 우리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죄송해요. 형편없다고 들었으면 이렇게 안 울었을 것 같은데, 오히려 잘 하고 있다는 말을 들으니까 참을 수가 없더라고요.
-마음고생이 많았나보네. 자기 음악에 확신이 없는 것만큼 슬럼프에 빠지기 쉬운 일이 없지.
-언니도 슬럼프에 빠져보신 적 있어요?
-있지.
로잘린의 쿨한 고백에 아현은 깜짝 놀라서 물었다.
-슬럼프였을 때 어떻게 빠져나오셨어요?
-가장 쉬운 방법은 연애하는 거지. 남자랑 섹스하다 보면 영감이 안 떠오를 수가 없거든. 짜릿하잖아.
-!!
엄청난 발언에 아현의 입이 떡 벌어졌다.
-너는 남친이 항상 옆에 있어서 슬럼프 탈출로 쓰기엔 자극이 부족하긴 하겠다.
-누나, 그건 아니지. 내가 섹…읍!
-아하하하!! 슬럼프는 새로운 자극으로 해소한다! 정도로 새겨들을게요!
이상한 말을 하려고 하는 해솔이의 입을 막아내고 수습을 했다.
-내가 칭찬을 했다고 해서 지금 네 음악이 엄청 잘 만들고 그랬다는 건 아니야. 그 정도는 이해했겠지?
-알죠. 부족한 점이 많을 거라고 생각해요.
-네 음악에 대한 자신감을 갖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의식 과잉만큼 꼴 보기 싫은 것도 없는 법이거든. 지금 네가 만든 음악을 솔직하게 평가하면 굉장히 번잡스러워. 이게 좋으니까 조금 떼어 붙여놓고 여기도 좋으니까 떼어서 붙여서 대충 슥슥슥 버무린 음악이야.
-!!
어쩜 이렇게 정곡을 찔러오는지!
그녀가 요즘 만든 곡은 자신이 좋아하는 멜로디를 붙여서 섞어놓은 것이 맞았다.
좋은 거 + 좋은 거는 더 좋은 거! 라는 간단한 공식으로 작곡이 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노래는 마냥 좋은 걸 때려 박는다고 해서 좋은 곡이 되는 게 아니다.
-물론 지금 좋은 거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게 나쁘다는 건 아니야. 다만 나쁘다는 생각에 완전히 그 부분을 뚝 떼어버리는 건 곤란해. 앞으로 네가 만들 곡들이 한정 되어버릴 테니까.
-아~! 그건 생각 못하고 있었어요.
-좋은 걸 받아들였으면 그만큼 나쁜 것도 써 버릇 해봐. 솔직히 음악에 좋고 나쁜 게 어딨냐? 그 음을 쓰는 것들이 쓰레기를 만들어놔서 문제인 거지.
구구절절 옳은 말이었다.
자신의 귀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멀리했던 것들이 후회 됐다.
로잘린의 조언은 그 이후로도 끝나지 않았다.
구체적인 설명들이 이어지자 아현은 메모를 적기도 하면서 열정적으로 로잘린의 말을 새겨들었다.
-시발, 제자 안 키운다고 했는데 뭔 지랄을 하고 있었던 거람.
뒤늦게 정신을 차린 로잘린이 현타 맞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지 말고 꾸준히 좀 봐줘. 아현이 귀엽잖아.
-뭔 말도 안 되는!! 아니에요. 언니, 얘가 한 말은 신경 쓰지 마세요.
-쓰읍, 한 달에 한 번 여기로 만든 곡 보내. 내가 바라는 수준에 도달하면 나쁘지 않은 곳에 연결해줄 테니까.
-헉! 안 그러셔도 되는데….
-진짜 필요없어?
-감사합니다!!! 열심히 할게요!
흔치 않은 기회였기에 염치 불구하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렇게 꿈만 같았던 로잘린 언니와의 만남이 끝나고.
아현은 벅찬 가슴을 부여잡고 아직도 가시지 않은 흥분에 해솔이에게 정신없이 재잘댔다.
“나 앞으로 더 열심히 공부할 거야!”
“그래그래.”
