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708 - #96. 진해솔 (12)
왕과의 대화는 의외로 어렵지 않고 편안한 분위기에서 이어졌다.
왕은 나를 곤란하게 할 생각이 없었는지, 연회장에서 말했던 것처럼 내 과거 신상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묻지 않았다.
"앞으로 무얼하고 싶으냐?"
"전하 옆에서 그동안 나누지 못했던 해우를 즐기고 싶습니다."
왕은 과거보다는 미래를 더 관심 있게 생각하고 있었다.
"짐의 앞에 나서기까지 고생이 많았을 테지."
"무지렁이가 닿기에는 너무도 높고 빛나는 곳에 계시긴 했습니다."
실제로는 단숨에 이동해서 연회장으로 걸어 가는 것 뿐이었지만, 왕은 내 거짓말을 믿고 자신을 만나러 오기까지 고생했다고 생각했는지 안쓰러워 했다.
"네가 앞으로 배워야 할 게 많을 것이다. 그 과정이 지난 경험들 보다 쉬울 거란 소리도 못 해주겠구나."
"남들보다 떨어진다는 소리는 들어 본 적 없습니다."
"하하하! 그 자신감, 보기 좋구나!"
이제 왕족이 되었으니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를 묻는다거나, 앞으로 나에게 어떤 것들을 배우게 될지 그리고 그게 쉽지 않을 거라는 경고도 이어졌다.
그 뿐만 아니라 왕이 한이 맺혀 있는 부분도 여러 번 언급이 됐다.
"너는 내 아들이고, 그러니 반드시 왕이 되어야 한다. 이 왕국에 왕족의 핏줄을 유지하기 위해 네 역할이 매우 크다."
"전하의 앞에 나타나기 전, 그 부분은 이미 마음의 준비를 끝내 놓았습니다."
"기특하구나! 지금도 많은 왕족들이 대를 잇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다. 너 또한 노력에 소홀함을 없어야 할 게야."
왕이 나에게 가장 기대하고 바라는 것은 나라를 잘 다스리는지가 아니었다.
본인으로부터 이어진 유전자를 멀쩡하게 후대에 넘겨주는 것이었다.
내가 나라를 어떻게 다스릴지는 왕이 걱정하는 일이 아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렁이를 왕으로 만드는 게 걱정 되지는 않으십니까?"
"걱정? 전혀! 나라는 귀족들에게 맡기고 적당히 그들을 쥐고 흔들기만 하면 된다. 크게 어려울 것도 없는 일이야. 하지만 후대를 잇는 것은 오로지 너만이 가능한 일이다. 너의 건강한 몸 상태를 이은 후대의 왕족들이 내 나라의 역사를 이어갈 게다."
왕이 제일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후손 생산이다.
내가 만약 장애 없이 멀쩡하고 건강한 아이를 낳는다면 왕은 흔들리지 않고 내게 왕좌의 자리를 넘겨줄 것이 분명해 보였다.
"혹시 혼인을 이미 하였느냐?"
"하지 않았습니다. 제 핏줄이 어디서 나왔는지 아는데, 함부로 퍼트릴 순 없다 생각했습니다."
내가 한 말이지만, 역겨운 말이긴 하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이런 대답이 옳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래! 아주 잘했다. 이토록 처신을 잘 했다니...역시 내 아들이다!"
왕은 내 말에 함박 웃음을 지으며 좋아했다.
그러면서도 내게 아이가 없다는 사실을 아쉬워하기도 했다.
"한 편으로는 아쉽기도 하구나. 내 평생 손주를 보는 게 가장 큰 꿈이었으니 말이다. 물론 네가 밖에서 데려 온 아이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진 않겠지만, 적어도 평생 굶주리지 않고 살 정도의 보살핌을 내려 줄 수도 있었는데 말이다."
"...금방 원하시는 손주를 안겨드리겠습니다."
"암암! 하하하! 네가 이토록 어여쁘니, 나 또한 기쁨에 절로 웃음이 나오는구나. 하하하하!"
왕의 웃음소리가 바깥까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하지만 웃음도 잠시.
이어진 내 말에 왕의 표정이 굳었다.
"전하, 다만 저는 귀족들이 걱정 됩니다. 오늘 제 등장을 반갑게 여기시는 분이 없는 듯 했습니다."
"그들은 옹졸하며, 생각이 깊지 않고, 탐욕스럽다. 짐의 것을 탐하고, 빼앗거나 훔치고 싶어 눈알을 굴려대지."
