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51 - #93. 민영 (5)
하지만 현실은 항상 해솔이에게 도움을 받는 처지.
사실 그에게 보호를 받는다는 게 너무 좋아서 고칠 생각을 하지 못했었다.
허나 언제까지 그에게 의지하는 모습을 보일 수는 없지 않은가?
징징대는 여자만큼 꼴사나운 게 없는 법이다.
그런데 해솔이는 징징대는 자신을 꽤 오랫동안 봐주고 있었다.
“어떻게 생각해?”
“나야 누나가 내 아이를 가져주면 좋지.”
“정말?”
“근데 좀 걱정이 되는 부분이 있긴 해.”
“!!”
“누나가 아이를 잘 키울 수 있을까 하는 생각…?”
“나, 나도 할 수 있는데?”
해솔이의 부정적인 반응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러면서도 괜스레 자존심을 부려서 할 수 있다고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시무룩해졌다.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해솔이의 눈빛 앞에서 차마 당당하게 할 수 있다고 거짓말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누나는 누나 스스로도 잘 추스르지 못하잖아.”
“…….”
해솔이와 5일만 만나지 않아도 금단 현상에 시달리는 그녀.
그런 그녀가 과연 아이를 가졌다고 해서 멀쩡하게 지낼 수 있을 리 없다고 보는 듯했다.
사실 스스로도 그 부분에 있어서는 확신을 가질 수가 없었다.
“일주일에 한 번 이상은 꼭 이렇게 잔뜩 싸줘야 만족하면서 임신 기간을 어떻게 버티려고. 임신하면 이런 거 절대 못해. 안정기가 될 때까지. 누나는 참을 수 있겠어?”
“!!!”
섹스를 참아야 한다?
벌써부터 위기감이 치밀어 올랐다.
듣자마자 입밖으로 아니! 라는 대답을 하려다가 오기가 생겨서 입술만 삐죽 내밀고 한참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입술이 톡 튀어나왔네. 많이 서운해?”
해솔이가 서운해 하는 기색을 읽었는지 달래는 말투로 물었다.
저렇게 다정하게 물어보니 뚱해졌던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린다.
“내 상태는 나도 잘 알고 있어. 근데 정말 아이를 갖는 것도 힘들까?”
“내가 봤을 때 아직 누나는 준비가 안 된 것 같아.”
“그럼 언제쯤 가능한데?”
“음…누나가 앓고 있는 금단 증세를 고치거나 아니면 내가 계속 옆을 지켜줄 수 있는 상황이라면 되겠지.”
해솔이가 제시한 두 가지 방법.
금단 증세를 고친다?
‘싫은데….’
그럼 더 이상 해솔이의 보살핌을 받을 수 없다는 뜻이 된다.
본인의 부족함이 부끄럽긴 하지만, 그 부족함이 그에겐 안쓰러움으로 다가왔는지 다른 여자들보다 더 자주 그를 만날 수 있었다.
그런데 금단 증세가 고쳐진다면?
애초에 고칠 수 있는 건지도 확실하지도 않았고 고치고 싶은 마음도 갈대처럼 이리저리 흔들린다.
“…금단 증상을 앓는 나는 싫어?”
“그런 소리가 어딨어? 아닌 거 알면서. 누나의 지금 모습을 충분히 사랑하고 있어.”
문제는 임신에 있어서 그녀 스스로의 정신 건강에 무리가 갈 게 분명하다는 거였다.
“그러니까 임신은 좀 천천히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근데 나 딱히 피임을 하고 있지 않은 걸?”
오늘도 잔뜩 정액을 안에 넣었으니 임신 될 확률이 높을 것이다.
그녀는 기대감을 담아 자신의 배를 쓰다듬었다.
계획하지 않고 덜컥 임신을 되어버리면 어떻게든 헤쳐 나가지지 않을까 하는 무책임한 생각이 든 것이다.
그러다가 문득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다.
“예전에 내가 네 정액을 모아달라고 했었잖아. 그 방법을 쓰는 건 어떨까?”
“…정액을?”
“난 아까처럼 입으로만 받아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어.”
이렇게 좋은 생각을 왜 못했는지 모르겠다.
“…….”
해솔이도 그녀의 예상치 못한 방법에 말문이 막힌 듯 했다.
그녀는 옆으로 돌아누워서 해솔이의 가슴에 손을 얹고 말했다.
“한 번 미리 시험해보는 건 어때?”
“시험?”
“입으로만 해도 만족할 수 있다는 거. 미리 시험해보는 거야.”
거하게 섹스를 하고 난 이후인지라 많이 지쳐있었지만, 오늘은 얼싸에 질싸를 당하느라 상대적으로 정액을 많이 먹지 못한 상태였다.
여기서 적어도 세 번 정도는 더 입으로 먹어줄 수 있었다.
“우리 오늘 엄청 많이 했는데.”
“아직 3시밖에 안 됐잖아.”
