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705 - #96. 진해솔 (9)
"아빠아!!!"
갑자기 귓가에 훅! 하고 박혀 오는 귀여운 여자 아이 목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 우리 공주님, 벌써 일어났어?"
"헤헤헤"
나도 모르게 귀여운 여자 아이의 목소리에 반응해서 대답을 한 후, 꼬마 공주님을 번쩍 들어 올려 무릎에 앉혔다.
"꺄하하! 아빠 나 배고파."
"응. 공주님, 아빠가 금방 밥 차려줄게요."
뭐가 뭔지 자각하기도 전, 배고프다는 아이에게 밥부터 줘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득 찼다.
"마시따!"
냉장고를 확인하니 식빵이 있어서 그걸로 간단하게 토스트를 뚝딱 해줬다.
공주님은 내가 해준 토스트를 행복하게 냠냠 먹어주었고, 나는 그걸 어느 때보다도 행복하게 바라봤다.
"엄마는 안 이러나?"
"엄마는 좀 더 자게 내버려두자. 푹 자라고 말이야."
"웅...아라써."
나는 아이가 토스트를 냠냠 먹는 사이에 상황 파악을 끝낸 상태였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천진난만한 아이가 누구인지 알아차린 것이다.
없었던 기억이 기존에 있던 기억에 덮어진다.
기존의 기억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희미해질 것이고, 나도 어느 순간부터는 이 아이를 잃었던 적이 있다는 것조차 잊게 될 거라는 직감이 들었다.
하지만 그게 뭐가 중요하겠는가?
내 아이를 다시 되찾았다는 게 중요한 거지.
"밥 먹었으니까 오늘은 아빠랑 씻으러 갈까요?"
"네에!"
우렁차게 대답한 아이를 데리고 치카치카 이를 닦이고 뽀득뽀득 세수를 시켰다.
그때쯤이 되자 안방에서 란나가 잠에서 깨어나 부시시한 모습으로 밖을 나왔다.
"으웅..."
"엄마다! 엄마아!"
"응...그래, 아빠랑 씻었어?"
"응!"
"잘 했어. 맘마는?"
"아빠가 마싯는 거 해줘써."
두 모녀가 평화롭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응애애- 응애--
"애 깼나보다."
"유모님이 달래시네."
그리고 문 안 쪽에서 아이가 잠에서 깼는지 울음 소리도 들렸다.
첫째 때문에 둘째를 낳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이었다.
둘째도 무사히 낳은 것이다.
생각보다 미래가 잘 풀렸다.
실 유모님이 안에서 아이를 달래는지 울음소리는 금방 그쳤다.
나는 란나의 몫으로 토스트를 해주기 위해 요리를 하면서 계속해서 기억을 뒤적였다.
'달라진 건 우리가 결혼하고 첫째랑 둘째를 낳았을 때 정도인가?'
그 외에는 내가 좀 더 란나를 만나러 자주 들렸다는 게 달라진 부분이었다.
당연하다.
아이를 낳았으니 자주 만나서 챙겨야 하지 않겠는가?
'유모는 둘째 때부터 불렀구나.'
첫째가 태어났을 때 실 유모는 우리 집에서 쌍둥이를 돌보고 있어서 그런 듯 했다.
'포니 녀석, 일을 기가 막히게 해놨잖아?'
기억을 계속 뒤지면서 란나가 교통사고를 당한 적이 없다고 나오는 걸 보면 과거로 돌아가 잘 막아낸 게 분명하다.
167만 코인을 빚지게 됐지만, 그 코인이 하나도 아깝지가 않았다.
다른 세계로 가서 3천 명의 후궁을 만들어야 한다는 황당하기 그지없는 미션을 해내야 한다는 것도 오히려 지금은 무척 기꺼웠다.
겨우 다시 되찾은 아이와 계속 함께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포니를 만나러 가야 했다.
녀석에게 들어야 할 이야기가 너무 많았다.
♧ ♧ ♧
짠 하고 나타난 녀석은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다가 아! 하고 번뜩 생각난 듯 말했다.
[오늘이 그날이구나? 자! 청구서.]
포니가 내민 종이는 정말 덜도 말고 더도 말고 청구서 그 자체였다.
나는 덤덤하게 가격표를 확인하고 코인을 꺼내 값을 지불했다.
"잘했어. 생각한 것 이상으로 잘 해줬더라."
[만족하지?]
"응."
그때부터 포니가 자기 자랑을 시작했다.
워낙 잘난 채 하기를 좋아하는 녀석인지라 들어주고 있기가 따분했지만, 맡겼던 일을 잘 해냈으니 오늘은 봐주기로 했다.