왕이 생각하는 귀족들에 대한 평가가 굉장히 박했다.
"그런 자들이 왜 귀족인 겁니까? 전하의 것을 빼앗는 자는 모두 도둑이지 않습니까."
"짐은 가진 것이 매우 많다. 하늘 아래, 땅과 풍요로운 자원 그리고 백성들까지. 모든 것이 짐의 것이다. 아느냐?"
"예.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베푸는 것이다. 귀족들에게 그것을 베푼다면, 그들은 자신의 것인 줄 알고 최선을 다 해 베푼 것을 가꾸고 꾸민다."
"......."
귀족들이 가진 부 또한 왕의 것! 이라는 마음을 갖고 있다는 말에 절로 감탄이 나왔다.
'도대체 자존감이 얼마나 높으면...이 정도면 거의 자기를 신이라고 생각하는 거 아닌가?'
하늘 아래에 있는 것이 모두 자신의 것이라니....
"그렇게 꾸민들 결국 그들의 것은 모두 짐의 것. 시간이 흘러 베풀어 준 것이 영글었을 때, 다시 되찾아 오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귀족들은 바짝 허리를 숙이고 왕의 앞에 고개를 조아리게 될 거다. 그들이 가진 부와 명예 권력 모두 짐으로부터 나온 것임을 다시 깨닫게 되었을 테니 말이다."
"배운 것이 없어 모자른 소인이 전하의 지혜를 빌려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하하하! 앞으로 짐이 가르칠 것이 아주 많구나. 아침에는 짐의 곁에서 왕이 무엇인지 배우고, 밤에는 네 처소에서 왕의 핏줄을 생산하는데 노력을 하거라."
밤낮 가리지 않고 내 골수를 쪽쪽 뽑아 먹겠다는 왕의 선언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것 또한 영광이라는 듯 고개를 조아렸다.
적어도 왕은 죽을 때까지 흡족하게 웃으며 갈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사실이 아니지만, 왕의 핏줄이 끊어지지 않았다는 위안을 얻은 채 죽을 테니 말이다.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
이곳에 온 지 몇 시간도 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집이 그리워졌다.
지금 내 분신이 집에서 가족들과 희희낙락 놀고 있어서 더 그랬다.
♧ ♧ ♧
왕은 자신이 한 말을 지켰다.
정식으로 왕자가 된 나를 끌고 다니며 여러가지 다양한 지식과 지혜를 가르쳐주었다.
때때로 그의 높은 자존감이 주는 이질적인 모습들에 거북감이 들었지만, 반대로 그의 가르침에서 배울 점도 있었다.
오랫동안 지배자의 위치에서 살아 온 그의 모습을 반면교사 삼기도 하고, 진심으로 그의 지혜에 놀라기도 하면서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다.
이빨 빠진 호랑이인 줄 알았던 왕은, 자신이 말했던 것처럼 귀족을 능수능란하게 다루었다.
'귀족들은 대부분 왕한테 쩔쩔 매는 느낌이었지.'
여태까지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왕과 귀족들은 권력을 두고 서로를 견제하고 다투는 느낌이 있었다.
물론 그 중에는 충신도 있겠지만, 극적인 느낌을 주기 위해서라도 신하들은 대부분 그렇게 쓰였다.
그런데 진짜 왕과 신하들을 보니 영상 매체를 통해 접해왔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아니면 차원이 달라서 그런가?'
딱 한 나라를 본 것이니 이걸로 일원화 할 수는 없겠지만, 왕이 귀족들을 능숙하게 압박하고 귀족은 왕을 두려워하며 따르는 모습을 보니 신기했다.
'거기다가 조사 자료에도 시름시름 앓고 있는 왕이 귀족들한테 밀린 상태라고 했으니까.'
이 정도로 귀족들이 왕에게 힘을 못 쓴다면, 아무래도 계획을 바꿀 필요가 있어 보였다.
본래 나는 적당히 권력을 쥐고 있는 귀족 중 한 명을 이용해서 정치 싸움을 왕 vs 귀족이 아니라 귀족 vs 귀족의 싸움으로 몰아가려 했다.
그런데 지금 상황을 보니 왕은 건드릴 수 없는 위치에 있고, 그 아래에 왕의 총애를 받기 위해 노력하는 귀족 vs 귀족의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아니지. 좀 더 지켜보자. 겉으로는 귀족들끼리 싸우는 걸로 보여도, 내가 모르는 곳에선 왕한테 도전하는 귀족들이 있을 수 있어.'
