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714 - #96. 진해솔 (18)
귀족들이 나한테 이미 수작을 부렸고, 그것에 이미 당해있는 상황이라는 걸 알게 되고.
이게 바로 귀족의 맛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진짜 대단하네.'
하루에도 여럿의 귀족들이 방문을 하기 때문에 누가 어떤 선물을 주는지 일일이 확인하는 건 불가능했다.
거기다가 금지 된 약물이라는 연금술사 약이 뭔지 알게 뭐란 말인가?
'그런 걸로 도움을 받을 만큼 정력이 부족하지도 않고.'
그나저나 여자의 생기를 빼앗아서 정력을 얻는다니...
확실히 이곳이 판타지 세계가 맞긴 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몬스터도 있다는데 언젠가 한 번쯤은 볼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왕은 이번 사건에서 나를 반대하는 귀족파를 싹 쓸어버릴 생각을 갖고 있다고 했다.
'왕이 꽤 자신 있어 하는 걸 보면 능력이 있는 건 맞는 것 같은데...'
사실 왕이 아니어도 내가 결백하다는 걸 증명하는 방법은 무척 쉬웠다.
연금술사 약을 복용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부족한 정력 때문이지 않나?
그러니 무리수를 둬서 약을 복용 할 이유가 없음을 증명한다면 내가 누명을 썼다는 걸 증명하게 되는 거였다.
하지만 왕은 굳이 그런 절차를 거칠 필요 없이 귀족들을 압박 할 수 있는 듯 했다.
'내 정력을 증명하겠다고 하는 것도 꼴 사나우니 그냥 지켜보고 있어야겠다.'
왕이 귀족들을 어떻게 다루는지 보는 것은 내게 도움이 되는 일이기도 했다.
그나저나.
"오늘 밤도 왔네."
"예?"
"아니, 들었거든. 왕자가 연금술사 약을 써서 정력이 대단한 거라고."
"말도 안 되는 누명이십니다!"
궁인이 내 말에 경악하며 내 편을 들었다.
내 곁에서 밤 생활을 가장 가까이에 지켜 본 궁인들이었기에 누구보다 그 일이 누명임을 잘 아는 사람들이기도 했다.
"하하! 맞아. 누명이지. 근데 소문이 원래 그런 거잖아? 한 사람이 누명을 씌우면 믿지 않아도 세 명 이상이 씌우면 사실이 되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희가 왕자님의 건실함을 증명해드리겠습니다!"
"맞습니다. 누구보다 왕자님 가까이에서 지켜 본 저희들만큼은 결코 의심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래서 왕들이 간신배라는 걸 알면서도 가까이에 두는 모양이다.
입에 바른 소리를 하는 걸 듣는 게 은근 나쁘지 않았다.
그가 이런 걸 한 번도 안 당해봤다면.
진짜 자신이 평민이었다가 아버지를 찾아 온 사람이었다면 궁인들의 매끄러운 입놀림에 홀딱 혼이 빠져나갔을 것이다.
스타병이라는 게 이런 사람들의 태도 변화 때문에 생기는 것인데, 평민이었다가 왕위를 이어 받을 왕자가 된 것이다 보니 주변에서 살살 녹아 내리는 말이 장난이 아니었다.
"하, 창피하네."
"부끄러워 하실 일이 아니십니다."
"오히려 널리 알려서 자랑을 하셔야지요."
"왕자님께서 허락해주신다면 저희들이 힘껏 알려보겠습니다."
궁인들은 마치 자신이 억울한 일을 당한 것 마냥 왕자의 억울함을 풀어주겠다며 적극적으로 나서겠다고 아우성들이다.
"아무튼 그래서 오늘 밤은 혼자 보내야 할 줄 알았거든. 그런 흉흉한 소문이 났으니까."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문에 흔들릴 리 없습니다. 왕자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를 입은 분들이 아니십니까?"
"아니, 그걸 말하려던 게 아니라 만약 모르고 온 사람이라면 너희가 넌지시 물어봐 줬으면 해서야. 혹시나 나중에 소문을 듣고 놀라면 어떡해."
"왕자님..."
결백하다는 걸 증명하기 전까지는 몸을 사리는 것도 나쁠 것 없는 일이었다.
요즘 너무 문란해져서 정신을 차릴 필요도 있었고 말이다.