녀석이 콧대를 세우는 걸 적당히 봐줬다 싶을 정도로 듣고 난 후, 나는 미션에 관한 얘기를 바로 꺼냈다.
"미션 해야지. 굳이 시간 오래 끌 필요 없이 당장 가자."
분유버프라는 게 있다.
분유+버프(Buff)가 합쳐진 말로, 스포츠 선수들이 자녀가 태어났을 때 분유 값을 벌기 위해 더 열심히 해 기량이 좋아지는 현상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현재 나는 분유 버프가 제대로 들어간 상태였다.
어서 미션을 깨고, 되찾은 아이와 행복하게 지내고 싶다.
누군가에게 빚지고 지내는 걸 썩 좋아하지 않기도 했고,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뒤로 미뤄두는 걸 좋아하지도 않았다.
[벌써 가겠다고?]
"너한테는 좋은 일 아니야? 내가 뒤로 미루는 것보단 훨씬."
[그거야 그렇긴 한데...네 아이를 이제야 겨우 만났는데 벌써 떠나는 건 너무 정 없지 않아?]
"그건 내가 알아서 할 일이니까 신경 꺼. 그래서 갈 거야 말 거야?"
[당장은 안돼, 입국 심사 절차라는 게 있다고.]
에이...!
포니의 말을 듣고 확 달아올랐던 열기가 훅 식어버린다.
"그럼 언제쯤 되는데."
[최대한 빠르게 해보면...한 달 정도?]
한 달이라...
그게 최소라면 어쩔 수 없지.
차라리 잘 됐다는 생각이 든다.
그 시간을 무의미하게 보낼 생각 없었다.
나도 나름 그쪽 세계에 대해 조사하고, 미리 대비를 해두면 되는 것 아니겠나?
"그럼 내가 갈 곳에 대해 정보 좀 부탁해도 되겠어?"
[그쪽 정보를?]
"왕의 아들로 간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정확히 알아야 할 것 같아서. 내가 거기 가면 모든 사람들이 날 왕의 아들로 생각하고 있게 한다는 건지, 아니면 몰랐던 출생의 비밀이다! 라면서 나타나야 하는 건지 말이야."
[꽤 예리한데? 후자야.]
"내가 당신 아들이다 하면서 나타나야 한다는 거구나. 친자 확인은 어떻게 하는데?"
[그쪽에 따로 방법이 있어. 마법사들이 친자확인을 할 거고, 너는 거기서 친자로 나올 거야.]
그 정도는 알아서 처리를 해준다나 보다.
"그럼 나는 무사히 왕자가 돼서 왕이 될 수 있다는 거구나."
[친자 확인만큼 확실한 마법은 없으니까.]
그렇다면 신분 문제는 걱정 하지 않아도 될 듯 싶었다.
"거기 정치 구도는 어때."
[그걸 내가 어떻게 알겠어? 나한테 얼마나 뜯어내려는 거야? 그 정도는 스스로 알아서 하지 그래?]
더 이상 정보 제공은 없다는 듯 포니가 선을 긋는다.
"그쪽 정보에 대해 아는 것도 결국 코인이겠지?"
[당연하지. 코인으로 안 되는 게 없다는 건, 코인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한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너무 냉정한 거 아니냐는 생각이 들긴 하는데, 우리 사이라면 이게 정상인 게 맞는 지라 투덜대는 것도 새삼스러운 일이었다.
"내가 미션을 무사히 성공하는 게 너한테도 좋은 거 아니야? 내가 미션 실패해서 코인도 못 갚고 돌아오면 어쩌려고?"
[.......]
"그러니까 협조 좀 하자? 거기 가서 바로 적응 할 수 있게 거기 세계관이랑 정치판 그리고 상식 같은 것들을 담은 자료 가져 와."
100만 코인이 걸려 있는 미션이다.
이 미션을 해내기 위해 19만 코인을 추가로 사용했고.
실패하면 안 되는 건 나 또한 마찬가지였기에, 포니에게 뜯어낼 수 있는 건 최대한 다 뜯어내야 했다.
[아오!! 귀찮게 하는데 뭐 있다니깐.]
포니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자료를 모아오겠다고 약속을 했다.
최대 일주일 안에 구해오라고 말을 해뒀기에 포니는 게으름도 부리지 못하고 자료 조사를 해와야 했다.
"와...공부할 거 많네."
분신체가 완벽히 본체를 대신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내 진짜 능력보다 훨씬 떨어진 능력을 갖고 있으며, 학습 능력 또한 없어서 이런 식으로 무언가를 공부하거나 배워야 할 때는 분신체가 아닌 본체로 행동을 해야 했다.
가족들과 데이트를 즐기는 용도가 아닌 다른 곳에 분신체를 쓰는 건 굉장히 비효율적인 일인 것이다.
