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716 - #96. 진해솔 (20)
"왕자에게 허무니 없는 누명을 씌운 연유가 무엇이냐."
태산 같이 묵직하게 쏟아지는 왕의 하문에 연금술사는 고개를 들지 못하고 덜덜 몸을 떨었다.
솨아아아ㅡ
하필 왕이 직접 친국을 하는 날.
하늘에는 구멍이 뚫린 것처럼 비가 쏟아졌다.
날은 춥고, 쏟아지는 비에 정신이 혼미해져 연금술사는 몸을 덜덜 떨었다.
조사는 형식적일 것이고, 잠깐 고생하는 대가로 엄청난 연구자금을 받아냈던 연금술사다.
그녀는 덜덜 떨면서 이를 바드득 갈았다.
과거에 선배님들이 귀족들과의 거래는 신중, 또 신중하게 해야 하며 될 수 있으면 하지 않는 게 좋다고 말했던 것을 떠올리고 있었다.
'개새끼들...!!'
약속을 지키지 않아도 너무 심하게 안 지키고 있지 않은가?
잠깐의 고생??
왕에게 직접 심문을 당하는 게 어떻게 잠깐의 고생이 될 수 있냔 말이다.
화가 나는 것은, 이미 거래를 했기 때문에 그녀가 왕에게 할 수 있는 말이 아무것도 없다는 점이다.
'말하면 머리가 터져 죽는다.'
돈을 많이 줬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연구비를 얻기 위해 눈이 뒤집힌 자신을 찾아왔을 때부터 지독한 함정에 걸린 거다.
몇 년 동안은 연구비 부족을 걱정 할 필요 없다는 점에서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알았어야 했다.
탐욕을 부린 대가가 너무 크다.
'나는 그냥 연구비를 구하고 싶었을 뿐인데...!'
왕자에게 유감은 없다.
하지만 눈앞에 놓인 이익은 유감이 전혀 없는 왕자를 모함하는 일에 한 몫을 할 만큼 매력적이었다.
"대답을 하지 못하는 건, 죄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미인가?"
"아, 아니옵니다."
"허면 왜 답을 하지 않는가! 죄인은 어서 답하라. 어째서 왕자에게 그런 누명을 씌웠는가!"
"누, 누명이라뇨. 그런 일 없습니다."
"왕자가 연금술사 약을 복용했다는 고발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 약을 제조한 연금술사로 네년이 지목 됐고."
"억울합니다, 전하! 저는 선량한 연금술사입니다. 왕국을 위해 연구에 힘쓰는 연금술사요!"
실제로 그녀는 연금술사 약을 제조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왕자에게 준 선물?
그것도 연금술사 약과는 무관한 선물이었다.
"하지 않은 일을 했다고 하시니, 억울합니다."
"허면 네가 왕자에게 준 연금술사 약은 어찌 설명할 것이냐."
"연금 술사 약은 제조하지도, 드린 적도 없습니다!"
"그럼 왜 귀족들이 자네를 범인으로 몰고 잡아 왔다고 생각하는가?"
"저, 저는 그냥 연구비를 벌기 위해 왕자님을 만나 뵌 겁니다. 그분의 후, 후원을 받는다면 조, 좀 더 원활한 연구 환경을 갖출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후원을 받고 싶어서 왕자궁에 방문을 했다?"
"예!!"
"그것 참 이상하군."
"예? 이, 이상...하다니요?"
왕이 벼락 같은 호통이 내려쳐졌다.
"이놈이 끝까지 거짓말을 하는구나!!"
"으히익!!!"
"너 같은 이가 어디 한 둘인 줄 아느냐!!! 짐이 아무나 왕자를 만날 수 있게 한 줄 아는가!!"
연구비를 못 따는 능력 없는 연금술사.
연줄이 없으니 연구비를 못 딴 것이고, 실력이 없으니 귀족이 붙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놈이 왕자궁에 약속을 잡아서 만남을 가졌다?
연금술사는 애초에 왕자를 만날 자격조차도 없었다.
그런데도 왕자를 만났다는 건 두 사람의 만남에 누군가의 개입이 있었다는 의미가 된다.
"너에게 왕자궁에 가라고 했던 놈이 누구냐."
