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녀역전 세계의 아이돌-690화 (681/849)

Chapter 690 - #95. 메이 린과 조안나 (14)

재 촬영이라는 건 모델 입장에서 굉장히 짜증스러운 일일 수밖에 없다.

누군들 그러지 않겠냐만은, 기껏 일한 작업물이 쓰레기로 버려진다는 게 기분 안 나쁠 수가 없지 않은가?

거기다가 재 촬영을 해야 할 만큼 모델이 제 몫을 못 했다는 뜻이 되기도 하기에, 이런 종류의 촬영을 기분 좋게 받아들일 모델은 없었다.

'왜 하필 나한테...'

더군다나 그녀가 이번에 함께 작업한 사람은 다름 아닌 메이 린이다.

뛰어난 실력으로 명성이 높은 작가다 보니 재 촬영이라는 부담이 모델에게 더 많이 갈 수밖에 없었다.

얼마나 모델이 형편없었으면 재 촬영을 했겠냐면서 말이다.

'이래서 어떻게든 떠야 하는 건데...이런 식으로 갑질을 당해도 아무도 알아 주질 않잖아.'

비록 그것이 진실이 아니라 할지라도 메이 린 쪽에서 대답 없이 어깨만 으쓱이면 그녀는 모든 오물을 뒤집어 써야만 하는 '을'의 입장이었다.

"며칠 사이에 관리를 좀 덜했나 봐요?"

"...이후로 저도 휴가를 잡아둬서요. 쉬는데 몸 관리를 일할 때처럼 할 순 없죠. 오늘 일 아니었으면 지금도 한참 쉬고 있었을 텐데."

스튜디오에 도착하자마자 모델은 자신을 향한 삐딱한 태도와 마주해야 했다.

사실 휴가 계획이 엉망이 됐다는 건 뭐라도 반박해보고자 한 말이었다.

휴가는 일주일 후였기에 부담 될 게 하나도 없었다.

재 촬영이라며 돈을 안 주는 것도 아니었고 말이다.

하지만 이번 재 촬영의 원인을 자신에게 뒤집어 씌울 것 같은 상황에서 반항도 안 해보고 당할 순 없었다.

거기다가 이 스튜디오 사람들은 스튜디오 주인을 닮았는지 하나 같이 일에 관련 된 것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나는 잘못 없다고. '

재 촬영 스케줄을 잡을 때도 그녀가 안 된다고 하면 다른 모델을 쓰겠다는 어처구니없는 소릴 한 사람들이다.

분하지만, 이쪽 바닥에서 유명하지 못한 모델은 '을'이었고 스튜디오의 갑질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이것도 얘기 듣고 다시 빡세게 관리한 거에요."

"아무리 휴가였다지만, 며칠 사이에 1cm가 늘어나는 건 좀 아니지 않나요? 살이 잘 찌는 체질인가 보네요. 이런 체질로는 모델하기 힘들 텐데 고생이 많으시다."

용케도 모델 일을 한다는 듯 무심하게 옷을 수정한다.

"...."

괜히 투정 한 번 부려 되로 주고 말로 받아버린 모델이 입을 꾹 다물었다.

사이즈에 맞게 수정을 한 옷을 갈아 입은 모델이 스튜디오의 뜨거운 조명 아래에 섰다.

한 번 촬영을 해본 컨셉이었기에 익숙하게 자세를 잡아보며 시물레이션을 하는데, 메이 린 작가가 뒤에 낯선 남녀를 달고 나타났다.

적어도 스튜디오 직원이 아니라는 것은 알 것 같았기에 절로 뾰족한 말이 나왔다.

"그때도 그러더니, 또 데려왔네. 촬영장이 장난인가...?"

낯선 남녀 중 남자는 저번 촬영장에서도 봤던 사람이 분명했다.

그때도 얼굴을 가리고 있었는데, 오늘도 마찬가지로 얼굴을 꽁꽁 싸매고 왔다.

'뭐 그렇게 귀한 얼굴이라고...우리 같은 사람한테는 얼굴을 보여주고 싶지도 않다는 건가?'

그 남자는 옆에 여자를 붕어 똥처럼 달고 있었는데, 연인 사이였는지 스킨십이 거침 없었다.

손을 잡는다 거나 팔짱을 낀다 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보통 남녀가 스튜디오에 들어와서 저런 짓을 하면 주인인 메이 린이 가만히 있지 않았을 텐데, 정작 그 주인이 저 방문객들을 데리고 온 입장인지라 누구도 터치를 하지 못했다.

'아...진짜 짜증나네.'

사실 그들이 대단한 진상을 부린 건 아니었다.

그저 옆에서 얌전히 촬영 준비하는 걸 지켜보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미 짜증이 날 대로 나 있는 모델 입장에서는 옆에서 알짱거리며 서 있는 것 만으로도 방해가 되고 있었다.

