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722 - #96. 진해솔 (26)
왕이 쓰러졌다는 소식이 전달이 되고, 기사단도 난리가 났다.
왕위를 노리는 하이에나들이 왕이 쓰러진 틈을 타 궁을 탐낼 게 뻔한 상황이었다.
비상이 걸린 기사단은 조금의 빈틈도 없이 왕이 기거하는 궁을 에워싸고 경계 상태에 들어갔다.
왕이 병환으로 죽는 게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암살을 당한다거나 독살이라도 당한다면, 기사단 소속 기사들이 모두 계약에 의해 죽어나갈 것이다.
그건 왕국에 가장 큰 전력에 공백이 생긴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언제까지 잠들어 계셔야 하지?"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합니다. 수면을 통해 많이 회복하셨지만, 지금 깨어나신다면 금방 또 쓰러지실 겁니다. 그리고 그땐..."
신관이 말을 다 끝내지 못하고 흐린다.
기사는 어서 끝까지 모두 대답하라는 듯 되물었다.
"그땐?"
"...두 번 다시 눈을 뜨지 못하실 겁니다."
"젠장..!"
왕의 목숨이 곧 기사단의 목숨이기에, 초조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체력이 어느 정도 회복이 되신다면 자연스럽게 깨어나실 겁니다. 지금은 그때까지 지켜보고 있는 게 최선입니다."
자연스럽게 회복을 끝내고 깨어났을 때가 왕이 가장 오랫동안 살아 있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했다.
기사단은 어쩔 수 없이 신관과 치료사를 내보냈다.
오늘도 왕은 깨어나지 못할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됐는데, 우린 어찌해야 합니까?"
"전하께서 깨어나시면 분명 왕자를 후계로 삼기 위해 시간을 쓰시겠지. 변하는 건 없다. 그러니 경거망동 하지 말도록."
왕이 왕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기 위해 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
그 중에 기사단의 계약을 이양시키는 것은 꽤 중요한 일이었다.
"왕비 전하께선 어찌 하신답니까? 찾아가 보신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분께선 막내 왕자님을 잃은 이후, 다음 후계에 관한 것을 신경 쓰고 싶지 않다고 하더군."
"저희는 그럼...이대로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는 겁니까? 그래도 되는 걸까요?"
왕이 이대로 계약을 왕자에게 넘겨주지 않고 승하하기라도 한다면, 기사단의 미래는 결코 밝지 않을 것이다.
'기사단 전부가 계약에서 벗어나게 될 테니까.'
애써 아닌 척 굴고 있어도 기사단원 중에는 벌써 경거망동하는 이가 나오고 있었다.
쓸데없이 자기 의견을 내기 시작한 것이다.
왕자의 편에 서는 것이 맞다는 쪽과 오드만 공의 편에 서는 게 맞다는 쪽으로 말이다.
'왕께서는 절대 우리를 풀어주지 않을 거다. 계약은 결국 왕자에게 이양 될 거야.'
그러니 기사단은 지금이라도 왕자의 곁에서 그를 지키는 것이 맞았다.
하지만 그들 중에는 계약을 통해 강제로 왕의 기사가 되어야만 했던 이들이 존재했다.
'어릴 때 납치 되듯이 끌려와 세뇌와 교육을 받았던 놈들은 얌전한데...'
어설프게 귀족 출신이라 세뇌 교육을 받지 않은 이들이 문제였다.
그들은 유난히 탐욕도 많아서 왕궁이 어수선한 틈을 타서 오드만 공을 지지하자는 의견을 내고 있었다.
그들이 오드만 공을 좋게 봐서 선택한 건 아니다.
'반대를 위한 반대.'
그리고 왕자 편을 들면 계약이 정상적으로 이양 될 확률이 높으니까.
그래서 왕궁이 더 혼란해지길 바라며 오드만 공을 지지하겠다고 나서고 있는 거다.
'멍청한 것들.'
왕의 부재가 오래 될수록 기사단이 분열 되고 있음이 느껴진다.
이러다가 누군가가 돌발 행동을 해서 왕의 신변에 문제가 생기면 어쩌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래봤자 왕이 깨어나 계약을 왕자에게 넘겨준다면 다 소용없는 일이 될 텐데 말이다.
