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718 - #96. 진해솔 (22)
퍼어엉!!!!!!
그때, 펑! 하고 터지는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흐익!!!!!"
"허억!"
"악!!!!!"
"스, 습격이다!! 습격이야!!!"
귀족들은 놀라서 호들갑을 떨어댔으며, 왕의 호위기사들은 단숨에 왕과 왕자의 주변을 둘러 쌌다.
하지만 유일하게 나는 동요 없이 호들갑을 떠는 다른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애초에 이럴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괜찮습니다. 인형이 터진 겁니다."
노인네, 숨 넘어가겠네.
나는 화들짝 놀란 왕에게 갑자기 터지는 소리가 들린 이유를 빠르게 설명해주었다.
이대로 두면 정말 놀라서 숨이 꼴깍 넘어갈 수도 있겠다 싶었던 것이다.
"뭐라?"
"저주요. 저주를 대신 받은 인형이 터진 거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으하하하하!!!! 정말 살았어! 살았다고!!!"
아니나 다를까.
죄인이 홀로 웃음을 터트렸다.
"웨논 남작입니다!!! 웨논 남작이 제게 후원을 미끼로 왕자궁에 선물을 보내라고 한 흉수입니다!!"
"웨논 남작을 당장 잡아오라."
"예!!!"
왕의 기사들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왕은 동요하는 귀족들에게 엄중하게 말했다.
"흉수가 귀족으로 밝혀진 이상, 그대들 중 누구도 궁 밖으로 나갈 수 없다!"
"저, 전하!!"
"고작 남작이 꾸밀 수 있는 흉계가 아니지 않은가? 그러니 그대들 스스로 무고함을 증명해 내야 할 것이야."
왕의 말이 꽤나 의미심장하다.
굳이 오래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귀족들이 왕에게 '왕자는 무고함을 스스로 증명해 내야 합니다!' 라고 말했다는 것을.
왕이 그때의 말을 담아두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죄인이 미천하여 이리 큰 기회를 주셨음에도 진짜 흉수에 대해 아는 바가 없어 송구하옵니다. 제게 건네준 자금이 한 두 푼이 아니니 그 자금을 타고 올라가다 보면 분명 흉수의 정체를 알아낼 수 있을 겁니다."
연금술사는 그동안 말을 하지 못하던 게 한이 맺혔는지 자신이 아는 정보를 모조리 털어놓았다.
놀랍게도 그녀는 웨논 남작과 대화를 나눴던 것을 토씨 하나 바꾸지 않고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그 대화 속에서 많은 정보를 얻을 순 없었지만, 남작 본인이 흉수 그 자체는 아니라는 걸 알아낼 수는 있었다.
"분명 뒤에 더 대단한 누군가가 있다고 했습니다! 웨논 남작이 제게 자금을 건네 줄 때, 일을 잘 해주면 더 큰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거라고 현혹 했습니다."
궁인을 섭외했던 건 얼마든지 쉽게 가능했겠지만, 연금술사에게 돈을 대서 일을 시키는 건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일단 연금술사에게 후원을 할 수 있는 자격 자체가 '귀족'이라는 신분이 필요하다.
귀족이 어디 아무나 될 수 있는 것인가?
그런 점에서 웨논 남작은 연금술사를 끌어들이기 위해 너무 많은 정보를 흘렸다.
웅성웅성-
...아아!!...야!....놔...!!...새!!!
"웨논 남작이 도착한 듯 싶습니다."
어디서 돼지 멱 따는 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기사들에게 끌려오는 귀족이 나타났다.
얼마나 반항을 한 것인지, 의복과 머리가 엉망진창으로 헝클어져 있었다.
"이거 놔아!!!! 지금 내가 누구인지 알고 감히!! 으아아~!!! 다 죽여 버릴 테다!!! 이놈들!!!!"
"목소리가 우렁 찬 걸 보니 입은 트인 놈인 것 같구나. 아주 자알~ 뱉겠어."
왕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다.
그 미소에 진한 살기가 서려 있었다.
나만 그렇게 느낀 건 아니었는지, 귀족들 사이에서 두려움에 헐떡이는 소리가 들렸다.
여태까진 다른 사람이 고문 당하는 걸 봤지만, 곧 본인이 고문을 당하게 될 것임을 자각한 듯 싶었다.
"힉! 저, 저, 저, 전..하! 이, 이게 다 무, 무슨 일이옵니까! 전하께서 왜, 왜 저를 이곳에...?"
두려움에 말도 제대로 못하며 바들바들 떠는 귀족은 기사들에 의해 사지가 구속 된 채로 고문 의자에 앉혀졌다.
"사, 살려주십시오! 제, 제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고! 누, 누명입니다. 살려주십시오! 누가 저를...! 도, 돈을 내겠습니다. 보석금을 낼 수 있습니다!!!"
