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723 - #96. 진해솔 (27)
계약은 기사의 충성 맹세를 더럽혔지만, 한편으로는 그들의 변질을 완벽하게 막음으로써 명성을 얻게 했다.
"계약을 이양 받으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실망하시게 될 겁니다. 차라리 썩지 않고 강제적이라도 순수할 수 있는 게 훨씬 낫습니다."
이렇게 살기 싫다며, 술에 취해 투정을 부리는 단원들이 몇인가?
기사단원들이 자유를 얻게 됐을 때, 그들은 차라리 자유를 갈망하던 지금이 훨씬 나았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자유로운 것도 그 자유를 책임질 수 있을 능력이 있는 자에게 주시는 게 맞습니다. 기사단은 자유를 견뎌낼 능력이 없습니다."
"그럼 차차 바꿔나가면 되겠네요. 지금 준비가 안 되어 있다면 이제부터 준비하면 되죠. 그리고 이게 여러분들이 절 지지해주셨을 때 드릴 수 있는 유일한 보상이기도 하거든요."
"....."
결국 왕자가 기사단으로부터 계약을 풀어주겠다는 미끼를 던졌다.
단장은 가진 게 없는 왕자의 입장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하면서도 강력한 방법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게 과연 기사단 입장에서 좋은 일일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왕자가 한 말이 기사단원에게 퍼지면 답이 없다. 기사단원 중 누구도 오드만 공을 지지 하지 않을 거야.'
기사단원이 오드만 공에게 넘어가지 않는다는 사실 만으로도 왕자는 크게 이득을 보는 것이었다.
단장은 이 소식을 듣고 기뻐할 단원들의 반응이 떠올라 더욱 심란해졌다.
더불어...
'왕자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영악하구나.'
도저히 거절 할 수 없는 것을 보상으로 내어 놓았다.
기사단은 지금부터 왕자를 왕위에 올리기 위해 최선을 다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오드만 공이 암살이라는 편한 방법으로 왕위를 차지하는 게 불가능해졌다는 의미가 됐다.
"앞으로 일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왕자님께서 지금 결정하신 것을 후회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물론이죠."
절대 후회 할 일 없을 거라는, 확신이 담긴 목소리.
사람 마음이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갈 때가 다른 법인데 왕자라고 오죽할까?
지금 갖고 있는 마음도 쉽게 바뀔 게 분명하지만, 어쩐지 믿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얘기 들어 본 적 있어. 왕자가 계약을 무효화 시켰다고!"
단장이 왕자와 대화를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단장은 왕자가 제안한 것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당연하지만 왕자의 뜻을 듣자마자 오드만 공을 지지하던 기사들이 태도를 180도 바꿨다.
가장 덤덤한 것은 오랫동안 세뇌 교육을 당해 자유조차도 큰 관심이 없는 기사들이었다.
"다들 그럼 왕자님을 지지할 건가?"
"왕께서 그분을 후계자로 지목하셨으니 우리가 다른 이를 밀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왕자님이 왕위에 오르셔야 하는 게 순리라고 생각합니다."
뻔뻔하기 그지없는 태도 변화에 울화통이 터졌지만, 단장은 주먹을 꽉 쥐고 심호흡을 하며 참아냈다.
"그래. 모두의 의견이 모아졌으니, 앞으로 우리들은 왕자님을 지지하는 쪽으로 움직이겠다."
단장의 결정에 기사들이 환호했다.
"계약에서 벗어나면 어떻게 할 거야?"
기사들은 왕자가 벌써부터 왕위를 이어 받은 것 마냥 심심할 때마다 그에 관련 된 얘기를 나눴다.
"어떻게 하냐니?"
"지금이랑 딱히 달라질 게 있나?"
"그럼 너희들은 은퇴 할 생각 없는 거야?"
"은퇴??? 은퇴를 하겠다고? 야, 너 이제 겨우 삼십대인데, 벌써 은퇴를 생각하는 건 아니지 않냐?"