결국 모델은 원활한 촬영을 위해 이 정도 항의는 할 수 있는 거라 자의하며 말했다.

"저기요, 저 분들은 관계자 분 맞으신 거죠? 저번에도 그렇고 자꾸 여기 직원이 아닌 분들이 촬영을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아서요."

스태프에게 짜증을 풀려고 삐딱하게 말했는데, 대답이 나온 곳이 예상치 못한 사람이었다.

"관계자가 아니면 어떻고, 맞으면 어떻기에 그러는 거죠?"

"아! 작가님.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그렇게 목소리에 짜증을 담나요? 나중에 이거 때문이라면서 핑계 대지 말고 지금 말해요. 뭐가 불편한 겁니까?"

"아니...제가 좀 예민한 편이라서요. 관계자 분도 아닌 사람이 저렇게 쳐다보고 있는 게...가뜩이나 재 촬영이잖아요. 다를 때면 몰라도 재 촬영은 좀 진지하게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해서요."

재 촬영해야 하는 상황을 꼬집으며 하는 말에 메이 린의 한쪽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상황을 지켜보던 스태프들은 모델의 발언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저 모델, 미친 건가?'

'언제부터 촬영을 혼자서 찍었다고...왜 저래?'

보통 촬영 때는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 사이에 놓이곤 한다.

촬영을 도와주는 촬영 도구들이 한 두 개가 아니기 때문이다.

조명을 관리하는 스탭도 있고, 메이크업을 담당하는 스탭도, 의상 담당도, 각종 소품 담당도 촬영을 지켜보는 게 일상이다.

그런데 굳이 메이 린 작가의 지인들을 콕 짚어서 지적을 한다는 건 이 촬영에 대해 유감이 매우 많다는 걸 뜻했다.

'아이씨, 작가님한테 대놓고 말할 생각은 없었는데...'

모델도 항의를 를 작가에게 직접적으로 할 생각은 없었다.

언제나 그렇듯 스태프들에게나 화풀이를 좀 하고 갈 생각이었을 뿐이다.

그걸 운 나쁘게 작가님에게 들킨 것이다.

'스튜디오에 관계자가 아닌 사람이 들어온 건 잘못 아닌가? 난 충분히 할 수 있는 항의를 한 거잖아.'

물론 이 스튜디오의 주인은 메이 린 작가님이니 사람을 초대하는 건 그녀 마음대로가 맞다.

하지만 반대로 촬영에 집중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줄 책임도 있는 거다.

모델인 그녀가 사람이 있으면 집중이 안 된다는데 어쩌겠냔 말이다.

"지금 그럼 이 사람들을 바깥으로 내보내기라도 하란 소리에요? 촬영할 때 지켜보는 시선이 불편해서?"

"그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얼굴을 보고 누구인지는 확인해야 하는 거 아닐까요? 그럼 시선이 좀 덜 불편할 것 같아요."

저 말은 불쾌하니까 얼굴을 가리는 걸 치우라는 소리였다.

너무 어이가 없으면 말이 안 나온다는 게 맞다.

메이 린도 어이가 없어서 할 말을 잃은 상태였다.

아찔해지는 모델의 반란에 심호흡을 하며 정신을 차린 그녀가 감정을 한껏 담아 말했다.

"어디서 총 맞을 짓이라도 했나 봐요? 얼굴 가리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일을 못 할 정도로 거슬리는 거 보니."

"네에? 작가님 말씀이 심하세요. 어떻게 그런 말을..."

"이번 일 관계자라고 할 순 없어도 이쪽 일에 밀접한 관계를 가진 사람입니다. 적어도 당신한테 해가 되는 사람을 데려 온 게 아니에요. 근데 본인이 싫다고 하니 알겠습니다. 아예 내보내도록 하죠."

메이 린이 당장 모델에게 꺼지라고 소리 칠 줄 알았던 스탭들이 의외의 반응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모델 투정을 들어준다고? 메이 린 작가님이?!'

스탭들이 깜짝 놀라서 바라보는데, 메이 린 작가가 이어서 말했다.

"조안나, 미안한데 안에 들어가 있어 줄래? 보다시피 모델이 너한테 촬영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을 것 같아."

"어...응. 물론이지. 근데 괜찮은 거 맞지?"

"그럼. 안 괜찮을 게 있나. 오히려 미안하네. 초대해 놓고 제대로 촬영 도 못 보게 만들어서. 쉬고 있으면 촬영 끝나고 갈게. 아니면 아예 다른 곳에서 쉬고 있어도 괜찮고."

태연한 척 말하고 있지만, 누가 봐도 메이 린 작가는 이빨을 아드득 갈고 있었다.