"그 소식 들으셨습니까? 본격적으로 오드만 공이 움직이기 시작했답니다. 심지어 저한테도 초대장이 왔더군요."
"오드만 공의 말을 전달하러 온 귀족들이 움직이는 모양이구나."
"맞습니다. 그리고 기사들 중 몇몇이 그들과 접촉을 했다고 합니다."
"쯧."
귀족들의 권위도 결국 왕의 권위에서 나오는 거다.
헌데 왕의 권위가 땅 바닥에 떨어져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간신들이 설치면 자연스레 나라에 도둑이 많아지고, 백성들은 사는 게 팍팍해지는 법이었다.
기사단장은 자신이 해야 할 걱정이 아님을 알면서도 복잡해지는 머릿속을 멈추지 못했다.
"실례합니다."
"왕자님?"
왕의 궁을 보호하고 있던 기사 단장은 갑작스러운 왕자의 등장에 고개를 갸웃했다.
왕자는 이미 아침 일찍 왕의 상태를 보고 갔었기에 다시 궁을 방문하는 건 이례적인 일이었다.
더군다나 그는 궁인들이 아닌 기사들에게 말을 걸어오고 있었다.
그동안 왕자는 기사와 대화를 나눠 본 적이 없기에 다른 의도가 있다는 의미가 됐다.
"이렇게 대화 나누는 건 처음이죠? 다들 과묵해서 인사를 해도 안 받아줄 것 같아서 많이 망설였는데, 잠깐 시간을 내줄 수 있을까요?"
왕의 죽음을 바라지 않은 사람들 중엔 기사단도 있지만, 왕자도 만만치 않게 절박한 사람이었다.
해서 왕자는 왕의 궁을 드나드는 사람 중에 가장 출입을 편하게 할 수 있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단장님, 맞으시죠?"
"...예, 맞습니다."
"잠깐 얘기 좀 나눠요."
귀족들이 움직이기 시작하니, 왕자도 마음이 조급해졌던 걸까?
왕자가 대화를 요청하는 것을 마냥 무시할 수 없었던 단장은 순순히 자리를 마련하기로 했다.
"...여기선 대화 나누기 어려우니, 장소를 옮기는 게 좋을 듯 합니다."
"그래요. 그럼."
"너희들, 말 안 해도 알고 있겠지?"
"...예! 더 경계하고 있겠습니다."
단장은 왕자를 안내해 적당한 방으로 들어갔다.
"앉으시죠."
"고마워요."
"차 드시겠습니까?"
"아뇨, 이미 충분히 마시고 왔어요. 그나저나 궁이 많이 소란스럽죠?"
"...전하께서 깨어나면 모두 수습이 될 겁니다."
단장의 예의 차린 말에 왕자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궁인들은 쥐새끼라도 된 것 마냥 이곳저곳에 정보를 나르느라 정신이 없고, 귀족들은 왕궁을 서슴없이 드나들며 이곳저곳 푹푹 찔러보느라 정신이 없죠. 왕족이라는 작자들은 왕위에 정신이 팔려서 나라를 돌 볼 생각은 않고 있고요."
꽤나 적나라한 평가였기에 단장은 순간 왕자가 낯설게 느껴졌다.
'이런 사람이었던가?'
적어도 기사 단장은 보지 못했던 왕자의 새로운 모습이었다.
"언제까지 이 꼴로 내버려둘 수는 없잖아요. 물론 전하께서 일어나시면 정리가 되겠지만, 아프신 분께 언제까지 의지 할 수도 없는 일이고요."
왕이 깨어났을 때 왕자가 깔끔하게 왕궁을 정리해 둔다면, 왕은 남은 시간을 왕위를 물려주는 일에 쓰지 않아도 될 것이다.
기사들이 더 이상 되지도 않을 희망에 차올라 이상한 짓거리를 하는 것도 막을 수 있을 테고 말이다.
"전하께서는 후계자로 왕자님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러니 가만히 계셔도 왕께서 깨어나시면 정리가 될 겁니다. 그때까지 저희의 보호를 받고 있으시는 게 낫지 않으시겠습니까?"
왕자가 잘 해준다면 단장 입장에서는 더할 나위 없는 일이 맞다.
하지만 괜히 왕자가 무리하게 행동하다가 귀족들에게 역으로 당하는 일 만큼은 절대 없어야 했다.
