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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역전 세계의 아이돌-677화 (671/849)

Chapter 677 - #95. 메이 린과 조안나 (1)

"오랜만에 만나는 건데 반가워하지도 않고. 무슨 일 있어?"

분위기 좋은 와인바에서 오랜만에 만난 친구 메이 린의 표정에 권태가 가득하다.

조안나는 친구의 표정을 보고 단번에 기분을 파악하고 물었다.

"내가? 아니, 별 다른 일 없는데."

"아무 일도 없다는 사람 표정이 아닌데?"

"그렇게 보여?"

"아니라고 하려는 거야?"

메이 린이 잠시 고민하다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이 맞는 것 같아. 나 요즘 별로야."

"일이 잘 안 돼?"

"아니, 나 잘 나가. 너도 소식 들어서 알잖아."

"그래서 의외였던 거야. 이번에 상도 받았다며."

"응."

메이 린은 사진 작가로서의 명성을 차곡차곡 쌓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과거 메이 린은 자신이 당했던 인종 차별로 서양인을 혐오했고, 그로 인해 자신의 사진으로 서양인을 담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인종차별을 하며 사진을 찍는 작가가 세계에서 살아남기란 쉽지 않았기에 동양인의 매력을 깊게 파고 들어서 명성을 얻는 것을 선택했다.

워낙 실력이 좋았기에 그녀의 선택은 성공적이었다.

서양인들에게 동양인의 미가 은근히 먹혀 들어갔던 것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시큰둥이야."

"별로 흥이 안 나네. 재미가 없어. 이게 슬럼프인가?"

"슬럼프? 예전에 겪었던 그런?"

동양인만 담다 보니 주변 사람들은 한계가 뚜렷한 작가라며 폄하를 하곤 했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었다.

그녀의 명성에 오명을 얹고 있던 '동양인만 잘 찍는 작가'라는 수식어에서 벗어났다.

물론 그 한계를 뛰어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인종을 뛰어 넘는 외모의 뮤즈를 만나지 않았다면 그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했을 것이다.

"예전에? 아...그때랑은 좀 다르지. 지금은 딱히 일하면서 부족하다는 생각은 안 들거든. 나 잘 하잖아."

실제로 메이 린은 잘난 척을 해도 될 만큼 뛰어난 실력을 가진 사진작가였다.

"일 때문에 생긴 슬럼프는 아니라는 거네. 그럼 우울증?"

예체능 쪽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우울증에 쉽게 걸리곤 한다.

감정을 다루는 직업이다 보니 그렇다.

사진작가가 무슨 감정을 다루냐고 물어볼 수도 있으나 예전에 메이 린이 사진은 찰나의 순간, 인물이 담아낸 감정을 얼마나 잘 담아내느냐가 실력을 가르는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런 직업이다 보니 본인의 감정을 다스리는 것도 중요했다.

"아무래도 그렇지 않을까? 예전에는 마음에 드는 사진을 찍으면 짜릿하고 그랬는데 요즘에는 그냥 덤덤해. 사진을 찍는 걸 여전히 좋아하긴 하지만 예전처럼 열의를 느낄 수 없다고나 할까? 근데 슬럼프에 걸려도 내 실력이 어디 가는 건 아니라서 잘 나오긴 하거든."

실력이 줄어드는 슬럼프는 아닌데, 오히려 그것보다 더 심각하다 볼 수 있었다.

이 슬럼프는 급하게 극복할 필요가 없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계속 방치한 거야? 일하는데 지장이 없으니까?"

"처음에는 이러다가 말겠지 싶었어. 일이 바빴으니까 우선 순위에서 내려간 거지. 초반에 싹을 제거했어야 했는데 말이야."

하지만 그때에는 그냥 기분 탓이겠지 가볍게 넘길 수준이었다.

그 미묘한 균열이 점점 크기를 키워 그녀의 정신을 뒤흔들게 만들 줄도 모르고 말이다.

"방치를 하니까 조금씩 거슬려지기 시작하더라. 갑자기 잠이 안 오고, 일이 하기 싫어지고, 무기력해지는 거 말이야."

"심각하네."

"우울증 약이라도 먹어야 하는 거 아닌가 했다니깐. 하하!"

"치료는?"

"정신과라도 가야 할까 생각하긴 했는데, 글쎄? 거길 간다고 해서 이게 나아질 것 같진 않던데."

"그래도 가보지 않으면 모르는 거 아닐까? 술 마실 때가 아닌 것 같은데."

"널 만나니까 그래도 숨통이 트여.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그냥 방치하면 안 된다는 걸 알았으니 계속 이렇게 방치해두진 않을 거야."

메이 린의 말에 조안나는 안심을 하면서도 도움이 될만한 일이 없을까 생각을 하게 됐다.

