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89 - #95. 메이 린과 조안나 (13)
조안나와 해솔을 집에 두고 혼자 스튜디오에 나온 그녀는 어제 했던 끔찍한 작업물을 보며 깊게 한숨을 쉬었다.
'이게 내가 찍은 사진이라는 게 믿어지질 않네.'
스탭들이 나름 A급이라면서 사진을 선별해뒀는데, 기가 찼다.
"너희는 이게 A급이라고 본 거야?"
"......"
"B급이야. 전부! 하나도 빠짐없이 B급! 내가 말했지? 사진에 타협하지 말라고. 나는 너희가 이 작업물들 전부 B급으로 분류했으면 오히려 칭찬했을 거야. 내가 선생님이라서 내 작업물은 언제든 대단하고 완벽해야 한다는 법이라도 있니? 너희도 내가 형편 없이 찍으면 까. 난 이 업계에서 나보다 나이 많고, 활동 경력이 많았어도 까야 할 부분이 있으면 까는 사람이었어."
"!!!"
"!!!"
저희가 어떻게 선생님 작업물을...!? 하는 얼굴들이다.
오히려 이런 태도가 사람을 더 한숨 짓게 만든다는 걸 모르고 말이다.
"너희들 전부 이 작업물들로 비평 써와. 그리고 최대한 빨리 작업 다시 잡고. 새로 찍어야겠으니까."
"선생님, 근데 이 작업은 기간이 얼마 안 남은 건데..."
"그러니까 최대한 빨리 잡으라고 했잖아. 의뢰 기간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쓸데없는 걱정하지 말고 준비나 해놔. 만약 모델이 안 하겠다고 하면, 더 좋은 모델로 작업하겠다고 전하고."
"네에..."
메이 린이 자신의 작업실로 사라지자 남은 스탭들이 서로 시선을 마주치며 어깨를 으쓱였다.
"선생님 좀 달라지신 것 같지 않아?"
"너도 느꼈구나? 분위기가 확 달라지셨어."
"요즘 선생님 슬럼프 아니냐고 소문 났는데, 그런 말하는 사람들 싹 다 입 닫게 해주셨으면 좋겠다."
"맞아. 그리고 이 컷들이 어떻게 B급 컷이야? 내 눈에는 A급 컷이었단 말이야. 선생님이 자기 작업물 비평하라는 게 난 제일 어려운 것 같아. 도대체 뭘 까야 하는지 모르겠어."
"나도."
사진을 찍는 실력이 느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진을 볼 줄 아는 눈을 갖추는 것도 중요하다.
그래서 선생님은 꾸준히 작품 비평을 숙제로 내주시곤 했는데, 아직 보는 눈이 한참이나 부족한 그들은 선생님의 작품을 비평할 실력이 부족했다.
'문제는 선생님은 자길 어려워해서 그런 거라고 생각하신다는 거지. 그게 아니라 그냥 능력 부족인 건데...'
하지만 이런 오해를 정정 할 수는 없었다.
실력이 부족해서 비평하지 못한다고 말하는 건 너무 자존심 상하지 않는가?
선생님에게 인정을 받고 싶은 마음이 컸던 그들이 차마 오해를 정정하지 않고, 기준에 맞추기 위해 수면 아래에서 발버둥 치고 있었다.
이번 작업물 비평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들은 속으로 눈물을 흘리며 매정하게 자신의 작업물을 버려버린 선생님의 작품을 주섬주섬 공유해서 나눠 가졌다.
비평을 쓰려면 작업물을 주구장창 뜯어봐야 하니 말이다.
'그냥 이걸 보내줘도 아마 그쪽에선 감사합니다 하고 넙죽 받을 텐데...'
선생님과 어렵게 작업을 끝낸 모델이 다시 오라고 하면 순순히 와줄 지도 미지수였다.
의상도 다시 가져와야 하고...
"아악! 할 일이 너무 많아!!!"
비평도 써야 하는데...
오늘도 메이 린의 스튜디오 스탭들은 몸과 마음이 갈려가고 있었다.
♧ ♧ ♧
약물을 끊어도 괜찮을 것 같다는 말을 들었다.
지긋지긋했던 약물에서 해방 될 수 있다는 사실에 기쁘면서도, 정말 내 정신이 그 정도로 회복이 됐는지에 대한 의심이 들었다.