괜히 나랑 몸 섞었다가 찝찝해 하면 나도 기분이 더러울 수 있었다.
'왕이 아직 내 몸에 약 기운이 남아 있을지 모르니까 당분간 몸을 사리라고 하기도 했고.'
이런 사정을 모르는 궁인은 내가 한 말에 감동을 받았는지 눈가를 붉히며 말했다.
"이토록 자비로우신 왕자님께 그런 누명을 씌우다니.."
"하하, 난 정말 괜찮으니까 어서 가서 슬쩍 물어보고 알려줘."
"...예, 알겠습니다."
궁인이 꽤나 비장한 얼굴로 방을 나섰다.
내가 시킨 일이 저렇게까지 비장한 얼굴로 할 일인가 싶긴 한데 그러려니 하기로 했다.
궁인이 나가고 얼마 후.
궁인은 매우 흡족한 미소를 띄운 채 나에게 다시 왔다.
"뭐래?"
"이미 알고 계신 일이고, 크게 상관하지 않아 온 거라고 하셨습니다."
"정말?"
생명력을 빼앗아 정력을 늘린다는 연금술사 약을 복용했다는 의심을 사고 있는 걸 알면서도 왔다고?
'내가 목숨을 걸 정도로 섹스를 잘했나?'
그러고 보면 가족들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한 번도 나와 섹스를 안 해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한 사람은 없을 거라고.
그만큼 나와의 섹스가 중독성이 높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이곳에서도 그 능력은 어김없이 발휘 되고 있는 듯했다.
연금술사 약에 당할 수 있다는 무서움도 잊고 여자들이 나를 찾아 오는 걸 보면 말이다.
"그럼 영애를 불러오겠습니다."
"그래."
궁인들이 침대를 정돈해주고 모두들 밖으로 물러났다.
그들이 사라지고 얼마 후, 내 방 안으로 익숙한 여인이 들어온다.
너무 많은 여자들을 안은 탓에 이름은 몰라도 얼굴 정도는 최선을 다 해 익히려 노력하는 중이다.
"왕자님!"
"어서 오세요."
자리에서 일어나 들어오는 영애를 반겼다.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환하게 미소를 짓더니 내 안부를 물어왔다.
"괜찮으세요, 왕자님?"
"그 소식 때문에 묻는 거에요?"
"네, 어쩌다가 그런 흉흉한 소문이 났는지...아버지께 여쭤봤지만 누가 그런 짓을 했는지는 말씀을 안 해주시더라고요. 아마 왕자님을 못 마땅하게 보는 귀족들이 누명을 씌운 걸 거에요."
아무래도 이 영애는 이번 사건과 전혀 연관이 없는 귀족 가문 출신인 모양이었다.
그러니 이렇게까지 당당하게 내게 말을 하는 걸 테고.
"전 괜찮습니다. 애초에 할 필요가 없는 일을 했다고 누명을 썼으니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알려주면 되는 일이니까요. 문제는 전하께서 굉장히 화가 나셨다는 겁니다."
"전하께서요?!"
영애가 왕을 언급하니 깜짝 놀란다.
"굉장히 진노하셨습니다. 저 때문에 괜한 피 바람이 부는 건 아닐지...걱정 되네요."
이 말을 굳이 영애에게 한 것은, 소문을 내기 위함이었다.
이 여자가 내가 한 말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건 100%다.
왕이 진노했다는 말을 듣게 되면 사태를 관망하고 있던 귀족들도 이젠 선택을 해야 할 때가 왔음을 알게 될 것이다.
영애도 생각보다 머리가 똑똑하게 잘 돌아가는 사람이었는지 내 말의 의미를 눈치 챈 듯 싶었다.
'어쩌면 일부러 내가 어떻게 하고 있는지 확인하려고 온 걸지도 모르겠는데?'
내가 귀족들을 유심히 살피는 것처럼, 귀족들도 나를 유심히 살피고 따져보는 중이다.
내가 누명을 쓴 것에 어떻게 대응을 하는지 확인을 하며 '왕'의 자질이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지금 보여주고 있는 태도는 귀족들에게 꽤 호감으로 다가 올 것이다.
'왕 위에 올라 설 생각이 없는 귀족들한테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무척 궁금할 거야.'
물론 내 궁을 방문해서 대화를 나누는 것도 나를 파악하는데 도움이 되긴 할 거다.