왕이 버럭 소리를 지를 때도 천둥이 내려치는 것 같았지만, 낮은 목소리로 묵직하게 질문을 해올 때도 만만치 않게 두려움을 안겨주었다.
"흐윽...흑..."
연금술사가 울기 시작했으나 왕은 눈 하나 깜짝 하지 않았다.
"저 자가 진실을 고할 때까지 고문하라!"
"예! 전하."
"으아아아!! 아, 안 됩니다!! 살려주십시오! 살려주세요! 억울합니다!!! 저는, 저는!! 아아아!!!"
도대체 무슨 정신으로 그런 계약서에 싸인을 했단 말인가!
사실 일이 이렇게 된 것은, 연금술사가 무지렁이 출신 왕자를 무시했기 때문도 있었다.
귀족들이 반대하는 왕자.
금방이라도 죽을 듯이 연로하고 아픈 왕.
그리고 정정하게 세를 뻗치고 있는 귀족들.
셋 중 누구를 선택할지.
모르는 게 바보가 아닌가?
적어도 연금술사 입장에서는 그게 당연하고 옳은 선택이었다.
'말하면 머리가 터져 죽고, 말하지 않으면 왕에게 찢겨 죽을 거다.'
두 가지 선택 모두 죽는다는 결론밖에 남지 않는지라, 연금술사는 선뜻 결정을 할 수가 없었다.
최악과 차악을 선택하라면 차악을 선택하겠는데, 두 가지 선택 모두 최악이지 않은가?
살 수 있는 구멍이 보이지가 않았다.
연금술사는 억울함에 자신을 이렇게 만든 귀족을 찾으려 고개를 돌렸다.
솨아아아아ㅡ
쏟아지는 비를 맞고 있는 건 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왕이 굳이 궂은 날 심문을 하겠다고 말한 게 아니다.
다 이유가 있었다.
연금술사가 대표로 왕의 심문을 받고 있지만, 사실 빗속에 서 있는 다른 귀족들도 왕의 심문을 받고 있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들도 그걸 알기에 표정이 좋지 않았고, 빗속 아래에서 쉽사리 몸을 움직이는 이도 없었다.
꼼수를 써서 비를 피하는 행위를 하는 귀족도 없었다.
으아아아악!!!!!!! 아아아악!!!!!!!
본격적으로 고문을 받기 시작한 연금술사의 입에서 비명이 내질러졌다.
왕은 일그러지는 연금술사의 얼굴을 냉정하게 바라보며 시선을 옮겨 귀족들을 확인했다.
'낯짝도 두껍구나. 아닌 척 굴어도 짐의 눈을 피할 순 없는 법이거늘.'
귀족들 중에서 유난히 표정이 좋지 못한 무리를, 왕은 지긋이 바라보았다.
사실 왕은 이미 연금술사가 어떤 제약에 의해 범인에 대해 발설 할 수 없는 상태임을 인지하고 있었다.
'어림도 없지.'
귀족들이 수작을 부릴 때 주로 거래하는 방식이어서 금방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은 모르는 척 굴고 있었다.
이 심문은 연금술사에게 일을 시킨 진짜 배후를 찾아내기 위함이 아니었다.
귀족들도 그걸 모르지 않는다.
'왕이 선택한 왕자이거늘, 어디 감히 귀족들이 주제도 모르고 나댄단 말인가?'
궂은 비가 내리는 지금을 틈타.
귀족들에게 벌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감히 왕자에게 누명을 씌운 귀족들과, 아직도 왕자에게 충성을 맹세하지 않은 귀족들에 대한 분노를 담아서 말이다.
왕자가 그의 옆에 다소곳하게 앉아 고문을 당하는 연금술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왕자."
"예, 전하."
"보기 힘들지는 않으냐?"
고문하는 광경을 보는 게 즐거울 만큼 인격이 파탄 난 사람은 없었다.
특히 왕자는 이런 광경이 낯설 것이라 왕은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었다.
"배움의 자세로 지켜보고 있습니다."
"하하하! 옳다. 왕의 자리가 마냥 달기만 한 곳이 아니다. 혼을 내야 할 때는 호되게 혼을 내야 버릇이 잘 드는 법이야."
죄를 밝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처벌을 할 것인지 결정하는 게 더 중요하다며, 왕이 왕자를 다정한 목소리로 가르쳐주었다.
