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91 - #95. 메이 린과 조안나 (15)
'왜...? 왜 여기에 진해솔이 나와?'
진해솔이 누구인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남자 TOP 1위에 선정 된 남자.
모델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선배 모델이었다.
비록 그의 본업이 아이돌이지만 누구도 그를 모델로서 부족하다 여기지 않았다.
그가 선 쇼의 숫자만 나열해봐도 그녀와는 비교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그렇기에 지금 모델은 고개를 숙이고 깍듯하게 선배님이라 부르며 이곳에 와준 것 만으로도 감지덕지 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메이 린 작가가 했던 말은 모두 사실이었던 거다.
적어도 모델에게 해를 끼칠 사람들을 데려 온 게 아니라는 것이.
'왜 일이 이렇게 커진 거지? 난 그냥 스탭한테 짜증 몇 마디 하려던 것 뿐인데...'
자신이 하는 말을 메이 린 작가님이 들은 것은 의도한 바가 아니었다.
상황이 심각해진 지금조차도 모델은 스태프에게 화풀이를 하려던 자신의 행동이 잘못 된 것임을 알지 못했다.
'이걸 어떻게 수습하지? 미치겠네.'
모델은 최대한 머리를 굴려서 방법을 생각했다.
적어도 자신은 불청객들에게 나가라고 말한 적이 없었다.
얼굴을 가린 사람이 촬영을 지켜보고 있어서 불편하다고 했지.
그 말에 예민하게 반응하며 지인들을 나가 있으라고 한 건 메이 린 작가님이었다.
'그걸 강조하자. 그게 내 유일한 살 길이야.'
호랑이한테 물려가도 정신만 바짝 차리면 살아 날 수 있는 법이다.
그러니 지금 이 상황도 어떻게든 수습이 가능할 것이라 믿었다.
"선배님! 안녕하세요. 제가 선배님을 못 알아 뵙고 실수를 한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촬영을 잘 해야 한다는 마음에 너무 예민하게 굴었던 것 같아요."
"아...네."
"선배님께서 제 촬영을 봐주신다고 하니까 너무 설레입니다. 물론 긴장이 안 되는 건 아닌데 실망 시켜 드리지 않게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그러니까 부디 나간다고 말하지 말아주세요!!! 라는 의미를 담아 간절하게 진해솔을 바라봤다.
여전히 마스크에 모자를 쓰고 얼굴을 꽁꽁 싸매고 있었지만, 왜 못 알아봤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평범하지 않은 분위기를 내뿜고 있었다.
'괜히 모두의 뮤즈라는 말이 있는 게 아니야.'
비록 시작은 좋지 않았어도, 어떻게든 다시 기회를 잡아 친분을 만들어야 했다.
그에게 듣고 싶은 말이 굉장히 많았다.
몸 관리를 어떻게 하는지, 모델 일을 하면서 쌓은 인맥은 어느 정도인지.
'진해솔 선배님 인맥에 들어갈 수 있으면 대박인 거잖아.'
멍청한 년!
얌전히 있다가 촬영을 멋지게 성공해 보이고 인사를 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모델은 한 번만 웃으면서 넘겨주길 바라며 애타게 대답을 기다렸다.
"아닙니다. 민폐 끼치고 싶지 않네요."
"맞아요. 저희도 눈치 보면서 있는 거 별로 안 좋아해요. 우리 나가 있을게. 신경 쓰지 말고 편하게 촬영하고 나와."
"응. 알았어."
"아, 아니!! 저는 정말 괜찮은데요. 선배님!! 선배님??"
모델이 애타게 스튜디오를 나가는 진해솔을 불렀다.
하지만 두 사람은 미련 없이 스튜디오를 나가버렸다.
그들도 바보는 아니기에 모델이 왜 그들을 지적하는 말을 했는지 모르지 않았다.
팔은 안으로 굽는 만큼, 메이 린의 스튜디오에서 삐딱하게 나온 모델을 봐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
"....."
스튜디오에 남은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이후의 시간이 모델에게 꽤나 괴로울 것임을 예측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촬영장에 와준 것 만으로도 감지 덕지 해야 할 사람을 감히 주제도 모르고 내쫓은 모델에게 뾰족한 시선이 향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제 불편한 게 모두 해결 됐으니 촬영, 시작해야겠죠?"
어디 이런 짓을 해 놓고 얼마나 잘 할지 지켜보겠다는 듯.
메이 린의 눈빛이 살벌하게 반짝였다.
