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55 - #93. 민영 (9)
동물 사체에 큰 충격을 받아서 스토커를 너무 과대평가 한 건 아닌지 되새겨볼 필요가 있을 듯 했다.
“잠깐. 이거 완전 미친년이잖아?”
유치하기까지 한 편지 내용에 동물 사체를 보고 놀랐던 가슴이 진정 되던 중.
은연 중에 녹아 있는 이상한 글귀 하나가 그녀의 신경을 건드렸다.
“왜, 왜요? 뭐 있어요?”
“편지 내용 제대로 안 봤어? 이걸 보고도 아무 생각이 안 들어?”
매니저가 어리숙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본다.
“여기! 이 부분 말이야!”
결국 그녀가 매니저에게 의미심장한 부분을 가리켜서 보여주었다.
“어…이 부분이 거슬리신다고요? 다른 부분이 아니라?”
“당연하지!”
차라리 자신을 노리는 거면 크게 상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를 향한 날선 저주들은 통상적인 것들이었다.
오히려 저 저주들을 직접 하겠다며 눈앞에 나타나 줬으면 한다.
그럼 스토커를 현행범으로 잡아넣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스토커가 성가신 이유는 이런 짓을 하는 것들의 정체를 모르기 때문이다.
“스토커들이 보내는 편지를 진짜 믿는 건 좀 아니지 않을까요? 얘네는 자기가 뭘 어떻게 썼는지도 기억 못할 걸요? 이 편지대로 진짜 행동했으면 이 사람은 연쇄살인범이에요.”
“나한테 한 말들은 전부 허세야. 근데 이 부분은 아닌 것 같거든. 넌 이게 안 느껴져?”
“…잘 모르겠어요. 이런 짓을 했으면 제정신 아닌 사람일 텐데, 걱정 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매니저가 조심스럽게 그녀가 지적한 부분을 다시 한 번 유심히 살펴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걱정이 이해 되지 않는다는 눈치였다.
그녀 눈에는 아주 위험해 보이는데 말이다.
“이걸 왜 몰라? 그와 내 사이를 방해하는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갈 거라는 이 부분! 누가 봐도 범죄 예고잖아.”
“이 말이 사실이면 이 사람은 언니를 죽이러 와야 하는데요?”
“그건 불가능하니까 자기가 할 수 있는 부분을 하려고 하겠지. 이렇게 호기롭게 택배까지 보내면서 선전포고 했잖아.”
편지에서 느껴지는 해솔이에 대한 찐득한 집착.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녀는 알 것 같았다.
이 여자가 편지를 썼을 때, 이 부분을 진심을 담아 작성했다는 것을.
그래놓고 들킬까 걱정이 됐는지 주변에 거짓말을 적어뒀다.
그래서 이 편지의 모든 것을 가볍게 느끼도록 말이다.
‘나중에 범죄를 저지르고 다시 편지를 확인했다면?’
미리 막을 수 있었는데 자신의 실수로 막지 못했다는 자책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스토커가 이 편지를 그녀에게 보낸 이유도 그것에 있을 것이다.
해솔이를 빼앗겨 절망하는 감정을 안겨주려고 말이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여전히 뭐가 문제인지 모르고 있는 매니저를 돌려보냈다.
그리고 그녀는 해솔이의 집으로 움직였다.
“어서 오세요.”
“오늘은 집에 있었네요?”
“네에~ 오랜만에 집에서 메이드 본분에 맞게 일하고 있었답니당~♡”
해솔이의 집에는 세 명의 메이드가 있다.
황당하게도 메이드들 모두 이름을 말하면 알만한 대단한 집안 출신이다.
도대체 이런 여자들을 왜 메이드로 두고 있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당사자가 좋아하니 그러려니 하고 있는 중이었다.
“일이 바빠져서 한동안 못 들어왔더니 집이 엉망이더라고요. 아휴~ 이래서 애들을 믿고 맡기면 안 되는 건데 말이에요. 근데 이 시간에 어쩐 일이세요? 주인님 오려면 시간이 꽤 많이 남았는데.”
“해솔이한테 해줄 말이 있어서요. 얼굴 보고 해야 하는 일이라서, 오늘 여기서 하루 자고 올 생각으로 왔어요.”
“아항~ 출출하시면 간단하게 샌드위치 만들어드릴까요?”
“괜찮아요. 직접 만들어 먹을 게요.”
거기다가 언니 동생 사이로 지내는 다른 사람과 달리 비앙카와의 관계는 좀 묘한 부분이 있었다.
같은 메이드인 멜리사와 칸나는 반말을 하고 서로 편하게 지내고 있지만, 이상하게 비앙카와는 편하게 말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묘하단 말이야. 친해지고 싶지 않은 느낌이랄까.’