“솔직히 지금도 꿈 꾸는 것 같아. 엑몬 작곡가님을 내가 언니라고 부르게 되다니!”
“로잘린 누나가 곡은 기가 막히게 잘 만들긴 하지.”
“나 정말 이대로 쭉쭉 성장해서 빌보드 작곡가 되면 어쩌지? 꺄악!! 상상만 해도 행복해!!”
“목표를 정했으면 이뤄야지. 내가 보기에 얼마 안 남았어. 공부 열심히 하고 있잖아.”
“으으으으!!!! 이거 친구들한테 말하면 안 믿겠지?”
“믿지 못하는 것도 있지만, 말해도 되겠어?”
해솔이의 말에 그녀의 호들갑이 멈췄다.
유학 와서 새로 사귄 친구들에게 엑몬 작곡가와 만났다는 말을 한다면 어떻게 될까?
“글쎄…말해도 괜찮을지 모르겠네. 일단 걔네들이 안 믿을 것 같아. 어쩌다가 알게 된 사이인지 설명하는 것도 어렵고.”
해솔이의 여자 친구라서 소개를 받았다고 말을 한다면?
가뜩이나 현역에서 작곡가로 일하고 있는 동양인 학생이라는 것 때문에 그쪽 아이들 사이에서 주목을 받고 있는데, 엑몬 작곡가와 인맥이 있다는 얘기까지 나오면 장난 아니게 시달릴 것 같았다.
“그럼 얘기 하지 않는 게 낫겟네.”
“응. 그래야겠어.”
그때는 미처 몰랐다.
우리만 얘기 안하면 될 줄 알았지.
그런데 이번 만남을 사람들에게 먼저 말한 건 생각하지도 못한 로잘린 언니였다.
# X_Monster ????
(사진)
친한 동생들과.
SNS에 해솔이와 아현 그리고 로잘린 세 사람이 함께 찍은 사진을 올려버린 것이다.
보통 SNS에 사진을 올릴 때는 함께 찍은 사람에게 올려도 되는지 의향을 묻고는 할 텐데….
어?
“아니, 이 누나가 진짜…. 이런 건 올릴 때 얘기를 해줬어야지.”
해솔이도 그녀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화를 내면서 로잘린 언니에게 연락을 넣으려고 했다.
그녀는 해솔이의 손목을 잡아서 그 행동을 막았다.
당시를 떠올려보니 생각나는 게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야. 언니 말했었어. 사진 찍은 거 올려도 되냐고.”
“했었다고?”
“응. 내가 별 생각 없이 네! 라고 대답했던 것 같아. 그때 너무 정신이 없어서 정확히 기억은 안 나는데 물어봤던 건 확실히 기억 나.”
“아…그럼 그 누나는 허락을 받은 줄 알고 올렸던 거겠네. 이러면 우리 쪽에서 할 말이 없어지는데.”
“응. 미안해….”
“나는 상관없어. 어차피 그 누나랑은 친분 있는 거 알려진 사실이니까. 지금 내가 걱정하는 건 너야.”
“나도 괜찮아. 내가 저지른 일이기도 하고, 설마 걔네들이 로잘린 언니 SNS를 챙겨 보겠어? 내가 얘기 꺼내지만 않으면 괜찮아질 거야.”
자신이 저지른 일이니 책임도 그녀가 지겠다고.
그러니 걱정하지 말라고 호언장담 해버렸다.
엑몬 작곡가가 이 바닥에서 얼마나 유명한 사람인지 알았지만, 그 여파가 얼마나 대단할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그녀가 이겨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후폭풍은 생각보다 세게 들이닥쳤다.
♧ ♧ ♧
“이거 너 맞지?”
“이 반지, 네가 항상 차고 다니는 거잖아.”
“…….”
로잘린 언니와 만났다는 사실이 밝혀지는데 며칠의 시간이 걸릴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만남이 있고, 다음날 그녀가 도착하자마자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들어서 그녀에게 질문을 해왔다.
핸드폰에 띄워진 건 아니나 다를까, 로잘린 언니의 SNS 사진이다.
“어…맞아.”
“세상에!”
“와우!”
