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721 - #96. 진해솔 (25)
대화가 예상과 다르게 흘러간 채로 끝이 났다.
오드만 공은 나를 궁에 유폐 시키기는커녕, 적극적으로 정치에 관여하겠다는 선전포고만 듣게 된 것이다.
거기다가 어린놈한테 욕을 드셨으니 여간 분한 게 아닐 것이다.
"암살자 같은 거라도 보내려나."
내가 만만치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 오드만 공은 발 등에 불이 떨어진 것 마냥 급해졌지만, 나는 여유가 있는 상태였다.
‘부들부들 떨면서도 끝까지 물어볼 건 물어보고 갔다는 점에서 노인네가 독하긴 하단 생각이 들었으니까.’
내가 여유를 부리고 있다고 해서 오드만, 그 작자를 무시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만나기 전보다 지금이 훨씬 더 경계하고 있다.
속에 뱀 몇 마리가 꽈리를 트고 있는 사람이었다.
‘귀족들은 왕이 쓰러진 것 때문에 잊어버린 것 같았는데, 오드만 그 노인네는 어디서 그걸 듣고 와서 나한테 캐물었단 말이지.’
내가 상점에서 구매했던 '저주 받이 인형'.
연금술사가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가 되어 저주 받이 인형의 존재감이 많이 흐려졌었다.
귀족들은 그때의 일을 없었던 일로 만들고 싶은 듯했다.
아마 계약을 통해 장난질을 많이 쳐 놔서 그랬을 것이다.
‘어떻게든 없던 일로 만들고 싶어서 외면하는 느낌이랄까.’
그런데 유일하게 그걸 외면하지 않은 게 오드만 공이었다.
오히려 내 당돌한 말에 화가 머리끝까지 났음에도 인형에 대해 꿋꿋하게 물어왔다.
'그 인형은 누구에게 얻어 온 것이냐?'
'정말 부작용 없이 계약을 무효화 시킨 게 사실이냐?'
'그 인형을 더 구할 방법은 없느냐?'
각종 질문을 쏟아냈지만, 정확하게 대답을 해준 것은 없었다.
상점에서 구매하는 아이템은 이 세계 사람들 사이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비밀 병기였다.
함부로 아이템을 이 세상에 풀어서도, 그에 대한 정보를 줘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이미 적대하기로 마음을 먹을 상태에서 친절하게 그 질문에 대답을 해줄 이유가 없지 않은가?
최대한 정보를 숨기고 저쪽에서 알아서 상상할 수 있도록 할 필요가 있었다.
'구하려 한다면 못 구할 것도 없겠죠.'
내가 유일하게 대답해준 말이 바로 저거였다.
그때, 오드만 공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아마 인형에 대한 정보를 빼앗고 싶지 않았을까?
'계약이라는 것으로 장난질 친 귀족이 한둘이 아닌 걸로 보였단 말이지. 그럼 나도 이걸 이용할 수 있는 거 아닌가?'
다만 오드만 공은 빼앗을 생각만 했지, 내가 그것을 어떻게 이용할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한 듯했다.
아이템에 대한 정보를 숨겨야 하지만, 당장 아이템이 필요해지는 상황이 오면 개인의 이득을 위해 얼마든지 이용할 생각을 갖고 있는 나였다.
“왕자님, 괜찮으십니까?”
오드만 공과 대화를 나누고 내 궁에 돌아오자 궁인들이 안절부절못하며 내 안위를 걱정했다.
"전쟁터에 나간 게 아니라 삼촌을 뵙고 오는 길이다. 과하게 걱정하는구나."
"어휴,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릅니다. 오드만 공이 저번 일의 흉수라는 게 밝혀지지 않았습니까? 전하께서도 그 일로 충격을 받으시고 쓰러지신 건데..."
"그 일은 무혐의로 조사가 끝났잖아."
"제대로 조사 안 했을 겁니다. 아휴...우리 왕자님, 이리 순하셔서 어찌하시려고...왕자님과 오드만 공이 만났다는 얘기가 궁에 쫙 퍼졌습니다. 귀족들 사주를 받은 궁인들이 어찌나 기웃거리던지. 그치들에게 소금을 왕창 뿌려버렸습니다."
내가 오드만 공을 상대하는 사이.
