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78 - #95. 메이 린과 조안나 (2)
우울증이 얼마나 무서운 질병인지는 직접 몸으로 경험해 보지 않고서는 모를 것이다.
일단 자신이 우울증에 걸렸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조차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몸이 아프면 아프다는 자각을 갖고 있어야 하는데, 이게 단순히 통증으로 신호를 보내는 질병이 아니다 보니 자각하기까지가 매우 힘들었다.
'내가 우울증인가?'
슬럼프를 경험해 본 적 있었기에 메이 린은 처음 이상함을 자각했을 때, 과거에 겪어본 적 있던 슬럼프를 또 앓게 된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조안나와 대화를 나누다 보니 슬럼프라기엔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제가 우울증에 걸린 것 같아요. 상담을 받고 싶은데, 도움이 될지 확신이 서질 않네요."
우울증에 걸리면 그걸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조안나와 약속한 게 있었던 메이 린은 자신의 상태를 객관적으로 확인하고, 치료해야 한다는 확실한 자각을 갖고 있었다.
때문에 조안나와의 만남을 끝내고 돌아온 메이 린은 병원으로 향했다.
자신의 상태가 괜찮아질 거라고 자의하는 것은 이미 충분히 한 상태였다.
이젠 인정하고 받아들일 단계였다.
"상담 예약을 하신 거 정말 잘 하신 겁니다. 우울증은 본인이 자각을 하고 고치고자 하는 마음을 먹는 게 정말 중요합니다. 그런 점에서 메이 린씨는 큰 산을 넘은 겁니다."
상담사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메이 린의 말을 받았다.
그리고 상담에 앞서 메이 린은 테스트지를 받아들여야 했다.
그녀가 앓고 있는 우울증 단계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테스트지에 자신의 상태에 대한 설문에 답을 한 그녀는 곧 본격적으로 상담에 들어갔다.
"우울증을 가장 처음으로 자각을 한 계기가 있으셨나요? 내가 우울증에 걸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요."
"음...얼마 되지 않았어요. 처음에는 다른 증상으로 생각했거든요."
"다른 증상이요?"
"네. 슬럼프요. 사실 예전에도 비슷한 경험을 했던 적이 있고, 해결을 한 적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이번에도 같은 일이 생긴 거라고 오해했죠."
"그러셨군요."
"오랜만에 친구를 만났고, 대화를 나누다가 문득 그럴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이거 슬럼프 아닌가 하는."
귀에 거슬리지 않는, 나름 좋다 할 수 있는 목소리로 덤덤하게 말을 받아주니 낯선 사람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놔야 한다는 부담스러운 상황에서 안정감을 느낄 수 있었다.
"자각을 하신 후에 바로 상담을 받으러 오신 건가요?"
"네. 이미 상당히 증세가 심각해졌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슬럼프는 어떻게 극복을 하셨나요? 약물을 통해 극복하셨나요?"
"아뇨. 그땐 요령을 부렸죠."
상담사는 그녀의 말에 관심을 보였다.
요령을 부려서 슬럼프를 극복한다?
어떤 요령인지 관심이 안 가는 게 더 이상한 거였다.
"그래서 이번에는 같은 방법을 쓰고 싶지 않았어요. 슬럼프라고 생각했을 때요. 한 번 해결한 적 있으니까 이번에는 스스로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거죠."
"불편하지 않으시다면 요령이 구체적으로 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상담사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고민하던 그녀가 말했다.
굳이 그걸 숨길 필요가 없다고 본 것이다.
"음...남자 분한테 이런 말을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섹스를 했어요."
"오, 성관계. 괜찮습니다. 전혀 불편하지 않으니 솔직하게 말씀해 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물론 말씀하셔도 크게 불편하지 않으시다면요."
상담사가 섹스를 한 대상이 누구인지 캐묻지만 않는다면 크게 상관이 없었다.
"불편하지 않아요."
"다행입니다. 음, 제가 보기에 슬럼프가 오셨을 때도 가벼운 우울증을 앓고 계셨을 겁니다. 아무래도 슬럼프와 우울증의 증세는 비슷한 편이거든요. 빠른 슬럼프 극복이 우울증을 극복할 수 있었던 이유일 테고요."
"그 말은 슬럼프 때 사용했던 방법이 지금도 먹힐 수 있다는 뜻인 가요?"