가뜩이나 몸이 약하고 귀하게 대접 받으며 살았을 귀족들이 아닌가.
폭우처럼 퍼붓는 빗속에서 벌을 서는 것이 험한 일 한 번 안 해본 귀족들 입장에선 꽤나 충격적인 처벌이 될 것이다.
왕을 거스르면 이렇게 된다는 걸 간접 체험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왕이 왕자에게 보여주는 귀족을 다루는 법이었다.
♧ ♧ ♧
왕이 범인을 심문하는 시간은 비가 그치고 나서도 계속 됐다.
그저 앉아 있는 것 만으로도 힘든데, 귀족들은 쏟아지는 비를 다 맞고 그것도 부족해서 그친 이후에도 찬 바람을 맞으며 벌을 서야 했다.
몇몇은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가,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난 신관에 의해 치료를 받고 다시 자리에 서야 했다.
어느 순간부터 왕은 죄인이 죄를 고할 시간조차도 주지 않고 있었다.
연금술사가 고문을 받다가 기절을 하면 왕은 깨어날 때까지 기다리겠다며 태연하게 식사를 하거나 나와 담소를 나누는 여유까지 보여주었다.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나 해가 저물고 밤이 됐다.
귀족들 태반이 혼이 쏙 빠져나간 채로 눈물까지 뚝뚝 흘리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배후가 누구인지 말을 안 하는 걸 보면, 진짜 범인이 아닌 거 아니야?'
죄인이 피치 못 할 사정으로 범인에 대해 말 할 수 없다는 걸 몰랐던 나는 저 사람이 진짜 범인이 아닌 거 아닌가 의심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왕은 연금술사가 범인인 게 확실하다고 생각한 건지, 아니면 죄가 없어도 귀족들을 고생 시킬 수 있으니 상관없다 생각한 건지.
잔뜩 지친 연금술사에게 어서 죄를 고하라며 같은 말을 주구장창 반복했다.
"전하."
나는 보다 못해 왕을 불렀다.
내가 아니고서는 왕을 막을 사람이 아무도 없어 보였다.
"음? 왜 그러느냐, 왕자."
타닥타닥-
"무리하시는 것 같아 걱정 됩니다. 벌써 몇 시간 째 찬 바람을 맞고 계십니다."
왕은 언제 죽을 지 모르는 병든 몸이다.
아무리 그의 곁에 난로가 있고, 몸에는 각종 모피로 둘둘 싸맸으며, 불어오는 바람을 막기 위해 궁인들이 바람막이를 들고 서 있다 해도
늙고 병든 몸으로 오랫동안 바깥에 있는 건 무리가 가는 일이었다.
"비가 그친 지 오래 되었습니다. 찬 기운이 전하의 몸을 파고들까 겁이 납니다."
"허어...왕자가 이리 효성이 깊어서야."
왕은 내 걱정이 기꺼운 듯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이것 참, 어쩔 수가 없구나."
내 말에 어쩔 수가 없다는 듯, 왕이 드디어 고문을 멈추고 죄인을 다시 감옥으로 끌고 가라고 명령했다.
'드디어!'
당연하지만 귀족들 사이에서 무언의 기쁨이 토해졌다.
곱게 자란 그들 입장에선 서 있는 것만으로도 죄인이 당한 고통과 비슷할 정도의 고통을 느끼고 있는 것이었다.
쓰러져도 왕은 귀족이 물러나는 걸 허락하지 않는 지독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는가?
"다음 친국은 하루 쉬고 이튿날 다시 열겠다. 오늘 참석한 귀족 모두 빠짐없이 다시 참석할 거라 믿고 있겠다."
오늘 일을 핑계로 병 때문에 참석을 하지 않으면 가만히 두고 보지 않겠노라는 서슬 퍼런 왕의 경고에 귀족들의 표정이 금세 창백해졌다.
아무래도 당분간은 신관이 귀족들의 집을 바쁘게 드나들어야 할 모양이다.
"가자꾸나. 오늘 고생했다."
왕이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해 서둘러 옆으로 다가가 그를 부축 했다.
아무리 몸이 차지 않도록 궁인들이 애를 썼다 해도 솔솔 들어오는 찬 바람을 완전히 막지 못했던 것 같다.
나에게 의지해 오는 왕의 무게가 유난이도 가벼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