그녀의 계획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신입이 준 아이디어는 야한 영화 감상으로 분위기를 잡는 걸로 끝나지 않았다.
“그럼 좀 이따가는 해줄 수 있는 거지?”
“그래. 그렇게 하자. 지금은 안 돼. 누나 목 아파서 목소리 살짝 갔잖아.”
그녀를 상대해야 하는 해솔이의 정력이 문제가 아니라 그걸 받아내야 하는 그녀의 몸이 약해서 자제를 하는 거였다.
“같이 씻을래?”
이대로 그의 품을 벗어나고 싶지 않았던 민영이 눈을 깜빡이며 애교스럽게 물었다.
해솔은 흔쾌히 그녀의 요청을 받아주고 그녀의 몸을 번쩍 들어올렸다.
“읏쌰.”
“나 무거워?”
“아니. 다이어트 너무 과하게 했어. 그런 거 안 해도 말랐는데 거기서 더 감량을 하니까 뭘 들었는지도 모르겠잖아. 역할에 집중하는 것도 좋지만 건강은 챙겨야지.”
“히히.”
해솔이가 직접 움직여서 욕조에 뜨끈뜨끈한 물을 담그고, 그곳에 그녀의 몸을 담궜다.
미처 느끼지 못했던 근육통이 느껴졌다.
그의 아래에 깔려서 잔뜩 쑤셔진 탓에 근육통을 앓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해솔이는 그녀가 인상을 찌푸린 걸 눈치 챘는지 그녀의 몸을 주물러주기 시작했다.
“하으, 좋다아.”
찰랑찰랑~
따듯한 물이 그녀의 몸을 노곤하게 만들어주고, 해솔이의 능숙한 마사지가 육체와 정신의 피로를 싹 날아가게 해주는 것이다.
이 정도면 다시 섹스를 시작해도 될 것 같았다.
해솔이의 단단한 가슴 위에 등을 기대고 앉아 물이 식을 때까지 느긋하게 시간을 즐겼다.
서로의 몸을 닦아내주면서 가볍게 몸을 애무하며 성욕의 불씨를 이어갔다.
“으응…좋다.”
가볍게 가슴을 만지면서 애무를 해주는 해솔이의 손길에 그녀가 야릇한 신음을 뱉었다.
“물 식었는데, 이제 나갈까?”
“응.”
서로의 몸에 거품을 발라주면서 야릇하게 살짝살짝 터치하다 보니 금세 성감이 치밀어 올랐다.
눈이 마주친 그녀와 해솔이는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서로를 향해 입술을 마주댔다.
♧ ♧ ♧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너 왜 이렇게 예뻐졌어.”
“흐흥. 말 안 해줄 거야.”
민영은 거울로 자신의 얼굴을 확인했다.
본인이 생각해도 피부가 아기처럼 뽀송뽀송했다.
눈은 초롱초롱하고, 입술은 새빨개서 생기가 가득했다.
“오늘 화장도 엄청 잘 먹어.”
“리즈 갱신이다. 리즈 갱신이야. 오늘 사진 좀 많이 찍자.”
매일 그녀의 얼굴을 보는 사람들인지라 예쁜 것에 어느 정도 적응을 한 상태인데, 오늘은 적응을 했음에도 감탄이 터져 나올 미모였다.
스탭들의 열렬한 반응에 배시시 웃은 민영은 마침 눈이 마주친 신입을 향해 슬그머니 미소를 지어주었다.
신입도 그녀의 눈짓의 의미를 이해했는지 수줍게 웃음을 보여주었다.
집에서의 데이트가 지루하지 않고 즐거울 수 있었던 건 분명 신입의 도움이 컸다.
그녀는 앞으로 신입의 도움을 받기 위해 적당한 보상을 주기로 했다.
“잠깐 이리로 와 봐요.”
그녀가 스탭들이 다른 일로 방심하는 사이 신입을 슬쩍 불렀다.
“넵!”
“저번에 해준 조언으로 애인이랑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어요.”
“아~! 다행입니다.”
“이건 별 건 아닌데 고마워서 드리는 선물이에요.”
“어우! 아닙니다. 제가 이런 걸 바라고 도움을 드린 건 아니라서요.”
“저도 알죠. 그래도 너무 고마워서요. 꼭 받아줬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앞으로도 잘 부탁드린다는 뇌물이기도 해요. 종종 상담을 해야 할 것 같아서요.”
“어음….”
이번 한 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앞으로도 꾸준히 좋은 아이디어를 달라는 의미로 주는 뇌물.
그 사실을 알게 된 신입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제가 말씀드렸던 게 도움이 되긴 한 모양이네요.”
“네, 정말 즐겁게 보냈어요.”
결국 섹스섹스섹스 휴식 섹스섹스섹스 휴식 이런 식이었지만, 휴식 과정이 지루하지 않았다는 게 중요한 거다.
신입의 아이디어는 해솔이의 성욕을 계속 유지시키면서 끈적끈적한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큰 몫을 했다.
