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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역전 세계의 아이돌-717화 (707/849)

Chapter 717 - #96. 진해솔 (21)

왕자에게 죄를 뒤집어 씌운 자들에 대한 심문은 계속 됐다.

연금술사만 주구장창 고문을 하는 건 아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왕의 앞으로 불려와 고문을 당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늘어났다.

모두 내게 씌워진 누명에 얽혀 있는 사람들이었다.

귀족들에게 받은 선물을 관리하던 시종들을 불러와 수상한 자가 없는지 캐물었고, 근래에 씀씀이가 커진 시종을 발견해 그를 친국장에 세웠다.

그저 돈을 받고 물건 하나를 빼오는 일인 줄 알았던 시종은 순순히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을 실토했다.

물론.

"정작 도움이 되는 건 전혀 알지 못하는구나."

시종이 아는 것은 눈곱 만큼도 가치가 없는 것들이었다.

시종을 그렇게 탈탈 털어서 영혼까지 쏙 빼낸 왕은 못 마땅하다는 듯 다시 연금술사를 불러 그녀를 고신했다.

연금술사의 입이 열리지 않았기에 그 시간동안 귀족들이 다시 벌을 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귀족들도 왕의 일방적인 반격에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연금술사 약을 왕자에게 제공했다는 의혹을 사고 있는 죄인만 심문할 게 아니라 왕자도 조사를 해봐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기 시작한 것이다.

"왕자는 죄가 없다! 그대들은 무슨 생각으로 피해자를 조사하라는 소리를 하는가! 분명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게지!"

"전하!!! 충언을 가납하여주시옵소서!"

"왕자를 조사하셔야 하옵니다!!"

퍼붓는 빗속에서 한 번, 뙤약볕에서 여러 날을 서서 고문을 당한 귀족들의 눈빛에 독기가 서렸다.

왕은 귀족들의 반박을 어처구니 없다는 듯 내치다가 이내 못 이기는 척 말했다.

"짐이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 죄인이 지금까지 죄를 실토하지 않을 이유가 따로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더군."

왕의 말에 귀족들이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을 떠올렸다.

연금술사가 죄를 실토하지 않는 근본적인 이유.

귀족들을 혼내기 위해 왕이 모르는 척 하고 있었던 '계약'에 대해 드디어 말을 꺼내려는 것이다.

'드디어 끝나는구나.'

'생각보다 잃은 게 너무 많다.'

'젠장, 왕자 한 번 잘못 건드렸다가 내 몸이 갈렸구나!'

이미 계약이 된 것을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아무리 실력 좋은 마법사가 온다 해도 계약을 취소시키는 건 불가능한 일.

흉수를 찾아낼 유일한 열쇠인 연금술사에게 계약이 걸려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다는 건 친국을 끝내겠다는 의미였다.

"아무래도 죄인이 흉수와 계약을 한 게 틀림이 없다."

"전하의 혜안이 옳다 생각하옵니다."

귀족들이 냉큼 왕의 의견에 자신들의 뜻을 더했다.

죄인, 연금술사의 얼굴에 낭패가 서렸다.

지독한 고문을 당했음에도 차마 놓지 못했던 목숨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이다.

'탐욕 때문에 목숨을 잃는구나. 적어도 날 이렇게 만든 놈한테 복수는 하고 가야 하는데....!'

범인의 이름 한 글자라도 말을 하려는 순간, 그녀의 머리는 펑! 하고 터질 거다.

그러니 복수를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

이제 남은 것은 스스로 자결할지 말지였다.

왕이 얼마의 자비를 보여주는지에 따라, 연금술사는 자신의 끝을 결정하기로 했다.

"짐의 생각도 같다. 분명 죄인은 계약에 의해 말을 하지 못하는 게 틀림없을 터. 흉수의 이름을 언급하는 순간 머리가 터지겠지."

"전하, 위험한 자를 곁에 두지 마시옵소서!"

친국을 하느라 언제 머리가 터질지 모르는 자가 왕의 근처에 있는 상황이었다.

귀족들이 왕의 안위를 걱정하자 오랜만에 왕이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왕자도 짐의 몸이 걱정스러운지 잔소리가 늘었는데, 그대들도 잔소리가 제법 늘었구나."