"만약 상담자 분께서 성관계를 통해 스트레스를 해소하실 수 있다면 나쁠 것 없는 방법일 겁니다. 하지만 온전히 우울증을 극복하기 위해 무분별한 만남을 갖는 건 좋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혹시 애인이 있으십니까?"
"아뇨. 헤어지고 꽤 오랫동안 혼자였어요."
"그럼 그 방법을 똑같이 하시는 건 좋지 않을 것 같습니다. 마음이 가는 인연이 따로 있다면 몰라도요."
마음이 가는 인연이라...
상담사의 말을 듣자마자 생각나는 건 진해솔, 그 남자였다.
오랫동안 시간이 흘렀음에도 그녀는 여전히 그 남자를 잊지 못하고 있었다.
"약물은요? 해결이 가능할까요?"
"약물이 우울증을 극복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건 맞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는 건 아닙니다. 상담자 분께서 극복하려는 의지를 가져주시는 게 약물보다 더 큰 도움이 됩니다."
"적어도 일하는데 문제가 없었으면 좋겠어요."
"...혹시 우울증을 극복하려는 이유가 일 때문이신가요?"
"당연하죠."
초반에는 일을 하는데 영향을 미치지 않았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영향을 미치지 않는 줄 알았다.
그래서 방치했고, 점점 깊어진 병세는 슬슬 그녀의 생활을 위협해왔다.
"초반에 그래서 내버려뒀던 것도 있어요. 일에 지장을 주지 않으니까요. 당장 해야 할 일은 코 앞에 닥쳐 있는데, 조금 불편하다는 이유로 따로 시간을 내기가 어렵더라고요."
가벼웠던 증상이 깊어지면서 그녀의 생활 패턴이 무너졌다.
잠을 자기 위해서 반드시 술이 필요했고, 그로 인해 다음날 컨디션이 엉망이 됐다.
"본인 스스로 생각하기에 본인의 삶에서 일이 차지하고 있는 게 얼마나 될 까요? 100% 중에 몇 퍼센트 정도죠?"
"꽤 많이 차지하고 있어요. 한...80%정도?"
인종차별을 당하면서 독하게 마음을 먹었다.
날 무시한 사람들을 모조리 짓 밟아 주리라!
자신보다 못한 녀석들이 인종을 핑계로 비웃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그럴 능력도 갖고 있었다.
'그리고 해냈지.'
독하게 마음을 먹은 덕분일까.
그녀의 재능은 화려하게 개화 하였고, 이제 누구도 그녀를 욕할 수 없는 자리에 도달했다.
"이런 쓸데없는 우울증에 발목 잡힐 순 없어요."
그녀가 비로소 모두의 인정을 받고 최고가 되었을 때.
순식간에 얼굴을 바꿔 그녀를 칭찬하는 사람들을 보며 그들을 마음껏 비웃었다.
아마 그녀 앞에서는 웃으며 비위를 맞춰줘도 속으로는 '언제쯤 바닥으로 추락할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들이 바라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
'절대 안 떨어져. 두고 봐. 평생 너희들 위에서 내려다보면서 즐겨줄 테니까.'
자신의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방심하지 않고 노력했다.
그 시간이 아깝지 않았고, 지금도 후회하지 않는 시간들이었다.
"그때부터 누구랑 함께 있는 것 자체가 싫어지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혼자 있는 게 편했어요."
어차피 다른 사람이 있어봤자 실력 향상이나 유지에 도움이 되지 않았으니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게 시작이었네요. 말하다 보니 원인을 알겠어요."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조금씩 늪으로 빠져들고 있었던 거다.
"무기력하고, 잠이 잘 오지 않고, 식욕도 별로 없고, 집중도 잘되지 않고요."
"그런 감정들을 주로 어떨 때 느끼셨나요? 얼마나 자주 그러셨죠?"
"상담지에 적혀 있겠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혼자 있을 때마다 항상 손에 술을 쥐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혼자 있을 때는 항상 그랬다는 거에요."
상담을 하면서 스스로의 상황을 다시 생각해볼 수 있게 된 것 같았다.
뭐가 문제의 시작이었는지, 어쩌다가 이렇게 되어버렸는지.
'상담이라는 게 영 쓸모 없을 줄 알았는데 나쁘지 않은 것 같기도.'
단순히 입 밖으로 자신의 상태를 말하는 것 만으로도 제법 도움이 되고 있었다.
'안나한테는 말 할 수 없는 내용들이야.'
