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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역전 세계의 아이돌-683화 (675/849)

Chapter 683 - #95. 메이 린과 조안나 (7)

메이 린은 속이 어떤 생각들로 드글드글 끓고 있어도 내색하지 않고 진해솔이 싸준 도시락을 먹었다.

진해솔도 메이 린의 속이 진탕 뒤집어졌다는 걸 짐작하지 못하는 듯 했다.

"맛있네."

"그러게요. 이거 좋아하는 줄 몰랐는데, 또 먹고 싶으면 말해요. 언제든지 만들어줄게요."

그녀가 어떤 음식에 흥미를 보이면 굉장히 좋아하며 활짝 미소를 짓는다.

그 모습이 얼마나 자극적인지도 모르고.

그녀는 도시락을 모두 해치우고 이빨을 닦을 때까지도 날카로운 이빨을 철저하게 숨겼다.

"오늘 정말 마음에 들었나 보네요. 평소보다 되게 빨리 먹었어요. 배도 좀 꺼지게 할 겸 밖에 나가서 산책이라도 할까요?"

무려 30분도 되지 않아 도시락이 바닥을 드러냈다.

양을 넉넉하게 싸왔고, 또 그 도시락의 대부분이 해솔의 뱃속으로 들어가긴 했지만 그녀가 평소보다 빠른 속도로 많이 먹은 것도 사실이었다.

"일단 이빨부터 닦고."

"칫솔 가져올게요."

일회용 칫솔이 든 세면 도구를 척척 가져와 내미는 해솔.

화장실로 들어가 칫솔질을 했다.

이곳이 집이었다면 함께 같은 공간에서 거울로 서로를 바라보며 칫솔질을 했을 것이다.

그것이 내심 아쉬웠던 그녀는 꼼꼼하게 칫솔질을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해솔도 이빨을 다 닦았는지 밖으로 나왔다.

"여기 근처에 산책할 만한 곳이 있어요?"

"휴게실이 있긴 한데, 거긴 아마 애들이 쉬러 갔을 거야. 내가 거기 가면 걔네들한텐 재앙이거든."

메이 린의 머릿속이 쳇바퀴처럼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었다.

사냥감은 워낙 뜯고 맛볼 부분들이 많아서 어딜 물어도 그녀를 흡족하게 할 것이다.

남들에게 그녀의 사냥감을 공유하고 싶지 않으므로,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갈 필요가 있어 보였다.

"그냥 휴게실에서 쉬자. 걷는 것도 피곤해."

"그럼 그럴까요?"

어차피 약도 챙겨 먹어야 했다며 해솔이 순순히 그녀의 말에 동조한다.

"작업을 항상 이렇게 힘들게 하세요?"

"딱히 힘들다고 생각해본 적 없어. 매번 하던 일인데."

"저랑 작업할 때는 안 그랬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지금 찍고 있는 애랑 네가 똑같다고 생각하는 거야? 전혀 달라. 하나도 똑같지 않아."

하나부터 열까지.

도무지 공통점이라는 게 1도 없었다.

아마 그가 그녀의 카메라 렌즈 안에 들어간다면 약을 먹어 몽롱해졌던 정신도 번쩍 들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녀가 찍고 있는 모델은 렌즈에 담고 싶지도 않은 매력 없는 모델이었다.

요리사에게 썩은 재료를 주고 최고의 맛을 내는 요리를 만들어 달라고 하는 건 너무한 일이지 않은가?

반면, 해솔은 신선하고 희귀한데다 그 자체만으로도 압도적인 맛을 갖고 있는 식재료였다.

요리사가 항상 갖고 싶어 하지만, 정작 이 식재료로 요리를 하라고 하면 어떻게 손을 대야 할지 겁이 나서 선뜻 손 대지 못할 재료 말이다.

"제가 더 낫다는 말이죠?"

"당연한 소릴 두 번 하게 하지 마."

"흐음~ 예전에 같이 작업했을 때, 저도 기분이 좋긴 했어요. 저를 그렇게까지 잘 찍어주는 사람은 처음이었거든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도 많이 부족했어. 지금 다시 찍는다면 다를 텐데...아니지. 지금은 아니고 병이 나으면."

지금 당장이라도 그를 자신의 렌즈 위에 올려두고 싶은 마음이 크다.

하지만 그녀가 앓고 있는 병이 발목을 잡아 올 게 분명하기에 충동을 억눌렀다.

요리사의 손이 굳어 있으니 좋은 식재료를 줘봤자 형편없는 실망감만 줄 것이다.

