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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역전 세계의 아이돌-709화 (699/849)

Chapter 709 - #96. 진해솔 (13)

물론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는 건 아니었다.

'왕자에게 붙는다라...제법 솔깃할지도.'

'딱히 방법도 없는데 왕자에게 붙는 게 그리 안 될 일인가?'

'가장 외로울 때 곁을 지켜주는 귀족이 내가 된다면 나쁠 것도 없지 않나.'

왕은 반드시 총애하는 귀족을 만들 수밖에 없다.

그리고 왕위를 물려 받게 될 왕자에겐 아직 총애를 줄 귀족이 없었다.

정치 기반이 약했고, 의심 가는 정황이 너무 많은 지라 선뜻 먼저 다가가는 귀족이 없었다.

그들이 갖고 있다가 허무하게 빼앗긴, 다음 대 왕위 결정권에 대한 미련이 귀족들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중이었다.

'왕의 태도를 보면 이미 대세는 기울었다.'

그리고 약삭빠르고, 눈치가 빠른 소수의 귀족들은 지금 이 순간이 그들에게 커다란 기회가 될 수 있음을 깨닫고 있었다.

'왕을 닮은 왕자...성격도 왕의 젊을 적을 보듯 했지.'

빼앗긴 권리에 아등바등하지 않고 정상적으로 왕자를 평가한다면, 솔직히 귀족은 썩 나쁘지 않은 왕으로 모실 수 있을 것 같았다.

거기다 지금 손을 뻗는다면 거의 개국공신 급의 총애를 받을 지도 몰랐다.

남들이 다 손을 내밀 때 자신의 손을 거기에 얹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남들이 손을 내밀지 않을 때.

바로 지금 이 순간이 가장 큰 효과를 볼 순간일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생각을 한 귀족들이 생각보다 많았다는 점이다.

'말로는 왕자와 척을 지겠다고 하지만, 속으로 딴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그중 행동력이 가장 빠른 귀족이 가장 처음으로 왕자에게 손을 내민 영광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 ♧ ♧

"커흠흠."

"왕자님께서 들어오시라고 하십니다."

"그래. 가자."

궁인의 허락을 받은 귀족, 바인 백작이 헛기침을 하며 뒷짐을 지고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이는 바인 백작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었다.

낮은 작위의 귀족도 아닌 무려 백작인 자신이 왕자에게 먼저 손을 내미는 상황이지 않은가?

무지렁이였던 왕자인지라 먼저 숙이고 들어간다는 게 쉽지 않았다.

때문에 바인 백작은 거만한 태도를 버리지 않고 왕자의 앞에 섰다.

아니, 서려고 했었다.

"어서 오세요."

"바, 방문객이 더 있으실 줄은 몰랐습니다."

하지만 바인 백작은 뒷짐을 지고 있던 손을 황급히 풀고 자세를 바로 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곁에 서 있는 세 명의 귀족들 얼굴을 알아봤기 때문이다.

'어째서 저 분이..?'

바인 백작은 당황하다가 일단 왕자에게 인사를 했다.

"왕자님, 너무 늦게 인사 올리는 거 아닌가 싶습니다. 바인 백작입니다."

"잘 오셨어요."

왕자는 이미 귀족들의 방문에 익숙한 듯 보였다.

바인 백작은 속으로 이를 바드득 갈았다.

'이놈들이... 그날 왕자 욕을 그렇게 해댔으면서!'

바인 백작도 나름 자존심을 구기며 최대한 빨리 움직인 거였다.

그런데 그가 생각한 것보다 귀족의 자존심을 내다 버린 것들이 많았던 것 같다.

'젠장!!'

개국 공신은 개뿔.

전부 망쳐버렸다.

시간을 너무 지체해서 이도 저도 아닌 상황에서 자존심을 굽힌 형편없는 귀족이 되어버린 것이다.

자신보다 지위가 훨씬 높은 세모론 공작이 왕자의 옆에 딱 달라붙어서 기세등등하게 콧대를 높이고 있었다.

'가장 세가 강한 귀족이면서, 가장 먼저 허리를 굽히다니!'

오히려 이런 모습을 갖고 있기에 가문의 세가 그만큼 강한 걸지도 모른다는 깨달음이 이어진다.

바인 백작은 앞으로 이런 일이 있으면 절대 망설이지 않겠노라 다짐한 채 왕자에게 가져 온 선물을 직접 내밀었다.