"저, 저는 나가라고 한 적 없는데..."
사방이 적으로 둘러 쌓인 상황에서 모델이 정신을 유지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 적 없다고 변명해봤자 결과가 그렇게 된 것이니 책임을 지는 게 맞았다.
꿀꺽-
모델은 주변에서 느껴지는 뾰족한 시선들에 심장이 쿵쿵 뛰었다.
불길한 예감이 척추를 타고 온 몸을 서늘하게 만들고 있었다.
♧ ♧ ♧
멘탈이 나간 모델과의 촬영은 예상했던 것처럼 쉽지 않았다.
그래도 어떻게 만족스러운 결과를 만들어내는데는 성공했다.
그리고 스튜디오에서 촬영을 지켜 본 스탭들 모두 그럴 수 있었던 이유로 메이 린 작가의 실력을 꼽을 것이다.
"선생님 실력이 돌아오신 것 같아요!"
"내 실력? 난 원래 이랬는데?"
메이 린도 썩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기에 스탭의 너스레에 장난기를 담아 대꾸했다.
"어...제가 말을 잘못했네요. 선생님 실력이 더 늘으셨어요!"
"그래 보여?"
"네!"
"멘탈 나간 모델을 데리고 이런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사람은 선생님밖에 없을 거에요!"
재잘재잘-
그녀를 아기 오리처럼 졸졸 따라다니며 찬사를 내뱉는다.
스스로가 생각해도 오늘 촬영이 본인에겐 썩 나쁘지 않았던 것 같다.
물론 모델은 멘탈이 나가서 최악의 모습을 보여줬다.
초반에는 한 장의 사진도 찍지 않고 모델의 뻣뻣한 몸을 욕하면서 시간을 보내야 했을 정도다.
그렇게 완전히 모델의 멘탈이 뭉개지고, 완전히 의지를 잃었을 쯤.
모델을 꼭두각시처럼 사용하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멍청해서 말귀를 잘 못 알아 먹긴 했지만.'
발 끝, 손 끝 하나조차도 자신의 마음대로 움직이게 만드는 것.
그래서 모델 본인조차도 몰랐던 한계를 넘게 하는 것.
그것이 오늘 그녀가 새롭게 맛본 경지였다.
문제는 이것이 모델 입장에선 최악의 시간이 될 것이라는 점이다.
'앞으로 걔가 계속 모델을 할 수 있을까. 모르겠네. 내가 보기엔 못 할 것 같은데.'
모델의 인격을 모조리 짓밟고 오로지 촬영을 위해 사람을 개조시키는 것이었다.
이 방법을 알게 됐다고 해서 다음에도 써먹을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이 방법으로 촬영을 계속 했다간 모델들이 기필하는 작가가 될 거야. 아예 봉인해두는 게 나아.'
명성이 유지 될 때는 어떻게든 촬영을 할 수 있겠지만, 피해자가 속출하다 보면 결국 누구도 그녀와 작업하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 경험한 이 방법은 자신이 나아가려 했던 방법과 대척점에 있는 방식임을 알고 있다.
"아참, 그리고 선생님. 그 모델 블랙리스트에 넣을까요?"
"아니, 그럴 필요 없어."
블랙리스트.
말 그대로, 리스트에 들어 있는 모델과는 절대 작업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더불어 그 블랙리스트는 그녀와 친분이 있는 작가들에게 공유가 된다.
마당발 같은 인맥을 갖추고 있진 않지만, 명성 값이 있다 보니 모델에겐 꽤 치명적일 수밖에 없었다.
"정말요? 오늘 하는 거 보니까 모델로는 완전 최악이었는데요."
"난 걔가 과연 모델 일을 계속 할지 모르겠네. 괜히 블랙리스트에 자리 하나 차지하게 하지 말고 그냥 기다려봐. 알아서 나가 떨어질 테니까."
굳이 이름 하나를 더 올릴 필요 없이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바닥에서 만나기 힘들어질 거다.
그녀의 말을 들은 스탭도 아! 하며 그제야 의문을 접었다.
"걔는 아마 이번 작업물은 보지도 않을 거야. 자기가 찍힌 게 아니라는 걸 모를 수가 없거든."
자기 의지가 1%도 들어가 있지 않은 작업물이다.
그러니 차라리 안 보면 이 바닥에서 좀 더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작업물을 보게 된다면?
'99% 확률로 접겠지.'