"송구하옵니다."

"전하."

"그래, 왕자야."

"죄인의 실토를 하지 못하는 게 '계약'이라는 것 때문이라 하셨지요? 그럼 만약 그 계약이 무효가 된다면 흉수가 누구인지 알 수 있는 것입니까?"

왕자의 순진한 질문에 몇몇의 귀족들이 은밀하게 비웃음을 터트렸다.

왕이 뙤약볕에서 벌을 세워 기강이 세게 잡혔지만, 여전히 삐딱한 속마음을 버리지 못한 귀족들이 있었던 것이다.

"애석하게도 계약을 무효로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입을 열지 못하는 죄인은 쓸모가 없으니 참형으로 다스릴 뿐이지."

"송구하오나, 방법이 없진 않은 것 같습니다."

"...방법이 없진 않다?"

"예, 제가 가지고 있는 특별한 물건이 하나 있습니다. 이 물건의 쓰임새는 주변에 있는 저주를 흡수해서 대신 대가를 받아내는 물건입니다."

"저주를 흡수해서 대신 대가를 받아낸다?"

"아까 머리가 터진다고 했으니, 저 계약이라는 걸 흡수한다면 이 물건의 머리가 대신 터지겠지요."

여태까지 계약을 무효로 만드는 방법은 없었다.

해서 확실한 심증이 있는데도 증거를 잡지 못했던 적이 많았다.

사실 왕도 계약은 꽤 즐겨 사용하는 편이기도 했다.

보통 왕을 근접에서 호위하는 기사들에게 충성 계약서를 쓰게 하는데, 본인의 목숨보다 왕의 목숨을 더 중요시 여기도록 만드는 계약서였다.

그런데 그 절대 명제가 왕자의 손에서 무너졌다.

'과연, 신의 아들인가.'

순간 추악한 질투심이 치밀어 올랐지만, 꾹 눌러 참았다.

그가 왕의 아들이기도 하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젊었을 적 모습과 똑같이 닮은 아이를 두고 다른 생각을 할 수는 없었다.

"네가 가지고 있는 물건이 통할지 어디 한 번 해보자꾸나."

웅성웅성-

귀족들 사이에서 동요가 일기 시작했다.

왕자에게 계약을 무효화 시킬 수 있는 물건이 있다는 말을 믿을 수 없었던 귀족들이 외쳤다.

"전하! 사특한 물건일지도 모르옵니다! 절대 가까이 둬선 안 됩니다!"

"전하!!! 흑마법사가 왕자를 통해 수작을 부리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절대 그 물건을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유난히 심하게 거부감을 보내는 귀족들을 유심히 살핀 왕이 피식 웃었다.

신의 아들이 어찌 흑마법사와 어울리겠는가?

죄인의 눈빛도 꽤나 표독스러워진 상태였다.

계약으로 인한 제약이 풀리면 당장이라도 자신을 이렇게 만든 흉수를 실토할 기세였다.

왕은 귀족들의 아우성을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어 말렸다.

"시끄럽다! 시끄러워! 다들 닥쳐라!"

"저, 전하! 안 됩니다. 그런 짓을 해선 아니 되십니다!!!"

"누가 보면 짐이 무고한 자라도 죽이는 줄 알겠구나."

왕이 왕자에게 명령했다.

"그 물건이 어찌 생긴 것인지 봐야겠다. 당장 가져올 수 있겠느냐?"

"예, 가져오겠습니다."

왕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궁인들을 시킨들 찾지 못할 것이라며 직접 움직인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왕자는 다시 친국장으로 돌아왔다.

그의 손에는 앙증맞은 사람 인형이 들려 있는 채였다.

♧ ♧ ♧

솔직히 사람 고문 당하는 걸 며칠 내내 보는 게 편하지 않았다.

하루라도 빨리 이걸 끝내고 싶었는데, 생각보다 왕은 느긋하게 마음을 먹고 있었다.

'피 냄새 역겨워.'

살이 지져지는 냄새도 나고, 뼈가 부러지는 소리도 들었다.

고문 장면은 단순히 지켜보는 것 만으로도 사람을 지치게 만들었다.

뙤약볕에 서서 그걸 보고 있어야 하는 귀족들도 오죽하겠냐만은, 이건 정말 사람이 할 짓이 못 됐다.

