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녀역전 세계의 아이돌-652화 (647/849)

Chapter 652 - #93. 민영 (6)

배우들의 신경전은 꽤나 살벌한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20대~30대 배우들 사이가 가장 치열하며, 진주아와 한민영이 원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라이벌이 되어 팬들끼리 치고 박고 싸운 이유도 자존심 때문이 컸다.

“그래서 뭐 어떻게 하자는 건데? 불평만 늘어놓지 말고, 뭘 바라는지 말해봐.”

“그렇게 눈치가 없으세요? 작가한테 뭐라도 좀 해보라는 거죠!”

“드라마판에서 작가 힘이 얼마나 센지 몰라? 괜히 작가 쪽 건드렸다가 돌연사 당해서 죽으면 어쩔래?”

“저 주연이에요!! 주연!!”

연기력은 좀 부족하지만, 예쁜 얼굴로 인기를 얻었고 CF 여신이라는 키워드로 차세대 여배우가 된 백선주.

그녀가 차세대 라이징 스타가 되기 직전이라면, 한민영은 모르는 사람이 없는 스타 여배우였다.

연기 대상을 받은 그녀는 아직 라이징 스타가 되지 못한 백선아와 한 단계 아니, 두 단계는 높은 급의 여배우였다.

그런데 급이 다른 두 사람의 위치가 이번 드라마에서 바뀌었다.

한민영이 조연 악역을, 백선주가 주연을 맡게 된 것이다.

물론 한민영 쪽에서 악역을 원해서 생긴 일이라는 건 알았지만, 백선주는 기왕 이렇게 된 거 지금의 관계를 쭉 이어가고 싶었다.

‘이번에 제대로 눌러주고 전부 빼앗아버려야지. 주연 자리를 찬 걸 후회하게 해줄 거야!’

캔디형의 전형적인 주인공이라는 건 알았지만, 결국 드라마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건 조연이 아니라 주연이다.

그러니 결국 이기는 건 자신이 될 게 분명한 것이다.

“드라마판에서 주연 믿지 마라. 작가한테 밉보이면 순식간에 썰려 나가는 게 이 바닥 판이야. 얌전히 기다려. 네 말대로 너 주연이야. 작가가 계속 버려둘 순 없다고.”

“지금 당장 위기인데 어떻게 참아요! 조연한테 분량도 밀리고 있다고요!! 거기다가 캐릭터도 드럽게 마음에 안 들어요.”

“네가 주인공 하고 싶다며. 내가 이번 캐릭터는 매력이 없어서 하지 말자고 했잖아. 근데 어떻게든 주연 해보고 싶다며. 그래야 다음에도 주연할 수 있다고.”

“그건 제 말이 맞긴 하잖아요. 실장님도 주연에 들어가야 급 높아진다고 동의하신 일이고요. 그러니까 회사에서 어떻게 좀 해보세요.”

“나도 하고야 싶지! 근데 방법이 없어. 캐릭터가 마음에 안 든다고 하면 작가님이 과연 어떻게 생각하겠냐고. 자기 자식 욕한 거나 다름없는데. 네가 불만 생긴 거 말하잖아? 너 다음 작품 절대 못해.”

“누가 그렇게 직접적으로 말하래요? 돌려서 말할 수 있는 거잖아요.”

악역을 맡은 한민영은 매회 비싼 명품 옷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싹 바르고 나온다.

반면 자신은 어떤가?

주인공 역할이 캔디형이라 똑똑하긴 한데, 돈이 없어서 입는 건 항상 실용적이고 촌스러운 티셔츠에 청바지가 전부다.

그나마 예쁜 얼굴로 구질구질한 옷을 커버해주고 있긴 했지만, 문제가 되는 건 그녀와 직접적으로 비교가 되는 인물인 한민영이었다.

“캐릭터도 구려, 예쁜 옷도 못 입어, 조연한테 밀릴 정도로 분량도 없어! 이거 작가님이 저랑 싸우자고 시비 거시는 거 아니에요? 이 정도면 시비 맞는 것 같은데!!”

“에헤이, 지금 주인공은 활짝 날개를 피기 전이잖아. 스토리상 어쩔 수 없는 건데 지금 네가 흔들리면 안 되지.”

“이거 방영 되면 한민영만 잔뜩 주목 받을 거에요. 난 그게 끔찍이도 싫어요!!”

자신보다 두 단계는 급이 높은 한민영.

뱁새가 황새 따라가다 가랑이 찢어지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

여기서 백선주 달래자고 바라는 대로 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짓이다.

작가를 건드린 순간 망하는 건 백선주와 회사다.

때문에 실장이 선택한 건 백선주를 설득하는 거였다.