또 그때와 비슷한 일이 생기면?
계속 운이 좋을 거란 장담을 못하지 않은가?
의사의 말을 따르는 게 맞는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선뜻 약을 끊으라는 말에 동의하는 게 어려웠다.
스스로를 믿지 못해서 생긴 일이다.
"우리가 옆에 있는데 뭐가 겁나?"
하지만 그녀가 약을 끊는 것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자 조안나와 진해솔이 어림없다는 듯 말해왔다.
"네가 이상한 짓 하면 우리가 말려줄 게.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그만 먹자. 의사가 그래도 된다고 했으면 괜찮은 게 맞는 거야."
의사가 해준 말보다, 그들이 도와주겠다고 한 말이 훨씬 더 큰 위로가 된다는 걸 이들은 알고 있을까?
내 몸 상태를 본인보다 더 걱정하고 있는 그들은 그렇게 의사의 말에 따라 약물 복용을 중지했다.
놀랍게도 그동안 약 기운에 잠들곤 했던 그녀는 약을 먹지 않고도 밤에 문제 없이 잠들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몰랐던 일은 또 있었다.
그동안 약을 통해 감정이 조절 되고 있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약을 먹지 않은 후가 마음이 편했다.
'집중도 더 잘 되는 것 같고.'
도대체 그동안 왜 약을 복용했는지 모르겠단 생각이 들 정도로 먹지 않은 후의 변화는 새롭게 다가왔다.
그녀는 이미 정상적으로 회복 됐는데도 겁에 질려 병자 노릇을 한 걸지도 모른다.
'내가 완전히 다 나은 건 역시 그날 이후겠지?'
진해솔과의 섹스.
그것이 우울증을 극복 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애초에 그녀는 병을 극복할 쉬운 길을 이미 알고 있었다.
자존심 때문에 거부했던 것 뿐이지.
"어때요? 잠은 잘 자는 것 같아 보였는데."
"기분 괜찮아? 막 몸이 쳐지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고 그러진 않지?"
해솔과 조안나는 잠에서 깨어난 그녀에게 쪼르르 달려와 상태부터 확인하려 들었다.
메이는 병을 잘 극복해냈다는 사실을 친구에게 알리려고 입술을 달싹였다.
하지만.
"잘 모르겠어. 그냥 별 생각 안 들어."
"일단 상태는 나쁘지 않은 것 같네! 그 정도면 성공이야. 일단 약 없이 잠을 잤잖아!"
정작 입 밖으로 나온 건 전혀 다른 말이었다.
이제 신경을 써주지 않아도 될 만큼 회복 했다는 말을 하지 못한 것이다.
"오늘 스튜디오 촬영하는 날인데 잘 됐다."
조안나는 그녀의 회복을 진심으로 기뻐했다.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평소라면 쉽게 말하지 못했을 제안을 했다.
"촬영장에 놀러 올래?"
"진짜? 그래도 돼?"
"어. 네가 촬영장에서 사고 칠 애도 아니니까."
"그럼 해솔이도 같이 가는 거야?"
"아마 그렇겠지."
그 사람을 혼자 집에 둬봤자 뭐하겠는가?
"그럼 좋아! 갈래."
조안나가 해솔에게 오늘 스튜디오에 갈 수 있다는 말을 전하고 오겠다며 사라졌다.
혼자 남게 된 메이는 마른 세수를 하며 한숨을 푹 쉬었다.
"왜 이걸 못 말하지? 쟤도 일이 있는데, 나 때문에 얼마나 희생시키려고."
진해솔도 그렇고 조안나도 그렇고.
각자 해야 하는 일이 있는 사람들이다.
그런데도 이곳에 있는 건 오로지 그녀의 병이 걱정 됐기 때문인 거고.
'어디까지 민폐를 끼치려고...'
병에서 완전히 회복 되었으니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는 게 맞다.
자신 때문에 오랜만에 큰 마음 먹고 낸 휴가를 엉망으로 보낸 조안나에게도 미안하다고 사과해야 한다.
근데...
'괜찮아졌다고 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조안나는 안심하며 다시 자기 일을 하러 갈 거다.
그리고 진해솔은......
'내가 다 나을 때까지 있을 거라고 했으니, 돌아가겠지.'
이곳에 계속 남아 있을 이유가 없으니까.
