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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역전 세계의 아이돌-719화 (708/849)

Chapter 719 - #96. 진해솔 (23)

왕이 쓰러졌다.

마침내 노쇄한 거인의 몸이 무너진 것이다.

왕이 쓰러지자 왕궁은 기계 부품이 떨어져 나간 것 마냥 모든 일을 멈췄다.

왕자에게 누명을 씌우려 했던 자가 누구인지 알아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체포 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은밀하게 그에게 손을 대는 귀족들도 있을 정도였다.

'대세가 기울었다!!!'

끈 떨어진 연.

귀족들 모두 왕자가 무너질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버팀목을 잃은 왕자는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 여긴 것이다.

귀족들의 태세 전환은 놀랍게도 밤에도 영향이 갔다.

"왕자님..."

"응?"

"송구합니다. 오늘 방문하겠다고 하신 영애께서 피치 못할 사정으로 오지 못한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어차피 다른 약속도 다 깨질 텐데, 일일이 말해줄 필요 없어. 괜찮으니 가보렴."

궁인의 눈빛에 걱정과 동정심이 서려 있었다.

가족들에게 걱정은 받아봤어도 동정심 받는 입장이 되어 본 적은 없는 지라 당황스럽긴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궁인들 중에 배신을 하는 이는 없었다는 점이다.

이 세계 사람들은 유난히 '충성심'에 대한 가치를 높이 평가했는데, 궁인들도 나에게 충성심을 느끼고 그를 지키고 있는 듯 했다.

'어려울 때도 배신하지 않는 충성심이라...'

차라리 배신을 했으면 마음이 편했을 것이다.

굳이 그들을 책임질 필요가 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내가 어려울 때, 곁을 떠나지 않고 충성심을 보여준 궁인들은 이제 완전히 내 소관이 되어버린 상태였다.

'내가 죽으면 쟤들도 연좌제로 같이 죽게 될 거라는 뜻이지.'

그러니 저들을 책임져야만 했다.

이 세계에서 정을 주지 않으려고 노력했건만, 내가 모르는 사이에도 이렇게 차곡차곡 정이 쌓여가고 있었다.

'내가 정을 안 줘도 상대방이 정을 줘버리면 답이 없다는 걸 너무 늦게 알았어.'

궁인들은 자신의 목숨이 위태롭다는 걸 알면서도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는 내게 재촉을 한다 거나 답답해 하지 않았다.

그저 내가 어떤 행동을 하든 그것을 따를 준비가 되어 있는 듯했다.

'무섭네, 무서워.'

그들이 내게 주는 것들이 부담스러웠다.

귀족들이 내 궁을 찾아와 선물을 안겨줬을 때보다도, 궁인들이 주는 신뢰와 충성심이 내 어깨를 무겁게 만든 것이다.

'저들 사이에는 배신자도 있겠지.'

물론 모두가 나에게 충성을 하는 건 아니다.

저들 중에는 내 동태를 살피기 위해, 스파이 노릇을 하기 위해 버티고 있는 자들도 있었다.

내가 숨 죽이고 있는 이유도 그런 이들을 골라 내기 위함이고.

'어느 정도 다 골라낸 것 같은데.'

왕이 쓰러지자마자 그가 친국하던 사건이 흐지부지 마무리가 되었다.

연금술사는 언제 그랬는지도 모르게 목이 뎅강 잘려나갔고, 흉수에 대해 말한 웨논 남작은 죄 없는 왕족의 이름을 거짓으로 댄 것이라며 사건을 수습하더니 왕족모독죄를 받아 사형을 당했다.

돈이 많다고 했던 건 사실이었는지, 그의 가문과 친가 쪽 상단까지 모조리 찢기고, 뜯겨 귀족들의 아가리에 집어 넣어졌다.

흉수로 지목 된 오드만 공은 웨논 남작이 누명을 씌운 것으로 처리가 되었고, 오히려 억울함을 풀어야겠다며 왕궁에 쳐 들어오더니 자리를 잡고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왕궁에 자리를 잡고 버티다가 왕좌까지 넘보겠다는 의미였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동안, 나는 숨 죽이고 가만히 사태를 방관했다.

"원래 전쟁터에선 피아식별이 중요하니까."

가만히 당해주고만 있는 게 답답할 수 있으나 충분히 그럴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왕이 사라진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접근해오는 귀족들.

