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720 - #96. 진해솔 (24)
왕자 궁이 뒤집어졌다!!!
드디어 왕자가 웅크리고 있던 몸을 펴고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소식이 발 빠르게 소문으로 퍼져나갔다.
더불어 왕자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내부를 청소하는 일이었음도 귀족들의 귀에 들어갔다.
"아쉽군요. 내부 단속을 이렇게 빠르게 할 줄 몰랐는데 말입니다."
"꽤 얌전을 떨더니, 슬슬 움직이지 않으면 죽는다는 걸 알았나봅니다."
"그렇다고 해서 뭐 대단한 걸 할 수 있겠습니까? 결국 오드만 공이 자리를 차지할 겁니다."
귀족들 사이에서 후계자로 떠오르고 있는 왕족은 오드만 공이었다.
그가 몸소 움직여 왕자를 쳐내고, 그 자리에 오를 것이란 의지를 보였다는 게 중요했다.
오드만 공은 오래 전부터 귀족 친화적인 행동을 많이 보였었다.
자신이 왕위에 오를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본인의 이권을 귀족들에게 나눠줄 사람인 것이다.
"오드만 공이 후계자가 되어야 합니다."
"맞습니다. 그래야 합니다."
오드만 공, 그도 발 등에 불이 떨어진 상황이었다.
왕이 깨어나면 오드만은 반역죄를 물어야 한다.
그러니 왕이 깨어나기 전 왕자를 처리하고 왕도 병상에서 일어나지 않은 채로 죽어줘야만 했다.
"오드만 공도 그동안 많이 참은 걸로 보이더군요."
"하루 이틀 준비한 일은 아니겠지."
"혹...막내 왕자님의 죽음이...?"
"크흠, 그만! 괜한 추측은 하지 마시게."
"흠흠흠!"
귀족들이 꺼내봤자 좋지 않을 일임을 눈치채고 입을 다물었다.
왕자를 밀어내고, 왕좌를 차지 할 얼굴 마담이 필요했던 귀족들에게 오드만 공이 손을 내밀었기에 그들은 반드시 그를 왕으로 만들어야만 했다.
다소 나이가 많은 것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적어도 그는 왕처럼 병이 들지는 않았으니 말이다.
"왕자는 어떻게 처리하는 게 낫겠습니까?"
"오드만 공께서 왕자와 아직 한 번도 만나 본 적이 없다고 합니다. 왕자를 만나서 대화를 나눠 본 후 결정하겠다고 하십니다."
"왕자는 살아 있어봤자 거슬리기만 할 터인데..."
"지금은 오드만 공의 말을 들어주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그에게 받아낼 것이 많았던 귀족들은 오드만 공의 행동에 태클을 걸지 않기로 의견을 모았다.
얻어 먹을 게 많은 사람에게 잘 해주는 건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아무튼 우리는 왕자가 뭘 하고 있는지 살피는 일에 집중합시다."
"이번에 왕자가 내부 사람들을 쳐내는 바람에 감시하기 까다로워졌습니다."
"다시 사람을 들여보내야지요."
"기사 쪽을 손 대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왕자는 왕이 아니지요. 충성의 대상이 아닌 겁니다."
왕이 정상이었다면, 기사들에게 걸려 있는 '계약'을 왕자에게 넘겨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왕은 정신을 잃어 제대로 된 계승을 받지 못했다.
"...나쁘지 않은 방법이군요."
"그들도 다음 대 왕을 고를 수 있는 기회이지 않습니까? 왕자보다는 오드만 공이 왕실 어른으로 존경을 받고 있을 겁니다."
귀족들은 다시금 수작질을 부릴 좋은 대상을 얻었다.
기회를 잡은 귀족들이 또 다시 탐욕의 크기를 키우고 있는 사이.
다른 곳에서는 왕자와 오드만 공의 만남이 이뤄지고 있었다.
♧ ♧ ♧
"드디어 만나게 되는 구나."
"처음 뵙겠습니다. 오드만 공."
"어허이, 그리 정 없는 호칭을 쓰면 서운하지. 오드만 삼촌이라 부르거라. 조카님."
나를 죽이고 싶어 하는 사람의 눈을 하고서 하는 말이 꽤나 정겹다.
"형님께선 어쩌고 계시는지 아는가? 병을 이겨내고 일어나셔야 할 터인데..."