아직 무슨 죄를 지어서 끌려왔다고 알려주지도 않았는데, 찔리는 부분이 많았던 모양이다.
살려 달라고 울부짖고, 누명이라며 악부터 쓰고 있었다.
'저렇게 간이 작은 사람이 왜 그런 짓을 저질렀담.'
간이 작으면 작은 채로 주제에 맞게 살면 되는 거 아닌가?
분에 넘치는 욕심 때문에 저 사람은 오래 살지 못할 게 틀림없다.
"시끄럽구나. 돼지 소리 그만 내고 입 좀 닫아놔라. 시끄러워서 말을 못하겠다."
기사가 왕의 명령에 재빨리 움직였다.
웨논 남작은 악을 쓰다가 입안에 들어오는 의문의 천뭉치에 억! 하고 입을 닥쳤다.
불안함에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던 웨논 남작이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저놈은 손톱 하나만 빠져도 입고 있는 팬티까지 다 알려줄 것 같은데.'
왕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일단 조지라며 고문관에게 손짓을 날렸다.
치이이이익ㅡ!
"끄흐끄으으으으!!!!!!!"
보통 간부터 좀 보다가 지지는 걸 할 텐데, 고문관이 그런 절차도 귀찮다는 듯 냅다 불에 지진 철을 웨논 남작의 두툼한 허벅지에 가져다 댔다.
입을 막아도 귀를 아프게 만드는 비명 소리가 친국장에 울려 퍼졌다.
꽤액ㅡ 꽤액ㅡ!!!
그렇게 얼마나 불에 지져지고 고문을 당했을까.
비명을 지르느라 입가가 찢어졌는지 피와 침이 묻은 천이 빼내지고 드디어 왕이 웨논 남작에게 처음으로 질문을 했다.
"누가 네게 돈을 주며 연금술사를 매수하라 시켰느냐."
"흐윽, 흑...도, 돈이요?"
"그래. 네놈 주머니에서 연금술사를 매수 할 만한 돈이 나왔을 리 없을 것이다. 누가 시켰느냐?"
"아...아아...아닙니다. 제, 제 돈으로 하였습니다. 흑흑!"
눈물을 뚝뚝 흘리며 웨논 남작이 대답했다.
겉보기와 달리 꽤 기개 있는 놈이구나 싶다.
"제, 제 처가가 사, 상단을 운영하옵니다. 해서 도, 돈이 마, 많습니다. 흑흑흑!"
눈물 콧물 쏟아내며, 하는 말이 의외로 거짓말 같아 보이지도 않았다.
"허면 어째서 연금술사를 왕자궁에 보냈느냐?"
"여, 연금 술사는..귀, 귀중한 이, 인재라서...훌쩍, 왕자님께...좋은 인연이 될 것 같아...히이이익!!!"
"감히 짐의 앞에서 거짓말을 해?! 저놈이 정신이 들 때까지 쳐라!"
"예!!!"
"흐아아악!! 살려, 살려주세요! 전하!! 잘못했습니아아아아악!!!!"
치이이이익ㅡ!!!!
살이 불에 지져지고.
"끄아아아아아아!!!!!!"
발톱이 뽑히고.
촤아아악!!!!
"끄으...끄으으....살...살려..."
상처 난 곳에 얼음물이 쏟아졌다가, 뜨거운 물이 쏟아지는 등의 고문이 가해진다.
한 번 거짓말을 한 것 치고 꽤나 높은 강도의 고문이었다.
"저, 전하. 귀족을 이리 강하게 고문하시는 건 법도에 어긋나는...!"
"저 자가 왕자를 음해 하려한 흉수다! 이는 반역이나 다름없는 일!! 반역자를 심문하는 일에 누가 감히 토를 다는가!!"
"!!!"
이놈의 나라는 평민을 심문할 때와 귀족을 심문할 때조차도 차별을 두는 모양이었다.
거기다가 왕이 반역을 언급했다.
그 단어 앞에서 떨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바, 반역까지는..."
"아니라 할 수 있는가? 장차 왕자는 내 뒤를 이을 후계자다. 그런 왕자에게 누명을 씌우려 했다는 건 나라의 근간을 뒤흔드는 일!! 어찌 반역이 아니라 할 수 있겠나!"
"아직 왕자님은 정식으로 후계자가 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전하!"
"맞습니다. 왕자님은 아직...!"
이대로는 정말 왕자에게 후계를 홀랑 빼앗겨버릴 지도 모른다! 라고 생각하는 게 다 보였다.
다들 정신이 없긴 한가 보다.
무슨 생각을 하고 다니는지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게 진작 후계자를 정했어야지. 안 그래준 덕분에 참 쉽게 먹었으니 고맙다고 해야겠지?'
내가 이곳에 오기 전, 왕이 귀족들에게 후계자를 선택하라 했었던 적이 있지 않었다.