“거봐, 내가 맞다고 했잖아!”
“너 정말 부럽다. 엑몬 작곡가랑 얼마나 친한 거야?”
“엄청 친하지는 않아. 저 사진 찍은 날에 처음으로 만났어. 소개 받았거든.”
“썬은? 썬이랑도 그날 처음 소개 받은 거야?”
여기서 친구들이 말하는 썬은 해솔이의 이름을 부르기 힘들어 하는 외국 팬들이 지은 네임이다.
“해솔이랑은 친구였어. 옛날부터.”
“옛날부터??? 맙소사! 왜 진작 말해주지 않았던 거야? 나 에어플레인 팬이란 말이야!”
얘네들한테 진해솔의 여자 친구라는 말을 하면 어떻게 될까?
아현은 이거야 말로 되돌릴 수 없는 엄청난 후폭풍을 만들 거란 생각이 들어 입을 꾹 다물었다.
“엑몬 작곡가님이랑 만나서 뭐했어?”
“진해솔이랑 찍은 사진 있어?”
“그분한테 네 곡 들려줘봤어?”
질문들이 쏟아진다.
그 와중에 해솔이에 대한 질문도 간간히 들어와서 더 정신이 없었다.
“그만! 제발 그만! 정신없어. 한 명씩 물어봐야 대답을 해주지!”
“앗, 미안! 너무 궁금한 게 많다보니.”
“나나나! 나 먼저! 해솔이랑 친하면 전화 통화도 가능해?”
“걔 일하고 있어서 통화는 안 돼.”
이럴 때 단호하게 쳐내야 한다.
전화 통화를 시켜달라니?
무슨 민폐란 말인가?
그녀가 이곳에서 잘 적응한다는 것을 확인하고 본래의 자리로 돌아간 남자 친구.
하지만 수시로 이곳에 들려서 잘 지내는지 확인을 하고 가는 세심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런 남자친구에게 괜한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다.
“에잉, 아쉽다. 그럼 나 싸인이라도!”
“싸인은 나중에 만나게 되면 부탁해볼게.”
“앗! 그럼 나도! 싸인!”
“알았어. 알았어.”
친구들의 싸인 요청을 능숙하게 받아 넘기고 나자 남은 화제는 로잘린 언니에 대한 것이었다.
“너무 부럽다. 나도 엑몬님한테 피드백 받아보고 싶어!”
“뭐라고 했는지 말해주면 안 돼?”
해솔이와의 전화통화를 거절했으니 이 정도는 말해줘야 서운하지 않을 것이다.
그날 있었던 일을 적당히 각색해서 친구들에게 말해주었다.
“그럼 앞으로 계속 연락하고 지내는 사이가 된 거네?”
“자주 연락을 할 수 있는 건 아니야.”
“그 정도도 대단한 거야. 그분이랑 인맥 쌓고 싶어 하는 작곡가들이 얼마나 많은데.”
“고국에서도 잘 나가는 작곡가라고 하더니 다르긴 하다.”
“솔직히 네가 작곡가로 활동 중이라는 걸 듣긴 했어도 확 와 닿지는 않았거든. 네가 워낙 티를 안냈잖아.”
친구들의 솔직한 말에 살짝 욱했다.
“괜히 위화감 들까봐 그런 거야!”
“뭐 그런 걱정을 하니? 우린 네가 잘 나가는 게 좋아.”
“맞아, 너도 결국 우리 인맥인 거잖아.”
“네가 잘 나가면 우리도 도움을 받을 수 있겠지.”
“우리가 잘 되면 반대로 너한테 도움을 줄 수도 있는 거고.”
문화가 다르다고 해서 시기와 질투가 없는 건 아니다.
그저 이번에 그녀가 사귄 친구들의 마음이 훨씬 넓고 배려심이 있는 거다.
거기다가 본인의 능력에 대한 확실한 자신감도 갖고 있고 말이다.
이런 친구들의 태도 덕부에 아현은 과거 친구들로부터 받았던 상처가 치유 되는 기분을 느꼈다.
자신이 이상한 게 아니라, 잘 나가는 걸로 시기 질투한 사람들이 잘못한 것이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