해서 차라리 왕이 깨어날 때까지 자신의 보호를 받는 게 낫지 않겠냐고 말한 것이었다.
기사단장은 왕이 깨어나기 전까지 왕자를 지킬 자신이 있었다.
"그것도 좋은 방법 중 하나가 되겠네요."
왕자도 단장의 말이 쉬운 방법이라는 것은 알고 있던 눈치였다.
"근데 제 자리를 빼앗기지 않으려면, 위험하다는 걸 알아도 움직여야 할 때도 있는 법 아니겠어요?"
그렇게 쉽게 왕위에 오른다면 좋기야 하겠지.
하지만 결국 왕은 죽을 것이고, 허울 뿐인 왕위에 오른 나는 귀족들을 다시 휘어 잡기까지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할 것이다.
앞으로 나라를 다스릴 때 편하게 하려면 지금 귀족들을 휘어 잡아야 한다.
그리고 왕자는 그럴 충분한 능력을 갖고 있다는 듯 자신감을 보이고 있었다.
"제가 알기로 기사단 분들은 계약 때문에 전하께 충성을 한다고 들었어요."
"계약이 없어도 전하께 충성을 다 할 것입니다. 하지만 저희들 모두 전하와 계약을 맺은 상태인 것도 맞습니다."
새삼 숨길 것도 없는 진실이다.
"만약 전하께서 승하 하신다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기사단의 계약은 다음 왕위를 이을 후계자 분께 이양을 받게 됩니다."
애초에 그렇게 계약이 되어 있었다.
다음 왕위를 이을 사람에게 충성하는 것.
그러니 결국 기사단은 죽을 때까지 왕에게 충성해야 하는 것이다.
"다만 전하께서 직접 계약을 후계자에게 계약을 이양 시켜주셔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않으면?"
"기사 단원들은 계약에 의거하여 자유가 됩니다."
하지만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애초에 그녀는 계약 때문에 왕에게 충성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흔치 않게도 왕께 진심으로 충성하고 있었다.
애초에 그녀가 바랐다면 왕궁 기사단장이 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저희 일은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전하께서 일어나시면 모두 정리 될 겁니다. 충성심이 흔들리고 있는 자들은 자체적으로 저희 쪽에서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결국 전하께서 깨어나야 정리가 된다는 의미네요. 지금 당장 제게 충성해 달라고 한다면 듣지 않겠다는 뜻이겠구요."
정확하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왕이 깨어나 돌연 오드만 공에게 왕위를 넘길 수도 있지 않은가?
"계약에 대해 알게 됐을 때부터 생각한 건데, 이거 썩 좋은 수단은 아닌 것 같아요."
"...예?"
"기사단 분들이 본질을 전부 잊고 계신 것 같아서요. 아마 계약 때문일 거에요. 왕에게 충성하기 위해 기사가 된 건데, 정작 지금은 모두 계약에 묶여 죽음을 피하기 위해 충성을 하고 있는 거잖아요."
왕자의 말을 들은 단장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기사단이 변질 된지 오래라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지만, 직접적으로 꼬집어지니 기분이 상했다.
"저라면 그런 계약으로 충성을 강요하지 않았을 거에요."
"!!!"
왕자가 자신을 현혹하려 거짓말을 하는 걸 수도 있지만, 그의 말을 듣고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는 없었다.
왕께 충성하는 마음과 별개로 단장은 계약의 존재에 대해 깊은 회의감을 느끼고 있었다.
"계약 같은 게 없었어도 기사단원 분들은 전하께 충성하셨을 거에요. 괜히 계약이 중간에 끼워져 있어서 깨끗했어야 할 충성 맹세가 더럽혀진 것 같아요."
"......."
"제가 전하께 말씀드릴게요. 가능하다면 대대로 이어져 오던 계약을 깨뜨릴 수 있게요."
단장은 설마 하던 말을 태연하게 내뱉는 왕자를 보며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왕자님, 기사단은 귀족들에게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도구입니다. 계약을 깨뜨리면 왕자님을 노리는 암살자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궁을 침범할 겁니다."
"계약을 깨뜨린 후에는 제게 충성하지 않을 건가요?"
"왕자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기사단은 변질 되었습니다. 계약이 그나마 그들이 썩지 않도록 막아주고 있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