그래서 이곳에서 주구장창 여인들을 안으며 모은 코인을 조금 썼다.

흔히 '계약'이라고 부르는 그것을 무효화 시키지는 못해도 대신 대가를 받아내는 것 쯤은 얼마든지 가능했던 것이다.

왕에게는 물건을 가져오겠다고 핑계를 대고, 상점에서 구매해서 가져온 척을 했다.

왕과 귀족들은 내가 어린애들이나 가지고 놀 법한 인형을 가져오자 어처구니 없다는 듯 비웃음을 보였다.

"전하, 왕자께서 터무니 없는 환상에 빠져 계시는 건 아닐지 걱정이 되옵니다."

귀족의 건방진 말에 왕이 말했다.

"지금은 밤이다."

"예?"

"그대에게 묻지. 지금은 낮인가 밤인가."

"......"

해가 멀쩡하게 떠 있는 상황에서 왕의 질문에 귀족은 말문이 턱 막혔다.

당연히 낮이라고 하는 게 옳다.

하지만 왕이 분명 질문하기 전 말했다.

지금은 밤이라고.

그렇다면 귀족은 뭐라 대답을 해야 할까?

"왜 대답이 없지? 짐의 하문이 그리도 우스운가?"

"그, 그, 그것이....그러니까..."

"다시 묻겠다. 지금이 낮인가, 밤인가."

"그...바, 밤이옵니다."

귀족이 결국 자존심을 접고 대답을 했다.

그 귀족은 주변을 살피며 다른 귀족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아무도 그와 시선을 마주치는 이가 없었다.

이미 대세는 왕에게로 기울었다.

'꼭 저런 사람이 있지.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갔을 텐데, 괜히 나섰다가 독박 쓰는 놈.'

저 사람은 내가 가져 온 물건을 비웃었지만, 이 인형의 효과를 보면 사색이 될 거다.

이 귀여운 인형 하나에 걸린 목이 몇 개인가?

적은 숫자의 귀족들이 끼어들어서 내 목을 날리려고 하진 않았을 것이다.

지금까지 많은 귀족들이 내게 붙었지만, 그 이상으로 내게 적대적인 귀족들이 여전히 많았다.

"어떻게 쓰면 되는지 알려주거라."

"사용 방법은 간단합니다. 그냥 저 사람 무릎 위에 올려두면 됩니다."

알아서 주변의 저주를 흡수하는 인형이다.

궁인이 나한테서 인형을 받아가 죄인의 무릎 위에 인형을 올려두었다.

며칠 내내 고문을 받느라 얼굴이 초췌해질 대로 초췌해진 연금술사는 자신의 무릎 위에 놓인 인형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제 남은 건 죄인의 선택 뿐이었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다면 복수를 하고 죽는 게 저 사람 입장에선 훨씬 나은 것이다.

그리고 죄인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잔뜩 갈라진 입술이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는...연구비가 필요했습니다. 이곳저곳 연구비를 구하기 위해 돌아 다녀 봤지만, 아무도 제 연구에 흥미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시녀가 저를 찾아왔습니다. 제 연구에 흥미가 있으며, 연구비를 대줄 의향이 있다고 말입니다."

귀족들의 안색이 점점 더 창백해지고 있었다.

연금술사가 무엇을 각오 했는지 모를 수가 없었다.

'저 인형이 효과를 보이면 좋고, 아니면 말고 식인가.'

이미 스스로의 목숨을 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연구비 후원을 해주는 대신, 한 가지 해줬으면 하는 게 있다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별 거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냥 왕자궁에 가서 적당한 선물을 하나 전해주고 나오면 되는 거라고요."

거부하기엔 너무 많은 돈이었다며 연금술사가 뚝뚝 눈물을 흘렸다.

"고작 왕자님을 찾아 뵙고 선물을 드리는 일이었습니다. 저는, 차마 거절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게 왕자님을 향한 흉수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왕국의 귀족이라는 자가 왕자님께 그런 흉악한 짓을 할 거라고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

연금술사는 그동안 고문을 당하며 억울했던 것을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를 바라보는 주변 사람들의 눈초리는 냉정하기 그지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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