내 궁인들도 가만히 있었던 건 아닌 모양이다.
자기네들이 부지런히 돌아다니면서 긁어모은 정보들을 내게 재잘재잘 떠들었다.
"그 짧은 사이에 꽤 많은 걸 알아 왔구나."
"헤헤, 이 정도는 별 거 아닙니다."
"맞습니다. 궁인들의 덕목이 눈과 귀를 닫아야 하지만 주인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눈을 뜨고, 귀를 쫑긋 세워야 하는 법이 아니겠습니까?"
주인이 죽으라면 죽어야 하는 게 궁인의 운명.
주인을 위해서라면 못 할 것이 없었다.
그리고 그건 귀족들의 사주를 받은 궁인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오히려 그쪽은 자신이 뭔가를 해내야 손에 쥘 수 있는 게 생기기 때문에 더 필사적 일 수밖에 없었다.
궁인들이 궁 안의 정보를 물어다 주는 것이 의외로 쓸모가 있을 것 같았기에 그걸 이용해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오드만 공이랑 대화는 별로 안 좋게 끝났어. 애초에 협상이 불가능한 사람이었고."
"그자가 왕자님께 험한 소리를 했습니까?"
"웃으면서 협박을 잘하긴 하더라."
으득-!!
"전하 앞에서는 그리도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던 자가...!"
궁인들이 그럴 줄 알았다며 주먹을 쥐고 분노했다.
꽤 앙증맞은 분노였다.
'생긴 것도 은근히 귀엽네?'
새삼 내 궁인들이 귀엽게 생긴 여인들이라는 게 눈에 들어왔다.
아무래도 며칠간 여자들을 안지 못해 생긴 부작용인 듯싶었다.
하루가 멀다고 문란하게 놀다가 그걸 뚝! 끊었으니 후유증이 안 남을 수가 없는 거다.
꿀꺽ㅡ!
괜스레 입이 말라 침을 삼키고 말했다.
"내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면 사태를 방관하고 있던 귀족들도 움직이기 시작할 거야. 그렇게 내 편을 만들어서 다른 귀족들을 압박해야지.”
"왕자님을 믿어요! 분명 멋지게 해내실 거예요!"
귀엽기는.
“이럴 때 도움을 드려야 하는데…. 할 줄 아는 것이 없어서 도움이 되지 못해 송구합니다.”
“그대들은 내 곁에서 우직하게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제 할 일을 다 하고 있어. 그러니 자책하지 말라고. 그 부분은 내가 감당해야 하는 일이야.”
자신들이 영 도움이 되지 못한다며 분해하는 모습이 상당히 귀여웠다.
더 실망하기 전에 다른 부분에서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걸 알려주기로 했다.
“그리고 그대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거든.”
“정말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까?”
"알려주세요!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알다시피 아직 내가 왕궁을 장악하지 못했잖아. 사방에 깔린 궁인들이 제각기 다른 귀족들의 눈과 귀가 되어주고 있고.”
“고것들은 반드시 죗값을 받을 거에요! 나쁜 놈들!”
궁인이라는 존재가 무엇인가?
왕족을 모시기 위해, 왕의 손발이 되어 궂은일을 대신 하기 위해 존재하는 이들이다.
그런데 존재 목적을 잊고 귀족들의 눈과 귀가 되어주고 있었다.
이는 명백히 범죄!
반드시 후회하도록 만들어야 한다며 궁인들이 재잘재잘 아기 새처럼 떠들었다.
“그래, 내가 나중에 왕이 된다면 그렇게 되겠지. 다만 지금은 그들과 친하게 지내줬으면 해.”
“어찌 그런 역겨운 자들과 친분을 쌓으라 하십니까?”
“그자들이 무얼 듣고 무얼 알리는지 알아내야 하기 때문이지. 내가 궁을 싹 청소한 탓에 정보에 목이 말라 있을 거야. 그대들이 먼저 접근할 필요도 없이 그들이 접근하려고 할 거고.”
내 말을 듣고서야 궁인들은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깨달은 눈치였다.
“그들과 친분을 쌓으면 나중에 이용도 할 수 있겠지.”
“거짓 정보를 흘릴 수도 있겠군요.”
거 봐라.
내가 말해주지 않아도 알아서 자기 할 일을 알잘딱 하게 생각하고 있다.