꾸준히 만남을 청해오다가 갑자기 뚝! 연을 끊은 귀족들.

차라리 도망치는 것이 어떠냐며 진심으로 내 안위를 걱정하는 귀족들.

왕이 쓰러진 이후, 각각의 사정을 가진 채로 다양한 행동을 해오는 귀족들을 구분할 시간이었다.

'쭉정이들은 버리고, 단 것만 빼먹는 기회충들도 내치고.'

그나마 진심으로 나에게 조언을 해주는 귀족들을 내 품에 안을 것이다.

그들이 나중에 권력을 장악하고 변한다 해도 상관없었다.

쭉정이와 기회충들에게 권력을 나눠주는 것보단 나을 테니 말이다.

"왕자님, 일어나셔야..어?"

아침이 밝았다.

궁인은 오늘도 내가 방에 쳐 박혀 있을까 걱정을 한 듯 한데.

"어, 언제 기침하셨습니까?"

이미 궁인이 들어오기 전, 깔끔하게 밖으로 나갈 준비를 끝내 놓았다.

"일찍 눈이 떠져서 부지런을 좀 떨었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는데..."

"내가 좀 조용히 움직이긴 했지."

아무리 그래도 씻고 준비하는데 아무런 소리가 안 들렸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지 궁인의 표정에 여전히 의아함이 가득하다.

이 궁인은 진심으로 나에게 충성을 다 하는 궁인이었기에 흐뭇하게 웃고 어깨에 손을 얹어 토닥여준 후 말했다.

"지금부터 1시간의 시간을 주마. 내 궁에서 일하는 모든 궁인들을 불러 모으거라."

"전부를요?"

"쉬는 자도 빠짐없이 전부 모아야 한다."

"...예, 예! 왕자님."

왜 그런 명령을 내리는지 궁금한 눈치였으나 주인의 명령에 의문을 표하는 행동을 할 궁인이 아니었다.

그저 시키는 대로, 명령 받은 바를 이행하는 게 그들의 일.

순순히 내 명령을 듣고 야무지게 일을 완수했다.

웅성웅성ㅡ

왕이 쓰러진 이후, 자기 궁에 박혀 있거나 왕의 궁에 가서 시간을 보내기만 하던 왕자가 칩거를 깨고 드디어 움직였음에 궁인들의 입이 요란하게 움직였다.

침묵을 금으로 생각하는 궁인들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왕자님 납시오!!"

웅성거리던 소리가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입을 꾹 다문 궁인들의 표정에는 긴장감이 맴돈다.

왕자가 어떻게 행동할지, 예측이 전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면 표정이 차분한 궁인들은 왕자가 어떠한 행동을 하든 그를 따르겠다는 생각을 가진 이들이었다.

왕자가 마침내 줄을 서서 모여 있는 궁인들의 앞에 섰다.

♧ ♧ ♧

옹기종이 모여 있는 궁인들의 숫자가 생각보다 많았다.

그래도 그동안 첩자를 잡아내겠다며 궁인들을 유심히 살피고 다녔던 보람은 있는지 얼굴을 아예 모르는 이는 없었다.

궁인들의 표정에 긴장감이 서려 있는 것으로 보아 내가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인지 아예 짐작도 못하고 있음이 보였다.

"전하께서 쓰러지시고, 한동안 경황이 없었구나. 모두들 소란스러운 궁 안에서 버티느라 고생이 많다."

스산한 피바람이 언제 몰아 닥칠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 궁인들은 그저 숨을 죽이고 고개를 숙인 채로 덜덜 떨고 있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전하가 깨어날 때까지 계속 기다릴 수 만은 없는 일. 전하의 빈자리를 부족하지만 내가 채워보려 한다."

"!!!!!"

"위험하실 터인데..."

궁인들 사이에서 걱정 섞인 속마음이 튀어나오고 있었다.

"나를 걱정해주는 이가 많다는 건 안다. 전하의 보호를 받지 못한 채로 나섰다가 당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전하께서 그동안 내게 가르침을 주셨던 것들이 헛되지 않았다는 걸 증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왕이 깨어날 때까지 하염 없이 기다리기만 하는 행동은 왕도 좋게 보지 않을 것이다.

궁인들은 걱정하면서도 내 선택이 옳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내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겠다고 선언한 것을 긍정적으로 보는 이도 있었다.

"하지만."