착한 진해솔이 우울증에 걸려 자살할 뻔한 걸 수습하기 위해 시간을 내준 상황이었다.
우울증이 해결 된다면 그의 동정심도 끝날 것이고, 다시 그의 자리로 돌아가는 게 맞았다.
'안 돼!! 이렇게 허무하게 끝내면 언제 재회할지 모르는데...!'
쾌감에 들떠서 '자기'라고 무의식적으로 몇 번 뱉어내긴 했는데, 그게 아마 본심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녀는 다시 그와 연인 관계가 되고 싶었다.
그를 사랑하고 싶다.
아니, 이미 사랑하고 있었다.
'조안나의 도움을 받는 게 나을까.'
아무래도 해솔과 자신이 다시 예전 관계를 회복하기 바라는 건 조안나도 마찬가지 인지라 속마음을 털어놓으면 적극적으로 도우려 할 것이다.
'이미 그런 관계가 됐다고 오해하고 있기도 하니까.'
오해가 진실이 되도록 도와 달라고 하는 거다.
아니면 어영부영 이대로 관계를 슬쩍 밀고 나가는 것도 방법 중 하나이다.
그런 거 있지 않은가?
말로 확실하게 사귀자! 라고 하지 않아도 분위기로 사귀는 사이로 넘어가는 그런 거.
해솔도 어쩌면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마냥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넘어가는 건 딱 질색이지만...'
그녀는 어영부영 관계를 이어 붙이는 것을 선호하지 않았다.
그래서 시간이 좀 더 필요했다.
'그러니까 조금만 더 아픈 척 하는 거야.'
아픈 척 하는 기준으로 섹스 촬영을 하기로 했던 날을 잡았다.
그날이 올 때까지만.
자신이 멀쩡해졌다는 걸 숨기는 거였다.
어차피 다들 그때까진 이곳에서 시간을 쓰겠다고 약속을 한 상태이지 않은가?
그러니 다소 아픈 척을 한다고 해서 큰일이 나진 않을 것이다.
"스튜디오 가자고 했다면서요?"
생각을 정리하고 주방으로 나오니, 해솔이 익숙하게 앞치마를 하고 요리를 하고 있었다.
"응. 너희들이 민폐 끼칠 애들도 아니니까. 근데 일에 집중하느라 너희들 신경을 못 써줄 거야. 둘이서 촬영 구경하다가 심심해지면 나가서 데이트 하고 와도 돼."
"저번에 촬영장 구경했던 것도 나름 재밌었어요. 항상 모델이었어서 스태프들 입장에서 지켜 보는 게 신선했거든요. 그리고 곧 있으면 저도 사진작가가 돼서 촬영을 해야 하잖아요? 메이씨가 어떻게 촬영하는지 옆에서 보면 도움이 되지 않겠어요?"
"그럼 얼마든지 가르쳐줄게. 궁금한 거 생기면 물어봐. 근데 저번에는 운이 좋아서 안 들킨 거지, 이번에는 정말 들킬 수 있어."
"괜찮아요. 들켜도 상관없어요. 제가 들킨 여자들만 몇 명인데요."
얼굴 값을 하는 진해솔의 당당한 발언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저렇게 당당한 모습이 왜 나쁘게 보이지 않는 건지 모르겠다.
"그래, 그럼 알아서 해. 나는 여자라서 스캔들이 나든 말든 전혀 상관없으니까."
두 사람 모두 스캔들이 난다고 해서 타격을 받을 만큼 위태로운 자리에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 또한 두 사람의 스캔들을 그리 관심 있게 지켜보지 않을 것이다.
'아닌가? 쟤 팬들은 또 다르려나.'
극성팬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스타의 연인에게 테러 비슷한 걸 저지른다고 들었다.
아무리 우울증으로 고생했다지만 그런 테러들로 정신이 다시 흔들리기엔 그녀가 경험한 고난의 난이도가 너무 높았다.
'본인이 괜찮다는데 내가 계속 신경 쓰는 것도 우스운 일이지.'
그래도 이번엔 조안나와 함께 스튜디오를 방문하는 것이기에 소문이 난다 해도 어느 정도 빠져나갈 구실은 존재했다.
해솔이 아무 문제 없다고 당당하게 밝힌 만큼, 스캔들이 나도 계속 그런 태도를 유지해주길 바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