"맞아, 계약에서 벗어나면 오히려 이 자리에서 버텨야 하는 거 아니야?"
계약을 맺어야만 들어갈 수 있는 왕궁 기사단.
계약이라는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면, 이곳에서 계속 근무하는 것만큼 매력적인 일이 없다.
"나는 너희들이 계약에서 벗어나고 싶어 해서 당연히 은퇴하고 싶어 한다고 생각했어."
"아니지. 멍청아, 그렇게 계산이 안 서냐? 왕궁 기사단이 밖에서 얼마나 대접을 받는데. 은퇴하라고 명령이 내려오지 않는 이상 무조건 붙어 있어야지. 더군다나 왕자님이 우리랑 대화가 통하시는 분이잖아. 나는 왕자님을 정말 충성을 다 해서 모실 거다."
계약에서 벗어났으니 본인들이 누리고 있는 자리에서 탐욕을 부릴 수 있어지는 거다.
벌써부터 기사단원들의 얼굴에 탐욕이 물들고 있었다.
그만큼 새하얀 도화지를 검게 칠하는 건 무척 쉬운 일이었다.
계약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행복감에 취해 있는 그들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걸 미처 모른 채 말이다.
슥ㅡ스슥ㅡ
"오늘도 또 한 명이 명단에 올랐군요. 이러다가 다 내보내시겠습니다."
"이번 기회에 물갈이 한 번 하는 거지. 기사단이 너무 오랫동안 고여 있었던 건 사실이지 않은가?"
그동안은 왕의 친위대 명성에 누가 될 놈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솎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계약을 맺은 놈이었기에 크게 사고 치지도 못한다.
그런데 이제 계약에서 벗어나게 됐으니, 얼마나 들뜨겠는가?
그동안 참고 있었던 충동을 소원 성취한다는 이유로 하고 다닐 것이고, 그건 기사단의 명예에 좋지 못한 영향을 끼칠 것이다.
"그 망나니들은 해고라는 게 얼마나 위험한 건지 알 필요가 있다."
"무력도 가장 낮은 주제에 명예는 열심히 팔고 다녔죠."
전형적으로 호가호위 하는 놈들.
왕의 명령을 수행한다는 이유로 본인의 대우를 왕처럼 받길 바라는 놈들이었다.
"처음에 얘기를 들었을 땐, 이래도 되나 싶었는데...앓던 이를 뺀 느낌이 들 것 같기도 합니다."
"어떤 일이든 좋은 일이 있으면 나쁜 일도 몰려오는 법 아니겠나."
본인들이 바란 일이니, 기사단원들도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계약에 의해 피해를 입었다고 생각하는 머저리들이니 말이다.
'계약을 무작정 본인에게 피해를 끼친다고 생각하는 머저리들. 오히려 계약이 본인들을 보호하는 수단이 되고 있었다는 걸 언제 쯤 깨닫게 될까?'
그땐 이미 늦어도 한참 늦었을 거다.
다시 계약을 맺고 있었던 때로 되돌리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상황이 되었을 때 말이다.
♧ ♧ ♧
왕의 친위대.
왕궁 기사단.
그들이 왕자에게 넘어갔다는 소식은 귀족과 오드만 공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도대체 어떤 수를 썼기에 그놈들이 왕자에게 넘어갔단 말이냐!!"
"그게...입을 완전히 다물어서 알아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기사들은 전형적인 왕족으로 자란 오드만 공이라면 왕자가 제시했던 조건을 절대 내걸지 않을 거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아니, 계약을 이양 받지 않겠다고 했다가 몰래 왕으로부터 계약을 받아낼 수도 있다.
어떻게든 계약을 이어 받기만 하면 기사단은 절대 왕을 배신할 수 없으니 말이다.