백선주도 투정을 부리며 자신의 힘든 점을 피력하고 싶었던 거였기에 실장의 말에 설득이 되어 당분간 참아주기로 마음을 다잡았다.

“씨이, 참는 것도 한두 번이지!”

작가가 때때로 촬영장을 찾아와서 촬영 장면을 보고 간다는 소리는 들었다.

그래서 그런가?

촬영장을 휘어잡는 건 주연인 자신이 아니라 한민영이었고, 그걸 알았는지 작가도 점점 조연인 한민영의 분량을 늘려갔다.

“조금만 참으면 분량 늘어난다면서요. 근데 늘어나는 건 제 분량이 아니라 한민영 분량이던데요?”

“하아~ 이래서 아예 여길 들어가면 안 됐는데…. 완전히 잡아 먹혔어.”

촬영이 중반에 들어선 현재.

흡족한 시청률을 기록한 첫 화가 방영이 되고, 드라마가 몰고 온 화제를 모조리 쓸어 담은 것은 주연인 백선주가 아니라 악역을 맡은 한민영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실장도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졌다.

“넌 나서지 말고 가만히 있어. 피해자인 척 하라고. 무슨 뜻인지 알겠어?”

“네!”

백선주가 실장의 말에 눈을 초롱초롱하게 떴다.

그동안은 주연의 품격에 맞게 대본이 정상적으로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지만, 이젠 슬슬 목소리를 낼 때였다.

여기서 더 가만히 있으면 호구가 되는 거다.

주의해야 하는 것은 배우는 철저하게 격리시키고, 회사 차원에서 항의를 해야 한다는 거였다.

배우가 항의했다고 하면 작가는 불쾌 할 수밖에 없다.

‘감히 네가 건방지게!’ 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거다.

톱스타가 항의를 해도 그럴 판에 급이 낮은 백선주가 그러면 작가한테 찍히는 게 당연한 수순이 된다.

하지만 회사 편으로 조심스럽게 항의를 하면 그마나 불쾌함 덜할 수밖에 없다.

소속 배우의 이미지와 분량을 지키기 위해 행동하는 것이 되니 말이다.

“어떻게 됐어요? 작가님이 뭐래요?”

며칠 후.

백선주가 잔뜩 기대감을 담아 실장에게 물어왔다.

실장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작가님이 우리 쪽 항의를 받아주셨어.”

“그럼 이제 정상적으로 바뀌는 거에요?”

“…아무래도 그렇겠지.”

“근데 왜 이렇게 표정이 안 좋으세요?”

“아니야. 넌 신경 쓸 거 없어. 연기 연습이나 열심히 해.”

“아휴, 지겹지도 않아요? 그놈의 잔소리. 내가 요즘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 알면 그런 소리 못할 걸요?”

한민영한테 밀리지 않으려고 백선주도 연기 연습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보통 예쁜 척으로 대충 연기하고 말았을 텐데, 외모며 연기며 한민영에 비해 부족하다는 게 적나라하게 보이다 보니 비교 당하지 않으려고 악착같이 연기 연습을 하게 되는 것이다.

“촬영장에서 한민영한테 건방지게 행동하는 건 아니지? 인사 꼬박꼬박 잘 해라. 이 바닥에서 건방지다고 소문나면 너만 손해야.”

“네네~ 알겠어요. 잔소리 말고 칭찬 좀 해주면 안 돼요? 얼마나 열심히 했는데.”

“내가 연기하는 걸 봐야 칭찬을 하든 말든 하지.”

“그럼 촬영장에 오시든가요!”

“그렇게 자신 있어?”

“…한민영이랑 같이 찍는 씬만 아니면 돼요. 캐릭터가 답답해서 제대로 연기를 해도 상대적으로 부족해 보인단 말이에요.”

실장은 백선주의 변명에 어림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그러시겠지.”

♧ ♧ ♧

“짜증나게 예쁘네, 시발.”

“네?”

“네? 뭐가요?”

“어…아닙니다. 제가 잘못 들었나 봅니다.”

신입은 드라마의 주인공인 백선주로부터 분명한 욕설을 들었는데 시치미를 뚝 떼는 걸 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인성 하고는.’

백선주가 신입이 담당하고 있는 한민영을 좋지 못한 눈초리로 보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꼬박꼬박 존댓말을 하면서 선배님이라고 불렀지만, 태도는 누가 봐도 시비 거는 쪽이었고 일부러 눈치 없는 척 하면서 비아냥댄 적도 있었다.

남배우 못지 않은 여배우들의 살벌한 기 싸움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별 다른 말을 하진 않았지만, 자신이 백선주가 아니라 한민영의 스탭이라는 점에서 안도감이 들었다.

백선주가 자기 스탭한테 얼마나 안하무인으로 구는지 들은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매니저가 되면 연예인 뒷얘기를 많이 듣게 된다던데, 스탭으로 일하는데도 들리는 소문들이 장난 아니네.’