신입은 이걸 받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는 눈치였다.
민영은 신입의 고뇌를 끝내주기 위해 말했다.
“지금 열어봐도 괜찮아요.”
“제가 이런 걸 받아도 되는 건지….”
“괜찮으니까 어서요.”
아마 안에 든 걸 보면 차마 거절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그녀의 짐작은 맞아 떨어졌다.
“헉! 이, 이거 비싸지 않아요?”
“전혀요. 비싼 거 아니에요.”
그녀가 버는 돈에 비하면 별 거 아닌 게 사실이다.
신입의 얼굴에 생긴 탐욕을 민영이 흐뭇하게 바라봤다.
“어…그럼 다음에 필요하시면 말씀해주세요.”
“역시! 고마워요. 잘 부탁해요.”
신입을 무사히 확보하는데 성공한 민영은 살짝 도톰하게 부어 있는 붉은 입술을 혀로 핥았다.
그 모습이 그녀가 연기하는 캐릭터를 연상시켰다.
신입은 적응 되지 않는 위험한 매력에 넋을 놓고 그녀를 바라봤다.
사람의 혼을 쏙 빼놓는, 그야말로 악역의 위험한 매력이었다.
신입의 볼에 홍조가 피어올랐다.
짝짝짝짝짝짝!!
“이야~ 연기에 물이 올랐다. 물이 올랐어.”
그녀의 매혹적인 매력은 카메라 앞에서도 사라지지 않았다.
연기를 끝내자 스태프들 사이에서 이례적으로 박수 세례가 쏟아졌다.
“감사합니다. 피디님.”
“민영씨는 어쩜 이렇게 연기를 잘 하나 몰라. 잘 봤어요. 마음에 쏙 들어. 아니, 내가 예상한 그림보다 훨씬 좋았어.”
예쁜데 연기도 잘 한다.
그녀 입장에선 최고의 칭찬이었기에 수줍게 웃음이 나왔다.
“민영씨가 이래봬도 극단에서 오랫동안 연기 했잖아요. 근본이 있으니까 연기를 잘 할 수밖에 없는 거죠.”
호들갑을 떠는 감독 옆에서 스탭이 한 술 더 떴다.
오늘 악역 연기는 자신이 생각해도 제법 잘했다 싶었기에 그녀는 겸손하기보단 칭찬을 겸허하게 받아들였다.
피디는 그녀에게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우리끼리만 있어서 하는 소린데, 주인공이 너무 약해서 어쩌나 싶어요. 민영씨가 캐릭터를 너무 잘 잡아서 상대적으로 주인공이 너무 임펙트가 없어졌거든.”
“설마 저보고 연기를 좀 약하게 해달라고 하시는 건 아니죠?”
“하하하! 그럴 리가요. 그런 디렉팅을 할 거면 이 자리에 있을 자격이 없는 거죠.”
멀쩡하게 연기 잘 하는 악역을 닦달할 게 아니라 주인공을 연기하는 연기자에게 디렉팅을 해서 연기를 잘 하게 만들어야 하는 게 맞는 거다.
말은 저렇게 해도 그녀에게 은근하게 부탁을 해온 게 맞다.
쉬운 길을 마다하긴 싫었을 것이다.
아니면 주인공으로 캐스팅 된 배우의 연기력이 도저히 손을 쓸 수준이 안 되거나.
‘후자면 내가 굳이 양보할 이유가 없잖아.’
처음 이 드라마에 캐스팅 됐을 때, 민영에게 섭외가 들어 온 역할은 악역이 아니라 주인공이었다.
하지만 주인공은 뻔한 캔디형 캐릭터인 반면에 악역은 작가가 오히려 이 캐릭터를 주인공 삼지 않은 것이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톡톡 튀는 매력을 갖고 있었다.
그렇기에 주인공이 아닌 악역을 선택해서 캐스팅을 했다.
‘거기다가 이번에 맡은 캐릭터가 유난히 나랑 잘 맞아.’
배우에게는 인생 캐릭터라는 게 있다.
어떤 배우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역할이 바로 그것인데, 그녀는 이미 인생 캐릭터라 평가를 받는 역할이 있었다.
그 캐릭터를 연기해서 연기대상을 받기도 했었고 말이다.
그런데 이번 캐릭터도 시작부터 심상치 않은 느낌이 들었다.
‘대사들도 입에 착착 붙어.’
잘만 연기한다면 주인공을 잡아먹을 가능성이 있는 캐릭터였는데, 거기에 더해 캐릭터가 그녀와 너무 잘 맞기까지 한 거다.
이건 주인공을 잡아먹으려고 작정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다행스럽게도 죄책감을 가지지 않을 수 있게 썩 좋아하지 않는 인성을 가진 배우가 조연을 맡게 돼서 죄책감도 없었다.
그녀보다 훨씬 늦게 데뷔했으면서 연기력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겸허하게 인정하지 않고, 예쁜 얼굴만 믿고 나대는 배우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