처음에는 껄끄러워도 해솔이의 가족이니 친해져야 한다고 생각해서 꾸역꾸역 그녀와 친분을 쌓았다.
말도 편하게 하라고 해서 그랬던 적도 있고 말이다.
그런데 마음이 편하지 않다 보니 다른 사람이 있을 때는 몰라도 비앙카와 둘이 있을 때는 저절로 존댓말이 나왔다.
비앙카도 그녀가 본인을 어려워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내가 어려워하는 걸 은근히 즐기는 느낌이랄까.’
해솔이가 비앙카와는 너무 친해지지 말라고 조심스럽게 말했던 적이 있는데,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가 되더라.
그 이후 멜리사와 친해지면서 비앙카가 어떤 스타일인지 알게 됐다.
그녀는 극S의 성향을 보이는 사디스트였던 것이다!
친동생인 멜리사를 어떤 식으로 괴롭혔는지 얼핏 들었는데 그것만으로도 학을 뗐다.
왜 그녀가 비앙카만 유난히 꺼려졌는지도 납득이 됐고 말이다.
“주인님한테 무슨 말을 하러 온 건지 궁금한데, 나한테 먼저 말해줄 생각 없어요?”
간단하게 냉장고를 뒤져서 샌드위치를 만들자 비앙카가 커피를 내려줬다.
두 사람 몫을 만들었기에 식탁에 앉아 먹으면서 대화를 나눴다.
비앙카는 그녀가 집에 온 목적에 뭔가 있다고 느꼈는지 슬쩍 질문을 해왔다.
어차피 해솔이가 오면 다들 알게 될 텐데 굳이 숨길 이유가 없었다.
“어제 해솔이랑 같이 있었거든요. 해솔이가 돌아가고 아침에 현관문 앞을 보니까 택배가 와 있더라고요. 근데 그 택배가 일반 택배가 아니라 스토커가 놓고 간 거였어요.”
“흐응, 그랬구나. 스토커가 잡고 싶은 거에요?”
“아뇨, 저는 상관없는데 그 스토커가 편지에 의미심장한 소릴 해놨더라고요.”
“편지 좀 보여줄 수 있어요?”
“물론이죠.”
편지를 꺼내서 비앙카에게 건냈다.
그녀는 말라붙은 핏자국처럼 보이는 편지를 서슴없이 받아서 글을 확인했다.
“혹시 이 부분이 걸린 거에요? 주인님이랑 누구도 방해할 수 없는 곳으로 갈 거라는 부분.”
“역시! 눈치 챌 거라고 생각했어요. 매니저한테 물어보니까 이해를 못 하더라고요. 그 부분이 왜 거슬리는지.”
“다른 내용은 이 부분을 넣으려고 대충 거짓말로 지어낸 거네요. 귀엽게 수작을 부렸네.”
속이 뻥 뚫린 것 같았다!
사이다를 마신 것처럼 시원하다.
그야 말로 척하면 착 알아듣는 이 상황!
그녀의 눈치를 보며 마지못해 그런 것 같기도 하다는 소리를 한 매니저와 달리 비앙카는 굳이 길게 설명을 안 해줘도 그녀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말을 이어갔다.
“귀엽다기보단 역겹죠. 주제도 모르는 것이 자기 욕망에 빠져서 감히 건드리면 안 되는 걸 욕심내고 있으니까요.”
“후후, 저는 이런 애들을 보면 잔뜩 귀여워해주고 싶어진달까요? 그래서 이번 일을 주인님한테 말씀드릴 생각인 거죠?”
“네.”
“흐음, 근데 이걸 말해도 딱히 방법이 없지 않아요? 이 편지를 보낸 스토커가 직접 움직일 때까지 기다리는 거.”
“경호원을 고용할 수도 있고, 평소에 좀 더 조심해서 혼자 다니지 않는다거나 그렇게요.”
미리 조심하다가 당하는 것과 전혀 모르고 있다가 당하는 것은 천지차이다.
그녀가 조심하라고 말을 해준다면 해솔이는 분명 들어줄 거다.
증거가 고작 편지 한 장에 불과하다고 해도 말이다.
“글쎄요. 제가 보기에 이걸 말해도 주인님은 별 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으실 것 같은데요?”
“왜요?”
스토커의 위험성을 해솔이가 모를 리 없다.
서로 말은 안 하지만 남자 아이돌은 특히나 악성팬들이 많이 꼬이는 편이지 않은가?
그러니 말을 해주면 철저하게 대비할 거라고 생각했었다.
“주인님은 특별하시잖아요.”
“…….”
부정할 수 없는 특별함.
“그래서 아마 대비 안 해도 된다고 생각하실 거에요. 그게 사실이기도 하고요.”