그때 서둘러 다음 후계자를 선택 했다면 지금 이 상황에서 할 말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귀족들은 욕심을 부렸고, '나'라는 예상 밖의 후계자가 나타났다.
"짐이 왕자를 후계로 생각하고 있다. 그것으로 부족한가?"
묵직하게 울려 퍼지는 왕의 음성에 귀족이 입을 조개처럼 다물었다.
귀족들은 여기서 말을 더 얹기도 뭐하고, 가만히 있기도 뭐했는지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여기서 웨논 남작이라는 작자의 목을 제일 따고 싶은 건 귀족들이 아닐까?
"사, 살려주십시오!!! 다, 다 말하겠습니다! 아아악! 아파아!!!!"
곱게 자란 귀족은 고문에 취약했다.
점점 더 심해지는 고문을 견디지 못한 웨논 남작이 다 말하겠다며 꽥꽥 소리를 쳤다.
내가 봐도 저건 사람이 견뎌낼 수 있는 수준의 고문이 아니었다.
"그만."
왕이 그 말을 듣고 고문을 멈췄다.
순식간에 얼굴이 반쪽이 된 귀족이 헉헉 거친 숨을 몰아 쉬며 뚝뚝 눈물을 흘렸다.
"이제 제대로 말을 할 결심이 섰는가?"
"예, 예에. 모, 모두 다 말하게씀니다. 제..흐흑...제가 아는 것 전부 다 말할 수 이씁니다. 제, 제게 연금술사를 매수하라 한 자는..."
웨논 남작이 질끈 두 눈을 감더니 흉수의 이름을 내뱉었다.
"오, 오드만 공, 그분 입니다!"
오드만 '공'.
흉수의 정체는 놀랍게도 귀족이 아닌 왕족이었다.
♧ ♧ ♧
오드만 '공'.
다음 후계자로 이름을 몇 번 올리긴 했으나 나이가 너무 많다는 점에서 반대하는 귀족들이 심심치 않게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 후계로 나쁘지 않은 인물임을 인정하는 귀족들이 많았다.
일단 왕과의 사이가 썩 나쁘지 않다는 점과 인물 자체가 악하지 않고 순하다는 점도 귀족들이 입맛에 맞게 다루기 편할 거란 평이 많았다.
유약한 성정을 갖고 있어 왕이 숙청하지 않고 내버려둔, 유일한 왕비 소생의 동생이기도 했다.
다른 왕족은 모두 후궁 출신으로 왕위에 위협이 되지 않는 수준의 동생들이었다.
나름 친한 동생으로 애착을 갖고 있었던 왕에게 동생의 배반은 충격과 동시에 진한 분노를 느끼게 했다.
"당...당장....당장 그놈을..윽!"
"전하!"
왕의 늙고 병든 몸은 흉수의 정체를 듣고 받은 충격을 이겨내지 못했다.
왕이 쓰러졌다!
다 끝났다는 생각에 질끈 눈을 감았던 귀족들에겐 희망이.
든든한 왕을 믿고 그의 등 뒤에 숨어 있던 왕자에겐 절망이 찾아오는 순간이었다.
적어도 귀족들에겐 그렇게 느껴졌으리라.
어찌 알았겠는가?
왕에게 지켜지고 있었던 왕자가 결코 순진하지도, 멍청하지도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오히려 왕자는 왕 때문에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이었다.
귀족들은 왕자가 말도 안 되는 귀물을 가져와 연금술사에게 걸린 '계약'을 풀어냈다는 것을 좀 더 주목했어야 했다.
♧ ♧ ♧
"몸은 좀 어떠십니까?"
왕이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 온 신관에게 상태를 물었다.
"심기가 많이 상하셨습니다."
늙은 노인네가 무리 할 때부터 알아봤다.
적당히 해도 될 일인데, 너무 열정적으로 귀족들을 몰아붙여서 저러다가 뒤로 넘어가는 거 아닌 가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걱정하던 일이 벌어진 것이다.
"절대 무리하셔서는 안 됩니다. 휴식을 취하셔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신관들과 치료사들이 나가고, 잠든 왕을 바라본 나는 괜스레 마음이 심란해졌다.
평생 가져보지 못한 아버지의 정을, 거짓말로 쌓아 온 관계에서 느끼게 될 줄은 몰랐다.
나한테 정을 주는 것도 결국 본인의 업적을 위해서가 아닌가?
진심으로 날 아들로 여기는 건 아닐 것이다.
'정말 아닌가...?'
시종일관 자신에게 잘 해주는 사람이었다 보니, 계속 냉정하게 구는 것도 힘들었다.
'곧 떠날 사람인데....'
정 주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가 정말 떠나고 혼자 이 세계에 남았을 때 마음 한 구석이 휑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