"잠이 안 오면 괴로울 텐데..."

무기력해지는 것도 굉장히 힘든 신체적 변화이지만, 잠이 안 오는 건 정말 삶의 질을 크게 떨어트리는 심각한 문제였다.

"그래서 술 마시잖아. 술에 취하면 잠들 수 있거든."

"나쁜 것만 하고 있네."

"나 걱정해서 하는 말이라는 건 아닌데, 네가 이러면 나 기분이 더 쳐지거든? 그러니까 거기까지만 해주라."

여기서 더 말하면 멘탈이 흔들릴 것 같다는데 말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결국 조안나는 한숨을 쉬며 그녀의 옆에서 외롭지 않게 맞장구를 쳐주는 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 되었다.

"연말이라 파티 분위기 좀 내려고 만난 건데, 축 쳐져버렸네. 미안."

"됐어. 너한테 사과 받고 싶지 않아. 날 위한다면 다음에 만났을 땐 제정신으로 돌아온 모습을 보여줘."

"그래야지. 아니, 그렇게 될 거야. 그나저나 너는 요즘 어떻게 지내? 회사는?"

"우린 이제 완전히 자리 잡았지. 스타 마케팅 하면서 인지도가 많이 올랐어."

명품 브랜드를 만드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명품은 스스로가 달아주는 게 아니라 그들의 상품을 구매한 사람들이 그것을 명품이라고 칭해줬을 때 비로소 값어치를 얻을 수 있는 거였다.

조안나는 자신의 실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명품 이미지를 얻는 건 실력과 별개의 일이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명품 이미지를 얻어내기 위해 '스타 마케팅'을 시작했다.

"여전히 해솔씨가 메인 모델인 거지?"

"그 사람은 여전히 내 뮤즈니까."

"브랜드 '안나'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올려지는 얼굴이기도 하지."

모델을 브랜드의 얼굴로 만드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만약 모델이 좋지 못한 일에 얽혀 사회면에 뜨기라도 한다면 그녀의 회사는 치명적인 이미지 훼손이 되는 것이니 말이다.

그래서 보통 명품 브랜드들은 대표하는 모델의 얼굴을 주기적으로 변경해주는 편이었다.

하지만 후발주자인 '안나'는 그런 걸 고려 할 위치가 아니었다.

그래서 과감하게 진해솔이라는 모델을 차용해 인지도를 알렸다.

"처음에는 네 선택을 후회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어. 메인 모델을 브랜드의 얼굴로 만드는 건 이미지를 고착화 시키는 일이었으니까."

"나도 알고 있었어. 초반에 내 계획을 반대하는 직원들도 많았고."

"근데 그게 오히려 신의 한수가 됐네. 진해솔을 믿었던 거지?"

조안나의 실력과 진해솔의 인지도 그리고 사기적인 그의 외모는 놀랍도록 완벽한 시너지를 보여주었다.

그를 메인 모델로 삼기 전에도 기세가 좋았지만, 진해솔을 메인 모델로 삼은 이후의 발전은 눈이 부실 정도였다.

"믿었지. 그리고 실수를 저질렀다고 해도 그 사람이면 상관없다고 생각했어."

"실수를 저질러도 상관이 없다?"

"그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남자인 건 여전할 테니까."

"...!!"

사람을 죽이는 범죄자가 되었다고 해도 그 명제는 바뀔 일이 없을 것이다.

그걸 믿고 배팅을 한 것이었다.

"그리고 해솔이 범죄자가 돼서 더 이상 연예계 활동을 할 수 없게 된다면 우리 브랜드가 냈던 화보들의 가치가 올라가지 않았을까?"

"너 진짜 똑똑하다. 난 그런 생각 전혀 못해봤는데. 정말 네 말대로 될 것 같아서 무섭네."

"찬란한 아름다움을 사진 속에 저장할 수 있는 너라면 이해해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하, 맞아. 어쩌면 그 사람이 천천히 늙어가는 모습을 내 손으로 담을 수 있으면 이 일을 하면서 슬럼프를 느끼는 일은 없지 않을까?"

진해솔은 그런 남자였다.

일을 해야 한다는 이유로 헤어지기엔 너무 아까운 남자.

하지만 그땐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에겐 증명해내야만 할 것이 있었으니까.

"그러고 보면 내가 이런 쓸데없는 우울증에 걸린 것도 목표를 잃어서 그런 게 아닐까 싶어."

"목표를 잃어서라....그거 굉장히 위험한데."

목표를 달성하고자 하는 의지가 클수록, 달성하고 난 이후에 생기는 탈력감도 클 수밖에 없다.

그 감정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했다면, 우울증에 걸리는 것도 충분한 일.