자신이 이 정도면 매니저는 어느 수준이란 말인가?

신입은 문득 자신이 선택한 직업이 괜찮은 건지 걱정이 됐다.

한민영의 약쟁이 같은 금단 증세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연예인들의 짐승 같은 사생활은 어설프게 발을 들인 신입에게 큰 충격을 줬다.

차라리 모를 때가 좋았다.

반면 자신의 연예인을 보라.

애인과 오랫동안 만나지 못하면 이상한 증상에 시달리게 되긴 해도, 그 외에는 개인 사생활이 매우 깔끔하다.

스탭들에게 갑질하지 않고 친절하며, 수시로 두둑하게 챙겨주는 선물들은 그녀에 대한 충성심을 키웠다.

‘거기다가 연기도 잘하잖아. 어디 하나 욕먹을 곳이 없어. 다른 사람들이 욕을 하는 건 결국 본인이 못 나서 질투심 때문인 거지.’

스타가 반짝반짝 빛날수록 그림자 속에 있는 추악한 질투가 더욱 더 추잡하고 더러워보이는 법이었다.

신입은 자신의 배우가 저런 저급한 사람들의 질투심 때문에 상처 받지 않기를 바랐다.

근무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차근차근 ‘한민영의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 신입이었다.

“민영씨, 잠깐 시간 됩니까?”

“피디님? 들어오세요.”

주인공과 함께 찍는 씬이 있는 촬영 날.

피디가 대기실 문을 노크하고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바쁜가요?”

“아니에요. 준비 끝나서 대기하고 있어요.”

“오늘 촬영에 대해 말 할 게 있어서 왔습니다.”

“네. 들어오세요. 이것 좀 드실래요?”

피디가 디렉팅을 봐준다는데 마다 할 수 있는 연기자가 어디 있을까?

스탭들을 위해 준비해둔 먹거리를 피디한테 권하며 그녀의 표정을 주시했다.

표정을 보니 썩 좋은 일로 온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일단 존댓말을 하면서 말을 걸어온다는 것 자체가 좋은 소리 하러 온 게 아님을 증명하는 일이었다.

“다름 아니라, 작가님이 전달 할 얘기가 좀 있다고 해서 말이에요.”

“작가님이요?”

“앞으로 예정 되어 있던 전개가 좀 비틀어질 수 있다고 하더라고.”

드라마 전개가 갑자기 바뀌는 건 충분히 경험해본 적 있는 일이다.

쪽대본이 난무하는 드라마판이지 않은가?

작가가 출연자에게 이런 식으로 사전에 양해를 구한 것은 들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작가님의 선택이라면 얼마든지 따라야죠. 근데 그걸 왜 저한테 미리 말씀하시는 건지 모르겠네요. 제가 항의 할 거라고 생각하셨나요?”

“아니아니. 그게 아니라 지금 나오는 분량이 훨씬 많아지게 될 거란 소리야. 거의 주연급으로.”

“저 조연으로 들어온 건데요?”

“우리 민영씨 인기가 심상치가 않아. 연기를 너무 잘 해서 말이야.”

“흐음….”

본래 그녀의 역할은 최종 보스 같은 느낌으로, 가끔씩 임펙트 있게 등장해서 극의 긴장감을 주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방금 피디의 말로 단순히 극의 긴장감을 주는 역할을 뛰어넘어 캐릭터에 좀 더 강렬한 서사를 부여하겠다는 말을 하는 것이었다.

자기 캐릭터의 비중이 많아지는 것을 마다 할 연기자는 없을 것이다.

“제가 마다할 이유가 없는 일이긴 하네요. 근데 괜찮으시겠어요? 선주씨가 싫어할 텐데. 지금도 저한테 밀려서 아등바등하잖아요.”

한민영은 자신의 연기에 자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연기력 칭찬만큼 그녀를 기쁘게 하는 게 없다.

그런 점에서 자신과 연기를 하는 주연의 연기력이 부족하다는 게 썩 즐겁지 않았다.

연기도 합이 잘 맞춰졌을 때 기분 좋게 연기할 수 있다.

상대방을 무시하고 자기만의 연기를 하는 것도 가능하긴 하지만, 상대방과 합을 맞추는 것이 훨씬 연기하기 편하고 집중도도 달라진다.

“어떻게든 따라가보려고 아등바등 하고 있는데, 그 소식을 듣게 되면 포기해버릴까 걱정 되네요.”

지금 백선주는 그녀에 대한 질투심으로 가랑이 찢어지는 줄 모르고 따라붙고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작가가 그녀의 비중을 주연으로 바꿨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면 그 여파가 좋지 않은 쪽으로 튈 게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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