"혹시 나 찍고 싶어요?"

"...아니. 지금은 싫어."

"병 때문에 싫은 거죠? 날 찍어도 마음에 차지 않은 결과가 나올 것 같아서."

자존심 상하지만, 그의 짐작이 정확하다.

"이런 멍청한 상태에서 널 찍으면 형편없는 결과물만 나와. 지금도 그래서 계속 무의미하게 카메라 버튼만 눌러 대고 있는 거잖아."

그래, 멍청하게라는 말이 딱 맞다.

오늘 하루 종일 셔터를 눌러서 만들어냈던 작업물을 싹 다 삭제시키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입술을 꽉 깨물고 분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자 진해솔이 가까이 다가와 주먹을 쥐고 있던 손을 잡았다.

"무의미하게 찍혀도 괜찮아요. 왜 꼭 저랑 사진을 찍으면 의미 있게 찍어야 해요? 못 나와도 괜찮아요. 어디 작업물로 계약 되어 있는 것도 아닌데."

"널 카메라에 담는 거야! 아무 의미 없이 찍는 건 싫어."

최고의 식재료를 가져다줬으면서 그냥 쓰레기처럼 음식을 망쳐놔도 괜찮다고 한들 요리사의 마음이 편하겠나?

오히려 모욕을 당한 것처럼 얼굴이 화끈거릴 것이다.

"흠...기억 안 나요? 메이는 이미 제 사진을 무의미하게 찍었던 적 있잖아요."

기억?

"그것도 꽤 많이."

"그런 적 없어."

아무리 우울증에 걸렸다고 해도 있던 일을 잊어버리는 짓은 하지 않는다.

"있어요. 조안나랑 같이 섹스했던 그날. 사진을 찍고 바로 지웠잖아요. 의미 있는 결과물이 없어도 괜찮다고 했어요."

"!!"

"그리고 우리 요즘 데이트 하면서 같이 사진도 찍었죠? 그 사진이 메이가 만족 할 만큼 대단한 건 아니었잖아요. 저는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고, 바람이 불어서 머리는 잔뜩 헝클어져 있었죠."

그랬다.

하지만 그 사진은 남들에게 보이는 사진이 아니라 추억을 담고 있는 사진이었기에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았다.

고작 놀러 가서 찍는 사진에 무슨 큰 의미를 두겠는가?

추억만 담아내면 되는 것을.

"이번에도 그렇게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요? 우리끼리 장난처럼, 추억을 남기자는 의미로 찍는 사진이요."

"그게 될 리가 없잖아. 말 장난일 뿐이야. 그리고 왜 자꾸 사진을 찍어 달라는 거야? 네가 바라면 찍어 줄 작가들이 넘쳐 날 텐데."

스스로가 한 말이지만, 그 말에 아픈 건 그녀 본인이었다.

남들에게 사진이 찍히는 그의 직업이 오늘따라 원망스럽고 질투가 났다.

약을 먹었음에도 감정 조절이 되지 않은 그녀가 울컥한 마음을 담아 충동적으로 외쳤다.

"그때처럼 너랑 섹스하는 사진을 찍자는 거 아니면 흥미 없어."

이 대화를 나누기 전까지, 그를 잡아 먹을 생각으로 가득했기에 나온 발언이었다.

그런데.

"그것도 좋네요."

"뭐?"

"찍어요. 그렇게."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건지, 이 남자가 자기 나체를 찍으라는 소리를 서슴없이 해댔다.

그녀라면 얼마든지 괜찮다면서.

"너 남자야. 거기다 연예인이고. 유출 되면 어떻게 될지 알잖아."

"예전에도 찍었잖아요."

"그땐 너랑 내 사이가 연인 관계였어. 신뢰를 쌓은 상태였다고. 근데 지금은 남남일 뿐이야. 얼마든지 널 배신하고 사진을 유출 시킬 수 있는 사람이라고."

순진하게 전 여친을 믿고 몸을 맡기려는 게 말이 되냔 말이다.

이건 조안나에게 알려서 남친 단속 좀 제대로 하라고 말해야 할 듯 싶었다.

"제가 메이를 아는데 그런 걸 걱정 할 리 없잖아요."

자신을 잘 안다며 여유를 부리는 거에 또 울컥 해진다.

"네가 날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 우리가 만났던 시간보다 만나지 않았던 시간들이 더 길거든?"

사람은 변한다.

자신도 많이 변했다.

그런데 해솔은 과거의 자신을 기억하고 그대로 이길 바라는 것 같았다.