"아! 선물은 제게 주십시오."

그런데 정작 받는 사람이 왕자가 아니라 궁인이다.

바인 백작은 표정 관리에 힘 쓰며 마지못해 궁인에게 선물을 넘겼다.

"왕자님의 건강을 위해 준비한 선물입니다. 정력에 좋다 하니 꼭 복용하시고, 나라를 위해 힘써주십시오."

"고맙습니다, 백작."

궁인은 바인 백작의 선물을 들고 오래 걸어가지 않았다.

한 쪽에 쌓인 각종 보자기들 아래, 바인 백작의 선물이 놓여진다.

궁인이 굳이 자신의 선물을 아래에 깔았다는 건 저 선물을 준 이의 신분이 자신보다 높다는 걸 뜻했다.

'젠장, 공작 위를 받은 작자가 선물까지 가져와서 잘 보이려고 애를 썼을 줄이야.'

자신이 가져 온 선물은 공작이 준비한 선물과 비교해보면 수준이 아주 낮을 것이다.

물론 선물을 허투루 준비한 건 아니지만, 세모론 공작도 만만치 않은 사람이다 보니 아마 입이 떡 벌어질 만한 선물을 가져왔을 것이다.

'정말 모든 게 어중간해져 버렸어.'

기세 등등한 세모론 공작을 보니, 그가 굉장히 빠르게 왕자와 접촉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바인 백작은 왕자가 앞으로 왕이 될 확률이 매우 높아졌다는 걸 인정하기로 했다.

'귀족들이 줄을 섰으니 이제 왕자가 왕위를 이어받을 거다.'

그렇다면...

늦었다 싶은 지금도 썩 늦지 않은 상황일지도 몰랐다.

바인 백작은 처음이 되지 못했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금치 못하면서도 아직은 늦지 않았음을 자각하고 왕자의 옆에 착 달라 붙었다.

그리고 그런 귀족들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는 왕자는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는 순간 씨익 웃음을 지었다.

왕자는 귀족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똑똑했고, 멍청한 무지렁이가 아니었다.

귀족들이 왜 자신을 찾아왔는지.

바인 백작이 기껏 방문해 놓고 기분이 좋지 않은 이유가 뭔지.

다 알고 있었지만 왕자는 순진한 척 굴며 자신을 찾아 와준 귀족들을 모두 환대해주었다.

그런 행동 덕분에 귀족들은 아직 왕자가 순진해서 이용해 먹기 좋은 상태라고 생각했다.

'왕자는...역시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군.'

'아직은 순진해. 왕보다 더 가까워질 방법이 없을까.'

'딱 이 정도 수준에서 왕위를 물려 받았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차라리 왕께서 빨리 승하하시는 것도...'

왕에게 가르침을 받으면 달라지겠지만, 왕자는 정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상황이었다.

귀족들은 왕의 병세가 얼마나 깊어졌는지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귀족들이 다음 대 왕자를 자신의 것으로 삼고자 하는 탐욕을 부리기 시작한 것이다.

♧ ♧ ♧

쿨럭, 쿨럭!

"괜찮으세요?"

오늘도 어김없이 왕에게 가르침을 받고 있던 나는 갑자기 왕이 격하게 기침을 토해내는 것으로 그의 병세가 심상치 않음을 알 수 있었다.

"괜찮다. 늘 있는 일이야."

"...몸이 많이 안 좋으신 건가요?"

"늙었으니 어쩔 수 없는 자연의 순리다. 호들갑 떨 거 없어."

자신에게 모든 것을 물려주고자 하는 왕은 마음이 급했다.

남은 시간이 얼마 남았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기에.

왕은 하나라도 나에게 더 많은 것을 남겨주고 싶어 한 것이다.

"짐은 그저 너와 있을 시간이 조금이라도 더 길기를 바라는 게 유일한 소원이다. 더 이상 하고 싶은 것도, 바랄 것도 없으니 말이다."

하늘 아래 모든 것이 자신의 것이기에 무언가를 갖고 싶지도, 바라지도 않게 된 왕은 유일하게 바라왔던 후계가 만들어지자 만족스럽게 눈을 감을 수 있었다.

왕이 살아가며 할 일은 왕자에게 무사히 왕위를 계승하는 것 뿐.

왕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기 위해 필요한 마지막 조건은 본인의 죽음이기까지 했다.

그러니 왕은 죽음에 큰 감흥을 느끼지 않는 것이다.