조안나도 회사를 운영하면서 꽤 많은 감정 노동을 해야만 했다.

하루하루 유행에 뒤쳐지면 안 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다가 시즌이 끝나고 휴식을 취하게 됐을 때 오는 감정들을 추스리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이 취미 생활을 하는 것이고, 스트레스 관리에 신경을 쓰는 것이었다.

'옛날에는 나도 그 감정을 수습하겠다고 술을 많이 마셨었지.'

그럴 때면 왜 이렇게 외로워지는 건지.

메이 린도 그래서 자신을 찾아온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외롭지 않아?"

"외롭지. 안 외로울 리가 없잖아."

"그럼 해솔이랑 만나보는 건 어때? 왜 피하는 건지 모르겠어. 그 사람이라면 네 외로움도, 슬럼프나 우울증도 모두 단단하게 안아줄 거야. 나한테 그랬던 것처럼."

조안나는 메이 린이 해솔과 만나는 것을 꺼려하는 것이 안쓰러웠다.

시즌이 끝났을 때가 더 이상 무섭지 않아진 것은 진해솔과 다시 만나기 시작했을 때부터였다.

그가 곁에 있으면 외로울 이유가 없었고, 흔히 그의 나라 말로 '현타'라는 게 오지도 않았다.

뱃속 안에 한 가득 싸주는 정액이 마를 날이 없을 정도로 찐하게 안기면 모든 부정적인 감정들이 싹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조안나는 이러한 감정들을 긍정적으로 느끼는 반면, 메이 린은 진해솔이 주는 감정들을 두려워했다.

"그 사람은 내 삶을 쥐고 흔들 수 있는 사람이야. 그래서 다시 만났다가 어떤 일이 생길지 몰라서 무서워. 그냥 내 의지가 들어가 있지 않은 상태로 휩쓸려버릴 것 같아. 그건 싫어."

사람마다 성향이 다르다 보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기는 한다.

하지만 이런 행복을 마다하는 메이 린의 모습에는 공감할 수는 없었다.

조안나는 솔직하게 자신의 마음을 밝히면서도 과거를 떠올려보며 말했다.

"사실 조금만 타협하면 되는 일인데, 그러지 않는 게 이해가 안 돼. 이게 그렇게까지 거부할 일인가 싶거든. 근데 생각해보면 너는 어렸을 때부터 이랬던 것 같아."

불의를 보면 넘어가는 법이 없었고, 조금만 타협하면 되는 일을 꿋꿋하고 우직하게 밀고 나가는 애였다.

이번 일도 그런 성향이 만들어낸 일일 것이다.

그녀가 타협을 하는 성격이었다면, 인종차별을 당했다는 이유로 자신의 사진에 동양인만 담겠다는 결정을 내리지 못했을 것이다.

'얘는 불의에 맞서 싸워서 승리한 사람이야.'

만약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위치에 서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녀가 어떤 고생을 했는지 곁에서 들은 바가 많은 조안나는 메이 린을 친구로서 존경하고 있었다.

"네 그런 모습에 반했던 건데...내가 너무 몹쓸 짓을 하고 있는 건가?"

"알면 그만 좀 유혹해. 진해솔은 나한테 악마라고."

"악마?"

해솔을 악마라고 표현할 줄은 몰랐다.

"악마는 인간에게 항상 달콤한 제안을 해서 유혹을 하곤 하잖아. 나한테 그 사람은 악마야. 내 인생관을 뒤흔들어버리는 악마."

너무 달콤해서 한 입에 삼켜버리고 싶은 악마.

메이 린은 텅 비어버린 마음에 알코올을 채워 넣었다.

이미 그녀는 조안나로부터 들은 얘기가 있었다.

진해솔과 만나면 시즌이 끝났을 때 느끼는 탈력감을 해소할 수 있다고.

그와의 섹스는 여전히 황홀하고 천국을 걷는 느낌을 준다고.

잠자리 한 번으로 텅텅 비어버린 뇌에 온갖 영감들이 새롭게 꽉 채워지는데, 그 감각은 너무 중독적이어서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고 말이다.

'만나는 순간 모든 게 바뀔 거야.'

메이 린은 한 번 그 아찔한 감각에 푹 몸을 담궜던 적이 있었다.

그래서 잘 알았다.

한 번도 그 맛을 느껴보지 않은 사람은 있을 수 있어도 자신처럼 한 번만 하고 포기할 사람은 없을 거라는 걸.

그렇기에 더 오기가 생기는 거다.

세상의 순리에 타협하는 건 그녀가 가장 하기 싫어하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물론...

'이러는 것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긴 해.'

집안 깊숙한 창고에 넣어두었던, 그를 피사체로 삼았던 사진들.

그것을 꺼낼 시기가 얼마 남지 않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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