사진 작가의 꼭두각시 노릇을 한 작업물이 본인의 능력으로 찍힌 사진보다 훨씬 퀄리티가 높다는 걸 알게 되는 거다.
무슨 정신으로 계속 모델 일을 하겠는가?
나 같아도 더러워서 이 바닥을 뜬다.
하지만 이번 작업은 모델에게만 비극이었을 뿐.
메이 린이나 작업을 맡긴 회사 쪽에선 만족할 만한 작업이었다.
그리고 이후로 메이의 예상대로 그 모델은 이쪽 업계에서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어떻게든 모델 일을 계속 하려는 시도를 했던 것 같은데, 지독한 슬럼프에 빠져 이겨내지 못했다고 한다.
이 소식 또한 스탭이 그 모델의 사정을 우연히 듣게 되어 메이에게 전달해준 이야기였을 뿐.
모델의 최후를 진지하게 생각하며 지켜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 ♧
촬영이 무사히 끝나긴 했지만, 촬영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모델을 데리고 촬영하는 게 쉽지만은 않았다.
때문에 예상한 것보다 훨씬 오랜 시간 동안 촬영이 진행 됐고, 메이 린의 촬영이 끝나길 기다리고 있던 두 사람은 꽤 오랫동안 시간을 죽이고 있어야 했다.
"많이 기다렸지? 미안. 둘이서 뭐하고 있었어?"
"섹스했어."
쿨럭-!
조안나가 아까부터 배부른 암사자처럼 있었던 게 왜 그런가 했더니, 다 이유가 있었던 거다.
메이 린은 황당한 표정을 보며 조안나는 천진난만하게 꺄르륵 웃었다.
"그러다가 누가 들어왔으면 어쩌려고 그런 짓을 해?
"그래서 더 짜릿한 거야. 들어보니까 너도 여기서 한 판 했다며."
"그으건 그렇지만..."
"너도 그때 짜릿했지?"
아니라고 하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땐 해솔과 너무 오랜만에 하는 섹스여서 장소를 가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덕분에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몰랐어."
"그럼 촬영 끝난 건 어떻게 안 거야?"
"스탭이 노크해서 알려주더라. 문을 미리 잠궈 놔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그때 한참 해솔이한테 박히고 있었거든."
조안나의 말을 듣고 있으려니 아랫배가 욱신거려온다.
오늘 하루 종일 일하느라 피곤했는데도 그에게 박히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꽉 채운 것이다.
"여기 있는 내내 섹스한 거면 움직일 체력도 안 남아 있겠네?"
"당연하지. 나 지금 일어나면 다리가 새끼 고라니 마냥 덜덜 거릴 걸?"
"그럼 바로 집으로 갈 거야?"
"아냐. 집은 혼자 갈게. 내가 끼어서 요즘 둘이 데이트 못 했을 텐데 오늘 이쯤에서 양보해줄게."
"무슨 소리야."
"둘이 오붓하게 데이트 하시라구요~!"
찡긋-!
조안나가 메이에게 역겨운 윙크를 날렸다.
당장 나머지 눈도 꾹 감겨주고 싶은 광경이었지만, 데이트를 하라고 자리를 비켜준다는 점에서 고마운 것도 사실인지라 인내하기로 했다.
"해솔이 너는 괜찮아?"
"어쩔 수 없죠. 제가 좀 자제를 했어야 했는데...오늘 약속을 제가 망쳤네요."
오늘은 더 이상 약을 먹지 않아도 되는 메이의 축하 파티를 하려고 했었다.
대단한 축하 파티를 하려는 건 아니고, 그냥 밖에서 신나게 놀자는 거였다.
"됐어. 처음 덮친 건 나였잖아. 같이 식사 못하는 건 아쉬워도 만족스러운 시간이었어. 잔뜩 사랑 받았으니까. 그러니까...지금 나한테 필요한 건 침대라는 거지. 깨끗이 씻고 침대에 누우면 거기가 천국일 걸?"
조안나는 식사에 마련이 없다며 침대를 울부짖었다.
조안나가 붉어진 안색을 가라앉히고, 집으로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걸을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다가 스튜디오를 나섰다.
조안나는 집으로 향했고, 메이와 진해솔은 미리 계획한 대로 축하 파티를 하기 위해 이동했다.
"조안나가 여기 꼭 가자고 해서 온 건데, 정작 걔는 못 왔네."
화려한 조명 아래 DJ가 만들어내는 음악에 취해 사람들이 몸을 흔들고 있는 이곳은.
메이 린과 진해솔이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클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