그리고, 이제부터 하려는 말이 궁인들을 모두 모은 이유였다.

"바깥 일을 시작하기 전, 내부부터 확실하게 정리를 하고 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더구나."

????

내 말에 순진하게 의문을 표하는 궁인들을 보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처음은 가볍게 시작했을 것이다. 마치 용돈 벌이 같은 걸로 말이야."

바늘 도둑이 소 도둑 되는 법이라는 걸, 궁인들은 몰랐을까?

"그러다 점점 요구사항이 집요해지고, 많은 걸 바랐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그들과 거래를 하며 얻었던 부수익의 달콤한 맛을 알았으니 그만둘 수가 없었을 거다. 나 또한 청탁을 적당히 눈 감아 주고 있기도 했으니 안일한 생각이 들었겠지."

!!!!!!!!

"이 정도는 괜찮겠지. 이 정도는 별 거 아니겠지. 이 정도쯤이야! 지금까지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으니까."

유난히 내 말에 과한 반응을 보이며, 사색이 된 궁인들과 시선을 마주했다.

그래, 내가 너의 부정을 알고 있다.

"그렇게 야금야금, 조금씩 조금씩 파고 들었을 것이다."

털썩ㅡ!

"사, 살려주십시오. 왕자님!!! 잘못했습니다!"

눈치 빠른 궁인 한 명이 가장 먼저 무릎을 꿇고 읍소했다.

확실히 저 자는 범상치 않은 수완을 가진 자다.

가장 먼저 죄를 고하면서 자신의 죄를 감면 받고 싶었던 게 분명하다.

한 명이 먼저 죄를 자진해서 고백하니, 찔리는 게 있는 다른 궁인들도 갈등하는 눈치였다.

"내 일거수일투족을 귀족들에게 팔면서 챙긴 것들이 제법 쏠쏠했겠지. 그것으로 맛있는 것, 귀한 것들 사면서 기뻤느냐?"

"죽을 죄를 지었나이다!!! 흐흐흑!!!!"

"궁인에게 탐욕은 죄악이라 가르친다 하던데, 그 가르침을 받고도 이와 같은 짓을 저질렀으니 누구에게 잘못의 책임을 떠넘긴단 말이냐?"

너희들을 유혹한 귀족의 잘못이라 할 건가?

유혹에 넘어간 본인의 죄가 명백한데?

"지금부터 호명하는 죄인들을 빠짐없이 끌고 가 감옥에 하옥하라. 그들의 죄는 추후에 결정하겠다."

"예!!!"

내 명령을 듣고 기사들이 움직인다.

혹시나 자신의 죄는 밝혀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던 궁인들은 곧이어 불려지는 자신의 이름을 듣고 눈물을 흘려댔다.

모시던 주인을 배신한 궁인의 최후는 꽤 끔찍하다.

궁 밖으로 내쳐지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말을 함부로 옮기지 못하도록 손가락과 혀를 절단 당한다.

평생 누군가와 혼인하여 '가문'을 만들 수 없으며, 만약 억울한 일을 당해도 법적으로 상대방의 죄를 물을 수가 없었다.

노예나 다름없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노예가 더 나을 수도 있다.

궁에서 쫓겨난 궁인은 누구도 고용을 해주지 않아서 먹고 사는 것조차 요원해지니 말이다.

그런 끔찍한 처벌을 알면서도, 궁인들은 눈앞의 이익에 대한 탐욕을 놓치지 못한 거다.

'대부분 감옥에서 자결하겠구나.'

자신의 미래를 모르지 않은 궁인들은 아마 감옥에 넣어두기만 해도 스스로 알아서 자결하게 될 것이다.

감옥에서 버틴다 해도 미래가 그보다 더 나을 것이란 희망이 조금도 없기에.

조금이라도 덜 고생한 지금 자결하는 게 낫다는 걸 모르는 이가 없었다.

"사, 살려주십시오!!! 잘못했습니다!! 왕자님!!! 왕자니이이임!!!!!!!!"

궁인들이 우르르 기사들에게 끌려가면서도 필사적으로 나에게 용서를 구한다.

나는 그들의 외침을 외면했다.

이미 용서할 수 있는 수준의 죄를 지은 궁인들은 이름을 부르지 않은 상태였다.

저들은 귀족들과 결탁해서 꽤 심각한 죄를 여러 차례 저지른 놈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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