"그건 우리가 알아서 상황 보고 결정할게. 넌 촬영 잘 해. 우린 신경 쓰지 말고."

"...그래."

메이 린의 입에서 지인의 정체가 밝혀진 순간.

스튜디오에는 소란이 일었다.

'조안나?! 설마 패션 브랜드 안나 CEO?'

'헉! 선생님 친구 분으로 유명하지 않아?'

'저분이 그분이었어?'

웅성웅성-

남녀 모두 얼굴을 가리고 있어서 정체를 모르고 있었는데, 메이 린이 말했던 것처럼 이쪽 업계에 아주 밀접한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 맞았다.

직접적으로 모델을 고용할 수 있는 패션 회사의 오너였으니까.

더불어 메이 린 작가와 조안나 CEO는 매우 친분 깊은 사이라는 것도 업계에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저 사람한테 눈에 띄면 대박인 거잖아.'

'저 모델이 제 발로 들어 온 복을 차네.'

'이래서 아무한테나 기회가 가면 안 되는 거라니까. 지 복을 지 발로 차잖아.'

모델은 자신이 꼽을 준 사람이 하필이면 저런 거물이라는 사실에 얼굴을 와락 구겼다.

그리고 조안나 옆에 서 있는 남자도 덩달아 입을 열었다.

"혹시 저희 때문에 곤란해진 거면 연락해주세요. 책임 질게요."

"책임? 네가 대신 모델이라도 해주게?"

"성별이 다른데 제가 어떻게 땜빵을 해요. 물론 가능하다면 못할 건 없겠지만요."

"네가 해준다는데 그쪽에서 거부할 리가 없잖아. 아마 기간도 훨씬 늘려줄 걸? 이쪽에서 남성복도 하니까. 아무튼 네가 생각하는 그런 일은 없을 거야. 신경 안 써줘도 돼."

남자의 정체를 확신할 순 없었지만, 저 남자도 이쪽 업계와 연관이 된 사람인 게 분명했다.

관계 되어 있지 않다면 대신 땜빵을 해주겠다고 할 리도 없었고, 메이 린이 그 말을 환영한다는 듯이 말 할 일도 없었을 테니 말이다.

'모델인가?'

'기럭지나 몸매 비율을 보면 그럴 확률 높지 않아?'

'근데 모델치곤 근육질이잖아.'

'그럼 연예인?? 누구지?? 아우! 얼굴 보고 싶다.'

스탭들이 어느새 흥미진진하게 스튜디오 상황을 지켜봤다.

"뭐야, 안 돼. 내 모델을 왜 네가 데려다 쓰니?"

"계약으로 묶여 있는 거야?"

"아뇨. 묶여 있는 기간 끝났어요."

원래 모델이랑 계약을 할 때 동종 업계 광고 제한을 걸어두곤 하는데, 진해솔은 워낙 이름 값이 높아서 그런 계약을 하면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래서 계약 기간 동안 동종 업계 광고 제한이 아니라 기한을 둔 광고 제한을 걸어두었는데, 지금 현재는 그 기한이 지나간 상태였다.

"이래서 기한 두지 말고 어떻게든 잡아뒀어야 했는데!"

스탭들은 그녀들의 대화에서 남자의 정체를 유추하느라 바빴다.

'안나' 브랜드의 남성 모델 중에서 저 정도 기럭지를 갖고, 저런 분위기를 풍기는데 모델로 잡아두지 못해서 전전긍긍 해야 하는 모델이라면?

"헉! 지, 진해솔님!?"

스태프 중 한 명이 진실의 판도라 상자를 열어버렸다.

"어...들켰네요."

"쟤가 힌트를 너무 많이 줬어."

"미안~ 실수야."

"꺄악! 해솔님 제가 너무 팬이에요!!"

스탭들이 방금 전 살벌했던 상황도 잊고 진해솔의 팬심을 거침없이 드러냈다.

"너희들 품위 지켜. 나 계속 쪽팔리게 만들 거야?"

"아아아-!! 그래도 진해솔님인데...!"

"너무 그러지 말아요. 촬영에 방해 되니까 이따가 싸인 해드릴게요. 지금은 일에 집중해주세요. 가뜩이나 방해 된 것 같아서 엄청 눈치 보이거든요."

"앗! 네네. 감사합니다."

남자의 정체가 진해솔이라는 게 밝혀지자마자 스튜디오의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평범했던 공기도 바뀐 기분이다.

모두가 밝혀진 정체에 환하게 웃고 있는 상황에서 유일하게 웃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다.

오늘 촬영을 해야 하는 모델.

그녀는 조안나의 등장에 경악을, 진해솔의 등장부터는 정신이 혼미해 머리 속이 새하얗게 변해버렸다.

감당 할 수 없는 업보가 밀려오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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