그러니 왕자의 파격적인 제안을 오드만 공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젠장! 왕자가 벌써부터 왕궁을 장악하려 하고 있구나."
"이럼 어쩌죠? 암살자를 보내는 것도 불가능해지지 않았습니까?"
그나마 다행인 것은 왕자가 아직 왕은 아니기에 기사단의 무력을 사사롭게 사용할 수 없다는 점이다.
왕자를 처리하기 가장 편한 방법인 암살은 불가능해졌지만, 다른 방법으로 왕좌를 빼앗으면 될 일이었다.
"이번 일로 귀족들이 동요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왕자는 절대 줄 수 없는 것들을 내가 그들에게 주겠다고 했으니까."
기사단을 왕자가 장악했다 해도 귀족들은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왕자에게 정치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알려줘야겠군. 너희들은 준비했던 계획을 실행해라."
"예!"
오드만 공이 씨익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왕자가 멋지게 한 방 먹이긴 했지만, 그동안 자신도 가만히 보고만 있었던 게 아니다.
그리고 마침내 오드만 공의 반격이 시작 되었다.
까ㅡ악! 까ㅡ악!
"아이고, 끔찍해라."
"신께서 나라를 버리신 건가?"
웅성웅성ㅡ
시작은 거대한 화마가 산을 덮친 것이었다.
커다란 산불이 나서 마법사들까지 불러다가 불을 껐음에도 불구하고 피해가 어마어마했다.
몇 천의 가구가 생활 터전을 잃었고, 동식물들이 타죽는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그때까지만 해도 백성들은 동요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지.'
'이제 뭘 먹고 살아야 하나....아이고!!'
단순히 운이 나빴다고.
불은 종종 이유 없이 나기도 하니까.
그렇게 생각했다.
"둑이 무너졌어!! 아이고! 큰일 났다! 큰일 났어!"
멀쩡하던 둑이 무너졌다.
둑 아래에 있던 마을이 순식간에 물에 휩싸여 수장 된 것이다.
어떤 곳은 뜬금없이 전염병이 돌았다.
수십, 수 만 명의 아까운 목숨이 갈려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요즘 왜 이렇게 나쁜 소식만 들리는지 모르겠어."
"꿈자리도 뒤숭숭하고 그러네."
그리고 이와 비슷한 재난이 왕국의 이곳저곳에서 벌어졌다.
피해는 오로지 백성들을 중심으로 벌어졌고, 터전을 잃어 시름에 잠긴 백성들은 땅을 치고,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리고 삶이 괴롭고 팍팍할 때 자연스럽게 사이비들이 판을 치기 마련이었다.
"아아아...임금께서 일어나셔야 이 재해가 끝이 날 것입니다!"
"이게 다~ 어디서 컸는지 모를 근본 없는 왕자가 왕위를 받게 돼서 벌어진 일입니다!!!"
사이비들은 일제히 이 모든 재난이 왕자 때문이라고 외치고 다녔다.
백성들이야 자신들의 고통에 대한 책임을 남에게 미룰 수 있으니 마다 할 이유가 없었다.
"왕자가 물러나야 돼."
"왕자가 흑마법사라는 소문이 있다오!"
백성들 사이에서 퍼진 흉흉 소문들이 빠르게 왕궁에까지 퍼져나갔다.
"참으로 황망한 소문이 아닙니까."
"헌데 왕께서 자리 보전하고 누우신 이후에 흉악한 재난이 벌어진 건 사실이지 않습니까?"
참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다.
왕자가 귀족들과 국정을 다스리기 위해 회의를 하기로 한 날.
흉흉한 소문이 왕궁을 덮쳤고, 왕자의 귀에도 왕국이 고통 받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왕자 입장에선 그야 말로 뒤통수를 제대로 얻어 맞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와, 이거 제대로 설계 당했네."
왕자도 바보는 아니었기에 순식간에 왕국에 퍼진 흉흉한 소문이 누구의 작품인지 금방 알아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