조안나에게 이런 얘기를 할 수는 없었다.
그녀가 이 말을 들으면 자연스럽게 진해솔이라는 쉽고 편리한 해결 방법을 제시하려 할 테니 말이다.
실제로 만났을 때, 슬럼프에 대해 얘기하자마자 조안나는 진해솔을 만나는 게 어떻겠냐고 했다.
'아직은 좀 더 버틸 수 있어.'
자신은 그렇게 나약한 사람이 아니다.
적어도 슬럼프나 우울증 때문에 진해솔을 만날 생각은 없었다.
만약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땐 몸과 정신이 모두 완벽했을 때여야만 했다.
"좋습니다. 그럼 약물 치료를 시작했을 때, 금주를 하셔야 하는데 참을 수 있으시겠습니까? 술을 굉장히 자주 하시는 걸로 보이는데 이 부분이 걱정 되네요."
"술을 안 마시면 잠을 잘 수가 없어서 그런 거에요. 알콜 중독으로 보면 곤란해요."
잠을 못 자면 작업을 하지 못한다.
그래서 술을 마시는 거지, 술이 좋아서 마시는 게 아닌 것이다.
그러니 참으라면 참을 수 있었다.
다만 술을 마시지 않았을 때, 적어도 일에 지장이 가지 않도록 어느 정도 수면이 보장 되어야만 했다.
"음주를 통한 수면은 당장의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될 수는 있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 사태를 악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리고 스트레스를 주는 원인인 업무에서 한 발짝 떨어져서 휴식을 취하는 것도 우울증 극복에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지금처럼 일에 집중하면서 우울증을 극복하는 건 쉽지 않을 거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이런 상담사의 조언은 메이 린을 실망시켰다.
"일을 계속하려고 약물을 복용할 생각을 한 건데, 곤란하네요."
그녀가 원하는 해결 방안을 주기에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고 상담실을 나섰다.
우울증이 위험한 질병이라는 것을 알지만, 당장 해야만 하는 일을 손에 놓는 건 불가능했다.
그래도 유일하게 얻은 답을 포기할 순 없었기에 약물을 처방 받기는 했다.
우울증이라는 혼자만의 힘겨운 싸움이 시작 되고 있었다.
♧ ♧ ♧
"이번 작품은 정말 제 마음을 강하게 내려치네요. 인물의 주름 하나하나도 헛되게 넘기지 않는 작가님이라는 걸 알지만, 이번 작품은 뭔가 전체적으로 비극을 담고 있는 것 같았어요."
자신의 상태가 작품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그 미묘한 변화를 누군가에게 적나라하게 들켰을 때 그녀는 참을 수 없는 수치심을 느꼈다.
그녀가 선호하는 사진은 피사체에 담긴 인물의 감정이지, 자신의 감정을 사진에 남기는 게 아니었다.
그런데 그녀 본인의 감정이 너무 과하다 못해 넘쳐 흘러 결국 찍은 사진에까지 영향이 가버렸다.
사람들은 그녀의 변화에 또 다시 성장을 했다며 호들갑을 떨어댔다.
이래서 유명세가 중요한 거다.
유명해지면 그녀가 똥을 싸도 그들은 그것을 명품이라 착각을 한다.
보는 눈이 없는 것들이 흔히 저지르곤 하는 행동이었다.
평소라면 저런 이들은 상대도 하지 않았겠지만, 이번에는 차마 외면 할 수가 없었다.
"정 그렇게 마음에 들면 구매하시던지요."
본인의 구린 안목으로 최악의 사진을 가져가는 것이니 원망을 하려거든 스스로에게 해야 할 것이다.
"어머! 정말 그래도 괜찮을까요? 작가님 작품을 구매할 수 있다면 마다할 수 없죠!"
"아닙니다. 괜한 소릴 했네요. 저 사진은 애초에 비매품입니다."
빈자리를 만들 순 없었기에 걸어둔 것이었다.
눈이 있다면 저 사진을 구매하겠다고 하지 않을 거라 생각해 아예 비매품으로 박아뒀다.
그런데 저 여자가 그녀의 답답한 속도 모르고 좋다면서 칭찬을 해대는 게 아닌가?
심기가 거슬렸던 그녀는 저 형편없는 사진을 팔아서 엿을 줄까 했으나 충동을 꾹 눌러 참았다.
사소한 보복이 나중에 그녀의 평판을 갉아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