"여전히 호전을 보이고 있지 않으십니다."
"가망이 없다고 하던가?"
"쉬셔야 하는데, 무리를 하신 게 큰 탈이 났다고 합니다."
"저런...이를 어찌해야 할꼬..."
나와 달리 진짜 핏줄이 이어진 사이인데, 왕이 일어나지 못할 것 같다고 하니 좋아 죽으려고 한다.
물론 나름 연기를 열심히 하고 있기는 하다.
왕이 일어나지 못하는 것에 매우 슬퍼하고 고심하고 있는 '연기' 말이다.
하지만 연기로 밥 벌어 먹고 살던 내 앞에서는 소용이 없는 행동이었다.
그가 연기하고 있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고, 왕이 이대로 죽어버리기를 바라고 있음도 알았다.
"경황이 없어 나중에서야 알게 됐습니다. 죄인 웨논 남작이 오드만 공께 누명을 씌웠다고요."
"아아~ 그래그래. 그것 때문에 얼마나 당황했는지 모르네. 내가 조카님을 무슨 이유로 누명을 씌우겠나!"
"그렇습니까?"
"조사 결과가 그리 나오지 않았나? 애초에 나는 그 천박한 귀족을 개인적으로 만난 적이 한 번도 없네! 조사 결과까지 나왔거늘, 설마 아직도 이 삼촌을 오해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태연하게 자신의 죄를 넘긴 그가 눈을 빛내며 본론을 꺼내왔다.
"전하께서 쓰러진 탓에 경황이 없어 그런 생각도 못해봤습니다. 그저 조사 결과가 그렇게 나왔다고 하니 그러려니 하고 있습니다."
"그래, 조카님도 많이 놀라셨겠지. 경황이 없어 바깥도 잘 나오지 않았다고 들었네. 혹여나 조카님 건강이라도 상할까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는가? 이리 건강한 모습을 보니 그나마 마음이 놓이는구만."
마음이 놓이는 게 아니라 아쉬웠겠지.
"아마 지금도 형님이 걱정 돼서 제정신이 아니겠지. 바깥 일은 걱정하지 마시게. 형님이 깨어나실 때까지, 내가 형님 대신 조카님을 지켜줄 터이니."
조금의 신뢰도 가지 않는 소리였다.
날 어떻게 죽여야 할지 간을 보고 있는 게 훤히 보이는데 말이다.
"왕족은 궁에 오랫동안 머물 수 없다고 들었습니다."
"시국이 시국이지 않은가. 궁에 어른이 없으니, 간신들이 판을 치고 나라가 흔들리는 상황이네. 이럴 때 왕족인 내가 나서는 게 맞는 일이지. 암암."
오드만이라는 왕족을 만나서 저 사람을 치워야 하는 존재인지, 놔둬도 될 정도의 사람인지 가늠해보려고 했다.
"늙은 몸으로 고되긴 하겠다만, 내가 나서지 않으면 누가 나서겠느냐. 조카님은 걱정하지 말고 형님이 쾌차 하실 때까지 정성스레 효도를 하고 계시게나. 나라는 삼촌에게 맡기고 말이야."
그야 말로 욕심이 그득그득 담겨 있는 말이었다.
저 말을 듣는 내내 귀가 썩을 것 같아 곤욕스러웠다.
그리고 이 사람이 왕위에 대한 욕심을 가진 게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드라마에서나 본 건데, 정말 권력에 미쳐 있는 사람이 있구나.'
저 사람이 방금 한 말의 의미는 이거였다.
'얌전히 왕의 병수발을 들고 있으면 죽이지는 않겠다.' 라는.
하지만 그것도 유예 기간이 있을 것이다.
지금 당장 나를 죽이면 너무 티가 나니까, 적어도 왕이 죽기 전까지는 살려두겠다는 거다.
'눈이 맛이 갔어. 내버려두면 무슨 일이든 저지를 사람이야.'
권력에 미친 사람의 눈빛을 본 적 있는가?
사람의 눈빛에 살기가 서려 있다.
마치 나를 건드리면 가만히 두지 않겠다며 잔뜩 털을 곤두세우고 있는 사람으로 보였다.
여기서 겁을 먹은 척 하면서 그의 뜻에 따르겠다고 굴면 적어도 당분간은 움직이는 게 편해지긴 할 거다.
하지만.