'그래도 분신술 구매한 건 후회가 안 된다.'
이렇게 여러 가지 조건이 걸려서 사용하는 게 까다로움에도 불구하고 분신체의 존재는 내게 큰 이득을 줬다.
지금도 분신술을 구매하지 않았다면 되찾은 아이와 시간을 보내지 못했을 텐데, 분신체가 있는 덕분에 여유를 부릴 수가 있는 거였다.
'분신체로 스케줄도 뛸 수 있을까?'
한 달 동안 내가 해야 할 일들은 많다.
분신체로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 확인하는 것.
내가 이동 할 차원에 대한 정보를 암기할 것.
정치 외교에 대해 배워둘 것.
분신체 두 개 사용에 익숙해질 것 등이 있었다.
'고작 하나 더 늘었을 뿐인데, 엄청 정신 사납네.'
분신체 하나를 사용 할 때보다 적어도 한...두 배?
그 정도 더 어려운 것 같다.
그래서 적응 할 시간이 있는 게 다행이었다.
그리고 대여한 아이템 이외에 그곳에서 벌어지는 돌발 상황을 극복할 수 있도록 코인을 열심히 모왔다.
'급할 땐 코인이 답이니까.'
왕의 후계자가 되면 일단 귀족들과 친분을 쌓아서 지지 기반을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어디서 굴러 온 지도 모를, 그저 왕의 피를 이어 받았을 뿐인 남자를 귀족들이 쉽게 받아들이고 지지를 해 줄 리가 없었다.
'그때를 대비해서 코인을 쟁여두는 거지.'
생각보다 준비할 게 많았고, 한 달이 지나도록 그 준비는 끝나지 않았다.
그래도 약속했던 시간이 되었기에 가지 않을 순 없었다.
"가자."
[눈 감아. 갑자기 기운을 받아들여야 해서 엄청 어지러울 거야. 토하고 싶어지면 부디 구석에 하도록 하고.]
포니의 경고에 질끈 눈과 입술을 깨물고 심호흡을 했다.
세상이 반전되고, 나는 상점에서 구매한 아이템은 별 거 아니었다는 듯 상상 이상의 비현실을 맞이하게 되었다.
물론 곧바로 그 비현실을 눈에 담을 수 있었던 건 아니다.
이동하자마자 형용할 수 없는 어지러움과 속을 뒤집는 멀미에 몸이 휘청 거려서 쓰러질 뻔했다.
포니가 경고한 대로 참을 수 없는 구역질에 바닥을 바라보며 한동안 거친 숨을 토해냈다.
[------------]
[------]
내가 구역질을 참아내느라 정신이 없는 사이, 포니는 다른 존재와 대화를 나눴다.
그렇게 얼마나 대화를 나눴을까.
포니가 다시 내 곁으로 돌아와서 상태를 확인했다.
그때도 나는 주변이 빙글빙글 돌아서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숨만 헐떡이고 있었다.
[쯧쯧, 정신을 못 차리네. 걷지도 못하겠냐? 에휴, 어쩔 수 없지. 이번만 특별히 봐주는 거야. 열심히 일하러 가는 외국인 노동자인데, 이 정도 아량은 베풀어주는 게 맞지.]
저 새끼가 어지러워서 말풍선 못 본다고...
여전히 시야가 어지러웠지만, 그렇다고 포니 녀석의 말풍선을 못 보는 건 아니었다.
포니 녀석이 말한 것처럼 신체 능력이 꽤 뛰어난 몸이긴 했는지, 어지러움이 빠른 속도로 잦아들고 있었다.
다만 아직까지 정신을 못 차린 이유는 내가 느낀 어지러움이 그만큼 엄청났기 때문이었다.
[쓸데없이 반항하지 말고 순순히 따라와.]
흐린 시야 사이로 포니의 말풍선을 읽은 직후.
내 몸이 무언가의 힘에 의해 움직여졌다.
몸을 움직이자 다시 구역질이 올라왔다.
하지만 계속 그곳에 서 있을 순 없었기에 순순히 포니의 말을따르기로 했다.
그리고 주변의 소음이 잦아든 곳에 도착하자 의문의 힘은 나를 끌어 당기는 걸 멈췄다.
[여기서 쉬어.]
"후우..."
아무래도 포니가 나를 쉴 수 있는 공간으로 데려 온 모양이다.
덕분에 나는 다시 눈을 감고 몸이 정상으로 돌아올 때까지 시간을 보냈다.
드디어 흐려졌던 시야가 맑아지고.
나는 뒤늦게서야 낯선 비현실을 두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와..."
[후후, 놀랍지?]
포니는 날개를 파르르 떨면서 마치 이 공간이 자신의 것이기라도 한 것처럼 으스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