"흐음, 그렇게 나쁜 짓 하고 싶으면 유출해요. 난 내 몸에 자신 있어서 유출 돼도 딱히 부끄럽지 않거든요. 이미 제가 여자들을 많이 만나는 걸 다 알고 있잖아요."

여자를 많이 만나는 남자가 문란하지 않을 리 없다.

그러니 자신의 노출 사진이 유출 되어도 문제 없을 거다.

이런 의미인 것이다.

몸을 소중히 하지 않는 해솔의 행동에 화가 머리 끝까지 차올랐다.

그러다가 문득, 무엇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머릿속이 싸해지며 번쩍 정신이 들었다.

찰나의 변화였지만 그 변화가 주는 깨달음은 생각보다 강렬했다.

'일부러 저러는 거야. 날 도발하려고.'

진해솔이 저런 행동을 보이는 건 의도적인 거다 라는 깨달음.

왜 이런 짓을 의도해서 하는 거지? 라고 생각해보면 결론은 간단해진다.

'날 치료하기 위해서.'

그렇다면 어떤 방법으로?

우울증의 근본적인 원인은 스트레스가 쌓임과 동시에 찾아 온 외로움이다.

자신이 외로움 때문에 이렇게 무너졌다는 것을 여전히 믿기 힘들지만, 현실이 그렇기에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리고 외로움을 해소하기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은 '연인'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런 사진을 찍으려면 섹스를 해야 하는 거잖아.'

한 번도 안 해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한 사람은 없을 것이라 장담할 수 있는 게 바로 진해솔과의 섹스다.

그렇기에 동거를 하면서도 진해솔과 몸이 닿지 않게 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게 마지막 자존심이었으니까.'

분명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정신 못 차리는 사이에 자신은 그와 몸을 비비고 싶어 안달이 난 상태가 됐다.

방금 전까지도 그의 목덜미를 낚아 채서 아래에 깔아 뭉개고 마구 범해버릴 생각이 가득하지 않았는가?

거기에 대고 저런 말까지 하니, 순간 정신이 번쩍 들지 않았다면 바로 몸을 움직였을 것이다.

'병신 머저리가 됐구나. 사냥감은 그가 아니라 나였어.'

남자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게 믿기 어렵긴 하지만, 그의 절륜함을 떠올려보고 성별의 편견을 떼어서 생각해보면 충분히 해볼 법한 수작질이었다.

비정상적으로 떨어진 스스로의 상황 판단력에 욕을 짓 씹으며 그녀가 심호흡을 하고 진해솔을 바라봤다.

"??"

뭔가 격한 반응이 터져 나올 거라 생각했는데 갑자기 싸늘해져서는 가만히 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그녀를 진해솔이 의아하게 바라봤다.

그녀는 자신의 추측에 확신을 더하며 말했다.

"나를 도발해서 덮치게 할 생각이었지?"

"이런, 들켰어요?"

"내가 아무리 요즘 정신을 놓고 산다고 해도 네 음흉한 속내는 알아차릴 수 있거든?"

"에이~ 그럼 다 틀렸네요. 아쉽다. 이대로 넘어가면 덮쳐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단순히 덮쳐지기만 했을 줄 알아? 그보다 더 큰일 날 수도 있었어. 나도 요즘 내 정신이 깜빡깜빡해서 어떻게 나올지 모른단 말이야."

혹여나 자신이 분노를 참지 못하고 함부로 굴었으면 어쩔 뻔했는가?

"그렇게 무방비하게 행동하다가 후회 할 일 만들지 마."

"이러지 않았으면 날 건드리지 않았을 거잖아요. 언제까지 애들처럼 데이트만 하고 살아요. 그리고 예전부터 느끼고 있었어요. 메이랑 섹스하면 모든 게 해결 될 거라는 거."

그녀가 더 이상 그를 거부하지 못 할 테니 우울증도 금방 낫게 될 거다.

그와 함께 한다면 이런 감정에 휘둘릴 겨를도 없을 거다.

그가 선사해주는 짜릿한 쾌감과 행복에 허우적거리기 바쁠 테니까.

"그러니까 이제 그만 나한테 넘어와요. 언제까지 혼자 둘 거에요? 슬슬 나도 외로워지려고 하는데."

진해솔이 더 이상 봐줄 수 없다는 듯 그녀를 압박한다.

"항복하세요."

찌지직-

"메이는 나 못 이기니까."

바지의 지퍼를 스스로 내림으로써.

진해솔이 그녀가 앓고 있던 우울증을 향해 사형 선고를 내린다.

땅! 땅!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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