'굳이 시간을 벌 필요 없어.'
나는 여기 정치를 하러 온 게 아니다.
내겐 삼천 후궁을 만들어야 하는 꽤 골치 아픈 일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정치를 아예 안 할 수는 없었다.
정치적 상황 때문에 여자들이 내 궁에 발길을 뚝 끊지 않았는가?
왕이 되어야 이곳에서 만난 여자들을 후궁으로 만들 수 있는 거고.
'왕위에 관심 없어서 얼마든지 넘겨 줄 의향이 있긴 한데, 내가 미션을 다 끝내 놓으면 이미 골골 거리고 죽을 날을 받아뒀을 거야.'
결국 저 사람한테는 안 된 일이지만, 왕위에 오를 수 일은 없을 것이다.
나만 아니었다면 왕이 됐을 수도 있을 운명인데 말이다.
"그건 안 될 것 같습니다."
"뭐?"
형님의 자리를 대신하겠다며 왕궁에 엉덩이를 눌러 앉을 생각이 만만하던 그의 계획을 내쳐버리는 말을 했다.
"전하께서 나라를 맡긴 건 오드만 공이 아니라 저니까요."
"하! 네 나이가 고작 스물인데, 나라를 다스리겠다? 예끼! 말도 안 되는 소리. 욕심이 나는 건 알겠다만 이번 건은 어른 말을 듣는 게 맞다."
"물론 전하에 비하면 부족하겠지요. 하지만 언제까지 부족하다는 이유로 피할 순 없지 않겠습니까? 전하께서도 제가 빈자리를 채운다면 흐뭇해 하실 겁니다."
"왕위가 얼마나 무거운 자리인지 모르는, 어린아이 같은 망상이구나! 귀족들은 결코 조카님에게 협조하지 않을 걸세!"
자기가 어떻게든 귀족들을 움직여서 내게 협조하지 않게 하겠다는 말이었다.
"다행이도 전하께 귀족들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네놈한테 협조하고 있는 귀족들을 스스로 감당하겠다는 선언.
내 당돌한 말에 오드만 공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사람 좋은 척 하던 얼굴이 드디어 벗겨진 것이다.
그는 더 이상 얌전한 척 욕망을 숨길 생각이 없었는지 스산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카님, 권력도 살아야 누릴 수 있는 겁니다."
이야, 대사가 기가 막히시네.
나중에 사극에 출연하면 작가님한테 저 대사를 추천해야겠다.
나는 눈 하나 깜짝 하지 않고 웃으면서 대답했다.
"이미 한 번 실패하셨는데 또 한들 성공하겠습니까? 더군다나 어설프게 사람을 썼다가 당할 뻔 하지 않으셨습니까? 자중하세요. 가뜩이나 병환이 깊은 전하께 좋지 못한 소리를 전하고 싶지 않습니다."
가령 동생이 형보다 먼저 세상을 떴다는 식의 슬픈 이야기 같은 거 말이다.
"너....이놈...형님 앞에서 순진한 척 굴고 있었구나. 진짜 얼굴을 숨기고 있었어!"
"숨긴 게 아닙니다. 사람이 다르니 대하는 태도도 달라지는 거죠. 누가 봐도 저를 죽이고 싶어 안달이 나셨는데, 좋게 웃으면서 대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곱게 자란 사람이 늘그막에 고생 좀 하시겠다.
평생 곱게 살았다는 게 느껴지는 사람이던데, 그 고생을 어떻게 견디려고 저러는 걸까?
'왕이 깨어나면 물어봐야겠다.'
지 동생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이건 나를 위해 노력해준 왕에 대한 처음이자 마지막 효도가 될 것이다.
물론 나를 죽이려고 든다면...
'왕이 살아 있을 때까지만 참아줘야지.'
죽은 사람에게까지 효도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왕은 기사들이 지키고 있으니 아직 안전해.'
생명이 얼마 남지 않은 왕.
단순히 잠들어 있는 게 아니라 부족한 체력을 회복하고 있는 거였다.
'왕이 깨어날 때는 꼭 필요한 순간이어야 해.'
정말 필요한 순간.
즉, 나를 반대하는 귀족들을 몰아 놓고, 일망타진 할 수 있을 때 왕을 깨울 생각이었다.
깨어난 그가 깔끔하게 마무리를 해주고, 나를 왕위에 올려놓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