“아무리 그래도 남자인데….”
“여자보다 힘 센 남자잖아요. 이 스토커가 주인님을 납치한다? 말도 안 되는 소리죠. 뒤통수를 까여도 아마 주인님은 태연하게 그 스토커를 제압하실 거에요.”
“끔찍한 소리! 상상하기도 싫어요.”
비앙카의 거침없는 말에 사색이 된 민영이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내질렀다.
스토커가 해솔이를 납치하기 위해 좋지 못한 수단을 사용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그로인해 그가 다칠 수도 있다는 상상이 그녀를 끔찍하게 만들었다.
“저는 벌써부터 어떻게 될지 미래가 훤히 보이는 걸요~?”
“그럼 막아야죠! 가만히 두고 볼 게 아니라.”
“주인님이 괜찮다는데 메이드인 제가 뭐라고 그렇게 행동하겠어요.”
“그럼 어쩌자는 건데요? 그냥 두고 보자고요?”
답답해서 입술을 꽉 깨물고 비앙카를 노려봤다.
그녀의 붉은 입술이 호선을 그으며 미소를 띄웠다.
“주인님께 말하지 말고 저희들끼리 해결하는 건 어때요?”
“해솔이 모르게요? 아니, 그보다 저희가 어떻게 해결을 하죠?”
굳이 모르게 할 필요가 있는지도 의문이었고, 스토커를 잡을 수 있는 방법도 마땅치가 않았다.
“저는 주인님이 나서지 말라고 하면 명령대로 해야 돼요. 그래서 알리지 말자고 한 거에요. 명령하지 않은 부분은 제가 자율적으로 움직일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제가 자유롭게 움직인다면 이 편지의 주인인 스토커를 잡는 것도 가능하겠죠. 제가 생각보다 참 많이 유능하답니다.”
다른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면 믿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말한 사람이 재벌 가문 출신이다 보니 차마 못 믿겠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부와 권력을 가진 사람이 나서기 시작했을 때의 여파를 한 번도 경험해본 적이 없지 않은가?
그녀가 상상 못할 행동으로 스토커의 정체를 파헤치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을 듯 했다.
“이 스토커가 해솔이한테 위해를 가하기 전에 해결할 자신이 있다는 거죠?”
“저 혼자서는 힘들어요. 근데 유일한 목격자인 사모님이 도와주신다면….”
비앙카가 사근사근하게 부르는 사모님이라는 호칭에 소름이 쫙 돋았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비앙카가 사모님이라고 부를 때마다 불편해서 미칠 것 같다.
차라리 이름으로 부르라고 해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태연하게 사모님이라고 했다.
비앙카가 끝말을 흐리며 뜸을 들이더니 이어서 말했다.
“상황이 많이 달라지지 않겠어요?”
“제가 뭐 어떻게 하면 되는데요.”
“후후후! 일단 그 택배가 왔던 시간부터 말씀해주시겠어요?”
“CCTV 보시려고요?”
“네. 이 나라가 좋은 점이 있다면 CCTV가 굉장히 잘 설치되어 있다는 점이거든요. 돈이 있다면 인력을 갈아 넣어서 범인을 찾을 수 있답니다.”
단순히 돈만 필요한 게 아니다.
CCTV를 볼 수 있는 것도 권력이 있어야 가능한 거였다.
명분 없이 CCTV를 서슴없이 보여줄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민영은 불가능해도 비앙카는 가능한 일.
그렇기에 민영은 비앙카가 내민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소속사가 아니라 비앙카 뿐이라는 걸 알았으니 말이다.
‘괜찮은 거 맞…겠지?’
비앙카는 꼭 조심하라고 경고해줬던 해솔이의 말이 귓가에 맴도는 건 왜 일까?
“후후후, 안 잡아먹어요. 그렇게 겁먹으면 귀여워서 예뻐해 주고 싶어지는데.”
“힉!”
그녀가 겁을 먹고 있다는 걸 눈치 챘는지 비앙카가 의미심장하게 웃어보였다.
비앙카는 오랜만에 자신이 나설 일이 생겼다는 사실이 기뻤는지, 먹잇감을 앞에 둔 호랑이처럼 눈이 번뜩이고 있었다.
“앞으로도 이런 문제가 있으면 언제든 저한테 말씀해주세요. 이런 문제가 아니더라도 언제든 도와드릴 테니까. 겁먹을 필요도 없어요. 겁먹어야 하는 사람은 주인님한테 이런 짓을 한 스토커랍니다.”
비앙카가 많이 놀란 듯 보이는 민영을 다정하게 달랬다.
실제로 비앙카가 눈을 빛내고 있는 이유는 민영 때문이 아니라 스토커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