내가 지금 해야 하는 일은 왕의 곁에 딱 달라붙어서 그의 비호 아래 야금야금 정치력을 키우는 것이었다.
왕도 내가 이런 행동을 보이는 것을 흡족해 하는 눈치였다.
갑작스러운 신분 상승에도 호들갑스럽게 굴지 않고 배움의 자세를 갖추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일 테니 말이다.
그리고 내 이러한 추측은 사실이었다.
귀족들은 내가 모르는 곳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모임을 가지며 현 상황을 놓고 회의를 하고 있었다.
"전하께서 정체 모를 그 자에 대한 신임이 매우 크십니다.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이대로 두면 정말 전하께서 왕위를 그 자에게 물려 줄 겁니다."
"...그 자의 내력은 여전히 오리무중입니까?"
"아...제가 찾아내긴 했습니다."
"찾았다고요? 근데 왜 말씀을 안 해주신 겁니까! 진작 알았으면 그걸 이용해서 압박을 했어야지요!"
왕자의 내력을 알아 왔다는 귀족이 주변 귀족들의 재촉에 떨떠름하게 말했다.
"사실 괜한 짓을 했다 후회했습니다."
"후회요?"
"예, 알아보니 별 게 없더이다."
"왜 별 게 없습니까? 별 게 있다는 건 제가 찾아 볼 테니 말씀이나 좀 해보세요. 도대체 뭐 하고 살던 무지렁이였답니까?"
귀족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자신이 조사해 온 내력을 다른 귀족들과 공유했다.
하지만 귀족의 말이 이어질수록 다른 귀족들의 표정도 씁쓸해졌다.
"어찌한다...어찌해야 할꼬..."
"하늘이 정말 우리 왕국을 버리신 겐가..."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기세가 예사롭지 않아 분명 뭔가 있는 놈이라 생각했거늘..."
왕자의 과거를 조사하고 나니 딱히 공격할 만한 거리가 없었다.
왕자는 산 속에 사는 사냥꾼으로, 일가 친척이나 가족 없이 홀로 어릴 적부터 산에서 살아왔다고 조사가 됐다.
주로 동식물을 사냥하거나 채집해 살아왔고, 그나마 사람을 보는 날은 달에 한 번.
마을에 내려와 식량과 필요 생활 도구를 사가는 것이 끝이었다고 한다.
"오히려 산 속에서 홀로 살았다는 게 수상한 거 아닙니까? 혼자 지내며 누구와 접촉했는지 아무도 모르는 거지 않습니까?"
"정확한 증거 없이 왕자를 압박할 순 없습니다."
적어도 지인이 있다면 그자를 매수해서 이야기를 만들어 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친하게 지내는 지인이 없었으며, 그나마 말을 섞는 것은 물건을 구매 하고 판매 할 때 만나는 상인이 전부였다.
"그 얼굴로 여자가 한 명도 없었다는 게 말이 됩니까? 분명 동네 처녀들이 왕자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으려 했을 텐데요?"
그러니 한 번이라도 연을 맺었던 여자가 있다면 그 여자를 매수해서 어떻게든 말을 맞춰 볼...!
"사냥꾼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평범한 시골 처녀들이 사냥꾼인 남자를 어찌 손을 대겠습니까?"
"아..!"
여기저기서 안타까움의 신음이 흘러나온다.
왕자는 순백 그 자체였다.
그래서 더 의심이 가지만, 증거 없이 심증으로 왕자가 의심스러우니 가까이 하지 말라 말한다면 왕에게 역으로 꼬투리를 잡힐 확률이 높았다.
"차라리 왕자에게 붙는 건 어떻습니까?"
"왕자에게?"
"만만치 않은 놈입니다. 현왕을 모시는 것과 다를 바 없어 질 텐데 왕자에게 붙으라니요!"
"이제 겨우 귀족들이 조금 숨을 쉬고 있지 않습니까? 왕자는 절대 왕이 되어선 안 됩니다. 그 총명함이 눈동자에 별처럼 박혀 있더이다!"
한 귀족이 그냥 왕자에게 붙자는 말을 하자 주변 귀족들이 여기저기서 반박이 튀어 나왔다.
아직까지 귀족들은 왕자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