이건 능력이 없는 게 아니라, 그저 능동적으로 무언가 일을 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맞아, 그러니 적당히 친분을 쌓을 수 있을 정도의 정보는 빼내도록 해. 그렇게 조금씩 친분을 쌓다가 중요할 때 그자들을 써먹는 거야. 아! 그리고 그놈들이 주는 것들은 마다하지 말고 받도록 하고. 어때? 할 수 있겠어?”
“그자들이 주는 건 받고 싶지 않지만, 왕자님께서 받으라 하시니 그리하겠습니다. 놈들의 뒤통수를 치는 것인데 마다할 이유도 없고요.”
“저도 해보겠습니다! 반드시 놈들이 뭘 알고 있는지, 뭘 알리는지 모두 알아 오겠습니다!!”
"그래그래, 다들 고맙다."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인걸요."
"우리 왕자님...꼭 왕이 되셔야 해요."
자신들의 영달을 위해서 내 편을 들고 있기도 하지만, 우리 궁인들을 나를 굉장히 불쌍히 여기고 있었다.
사실 생각해보면 불쌍한 상황이 맞기는 하다.
평생 만나지 못할 줄 알았던 왕과 재회하여 아버지와 정을 쌓고 있는데, 아비의 동생이자 삼촌이 자신에게 누명을 씌운 것으로도 모자라 죽이려 들고 있었다.
그 충격으로 아버지는 쓰러졌고, 이제 홀로 남은 왕자는 삼촌을 상대해야 한다.
궁에 아무런 연고도 없고 귀족들도 모두 삼촌의 편에 선 상황.
'이거 완전 단종이잖아.'
궁인들이 왜 날 불쌍하게 여기는지 알 것 같다.
"잘 부탁한다."
"예!!!!
자기들이 할 수 있는 일을 배정받은 궁인들의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귀여운 녀석들.
이렇게 하나씩 내 사람을 만들어가면 되는 거다.
우선 내 편인 궁인들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첫발이 나쁘지 않았다.
이제 슬슬 다른 이들도 내 편으로 끌어들여야 할 때였다.
'다음 순서는...역시 그 사람들이지.'
궁인 다음으로 왕궁에서 살아남기 위해 중요한 존재는 바로 '기사'들이다.
지금도 왕의 궁을 철저하게 보호하며 개미 한 마리도 쉽사리 통과시키지 않고 있는 것이 바로 왕의 기사들이었다.
오드만, 그 작자가 궁을 뒤집어엎지 않는 이유도 왕의 기사들 눈치를 봐야 하기 때문이었다.
왕의 기사들은 '계약'을 통해 왕을 배신하지 못하는 절대적인 무력 수단이었다.
아직 한 번도 본 적은 없지만, 귀족들이 괜히 그들을 두려워하는 게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그들이 솔깃해 할 만한 물건을 갖고 있었다.
♧ ♧ ♧
오래 전부터, 왕의 기사들은 철저하게 왕을 위해서만 움직이는 존재였다.
왕의 명령을 무조건 따르고, 그의 목숨을 자신의 목숨보다 귀하게 여기는 것.
그것이 왕의 기사들이 가져야 할 최고의 덕목이었다.
하지만.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르는 법.
왕도 '왕의 기사'를 신뢰하기 위해 완벽하게 그들을 옭아 맬 방법이 필요했다.
그리고 왕국에는 이미 절대 깨트릴 수 없는 '계약'이라는 마법적 도구가 존재했다.
왕의 기사가 되기 위해서는 강제로 '계약'에 서명을 해야 하는 절차가 생기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그 덕분에 왕을 배신하지 않은 충정의 상징이 되긴 했지만.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왕을 위해야 하는 삶을 살아가는 게 모두가 행복한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왕의 기사는 왕국에서 가장 뛰어난 검술 실력을 가진 자들만 뽑는 곳이었다.
귀족이라면 몰라도 평민 출신에서 실력자가 나오면 그들의 의사는 상관없이 계약서에 서명을 하고 왕의 기사가 되어야 했다.
물론 왕국에서 그에 합당한 보상을 주기는 한다.
허나 자유를 잃었다는 점에서 어떤 보상으로도 위로가 되지 않는 게 사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