하지만 위기의 순간에 드러나는 모습이 진짜 그 사람의 가치를 드러내는 것 아니겠는가?
그런 점에서 나를 떠보려고 온 이 여자를 기억해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을 평가해야 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닌데, 가문에서 그 일을 맡긴 거잖아. 어느 정도 머리가 돌아가는 사람인 거지.'
더군다나 나를 싫어하지 않고 어느 정도 협력 할 의지를 가진 귀족 가문 쪽 사람이라면...
'내 편으로 만들어 놓는 게 앞으로를 위해서라도 좋겠지.'
나는 의미심장하게 말했던 것이 없던 일인 것 마냥 화제를 바꾸기로 했다.
"그래서 사실 오늘 제 방을 방문하는 영애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답니다."
"아...소문을 믿을 거라고 생각하신 거군요."
"연금술사 약. 자세히는 몰라도 끔찍한 약이더군요."
"맞아요. 그 약 때문에 수많은 여인들이 목숨을 잃어야 했죠. 금지 된 이후에는 그런 일이 생기지 않았지만, 아직 음지에서는 심심치 않게 연금술사 약이 유통 되고 있다고 해요."
"남의 생명을 빼앗아서 정력을 채운다니, 그런 쪽으로 부족함을 느껴본 적이 없다 보니 왜 그런 짓을 하나 이해가 안 가기도 하고요."
"어머..!"
내 말에 영애의 얼굴에 홍조가 띄워진다.
모르는 사람이야 허세라며 혀를 차겠지만, 나와 잠자리를 가져본 여자는 납득이 가능한 말이었다.
그리고 스스로가 한 말을 책임 지는 사람이라는 걸 그녀에게 증명해 보일 생각이다.
오늘 밤, 당장 말이다.
일단 나는 놀란 표정을 짓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저를 믿으니 이곳에 온 거겠지만, 조금도 찝찝하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죠. 제가 연금술사 약을 쓰지 않아도 되는 몸이라는 걸, 직접 증명하겠습니다."
내 말의 의미를 금세 깨달은 영애가 다시 한 번 얼굴을 붉힌다.
한 손은 그녀의 손을 잡고, 다른 손으로 그녀의 가녀린 허리를 휘감았다.
"앗!"
내가 살던 세계는 전형적인 남녀역전으로, 여성이 주로 사회 생활을 하고 남성이 집안에서 내조를 하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이곳은 우리 세계와 남녀 비율이 비슷함에도 불구하고 남성이 주로 가문을 잇는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여자들이 집안일을 하는 건 아니다.
온갖 궂은 일을 여자들이 전부 맡아서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문을 잇는 건 남자이고, 가문의 여자들은 가주의 명령에 따라 가문을 위해 살아간다.
'이 여자도 가문을 위해 일하러 온 거지.'
근데 일이라는 게 마냥 어렵고 힘들기만 하면 금방 번아웃이 오지 않겠는가?
즐길 수 있을 때 즐기는 게, 본인을 위해 좋은 법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 여인에게 즐겁게 일하는 방법을 알려 줄 의향이 매우 많았다.
'한 번도 못해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한 사람은 없을 거라고 했지.'
여태까지 이곳에서 진심을 다 해 섹스한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오늘은 진심을 살짝 꺼내야 할 것 같았다.
곱게 커서 그런지 피부는 하얗고, 상처 하나 난 곳이 없었다.
뽀얀 우윳빛 피부를 갖고 있는 여인은 적당히 통통한 살집을 갖고 있어서 저급하게 표현하자면 떡감이 좋은 몸이었다.
참고로 이 세계의 미인 기준은 마른 것을 빈곤하다 생각하여 싫어하고, 한 때 유행했던 '베이글녀' 형의 몸매를 미의 기준으로 삼고 있었다.
그러니 적당히 살집이 있는 영애는 미인이라 칭할 수 있는 수준인 것이다.
'내 눈에도 썩 나쁘지 않은 걸 보면 차원이 달라도 미의 기준은 비슷비슷한 것 같긴 해.'
물론 통통하다고 해서 모두가 미인 취급을 받는 건 아니다.
마르다고 다 미인 소리 듣는 게 아니듯 말이다.
그런 점에서 적당히 통통하고 얼굴이 예쁜 그녀는 내 마음에 쏙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