"짐의 죽음이 너의 시작이 될 거다. 비로소 짐은...완전해지는 거다."

왕은 알 수 없는 말을 할 때가 많았다.

지금도 저렇게 이해하기 힘든 말을 하면서 나에게 기대감을 한껏 담은 시선을 보내온다.

죽는 것이 완전해지는 것이라는 황당한 말도 그냥 그러려니 넘겨버리기로 했다.

저 말에 뭐라 대답을 해야 할지도 막막해지지 않은가?

다행히 왕은 내게 답을 바라는 것 같지 않았다.

"이제 어느 정도 이곳에 적응을 한 것 같으니 하는 소리다만, 오늘 밤부터 왕국을 위해 일해줄 수 있겠느냐?"

밤부터 왕국을 위해 일하라는 건 여자와 잠을 자서 아이를 낳으라는 의미였다.

삼천 명의 후궁을 만들어야 하는 내 입장에선 거절 할 수 없는 기회이기도 했다.

부지런히 허리를 움직여야 한다.

나는 묘한 광기가 깃들어 있는 왕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예, 물론입니다."

"하하하하!! 그래. 첫 여자라는 말을 듣고 짐이 고심을 많이 했다. 부디 너도 마음에 들어 했으면 좋겠구나."

왕이 정해준 내 첫 여자는...

"안..녕하세요, 왕자님."

"어...?"

여긴 어쩐 일로 오셨느냐고 물으려던 순간.

이 여자가 왜 야심한 시간에 내가 머무는 궁에 왔는지 깨달았다.

여기까지 들어왔다는 건 궁인이 눈을 감아줬기에 가능한 일.

그리고 나는 지금 왕이 내게 짝 지어준 여자를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제가 생각하는 그게 맞습니까?"

"...네. 맞아요."

내가 이렇게 당황하는 이유는 이 여자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알고 있기에 그녀는 왕과 혼인을 한 후궁이었다.

물론 그녀의 나이는 많아봤자 스물 중반을 넘지 않을 수준.

늙어 죽어가는 왕의 후궁이 되어 행복하게 살아가진 못했을 것이다.

'늙은 왕의 후궁이 된 것도 서러운데, 이젠 왕자한테까지 이런 짓을 당한다?'

삼 천의 여자를 안기로 하고 이곳에 들어 온 나이지만, 이건 저 여자에게 너무 몹쓸 짓을 하는 거란 생각이 들었다.

"원치 않게 이곳에 오게 된 거라면 제가 전하께 말씀을 잘 해드리겠습니다. 아니, 그냥 했다 치는 것도 괜찮겠네요."

"아뇨! 전하께선 강요하지 않으셨어요. 그저 기회를 주신 겁니다. 저는 이제 고작 22살이에요. 벌써부터 신전에 들어가 살고 싶지 않습니다!"

왕이 죽으면 왕비와 후궁들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 자세히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런데 옛날 우리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이곳에서도 왕이 죽으면 후궁은 신전에 들어가 평생 그곳에서 수절하며 살아야 하나보다.

어쩐지 여기서 내가 더 거부를 하면 눈물을 보일 것 같은 그녀에게 말했다.

"본인의 선택이었다는 거죠?"

"네에. 왕께서 왕자님의 후궁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거에요."

자기 후궁을 아들에게 주는 아버지라...

'난잡하구만. 뭐 어쩌겠어. 이것도 아들에게 주는 아버지의 호의라 생각 해야지.'

아들한테 자기 여자를 보내는 왕의 행동이 전혀 이해 되지 않았지만 나도 여기에 오면서 도덕심을 버리고 온 상태였다.

간절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왕의 후궁의 손목을 잡아 챘다.

내가 여기서 그녀를 거부하는 건 세 사람 모두를 불행하게 만들 것이다.

"그런 거라면 들어와요."

나름 성의를 갖고 자신의 후궁을 보냈을 왕의 성의를 무시한 것이고, 후궁은 유일하게 신전으로 들어가지 않을 수 있는 기회를 잃는 것이며, 잘 보여야 하는 왕에게 미움을 살 수 있는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함이었다.

본인이 선택한 대로 그녀는 내 첫 번째 후궁이 될 것이다.

비록 삼천 명의 후궁이 더 생길 거라는 점에서 썩 좋은 배우자가 되진 못할 것이다.

자기 앞날을 모르는 후궁은 내게 손목이 잡히자 얼굴에 안도감과 기대감이 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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