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724 - #96. 진해솔 (28)
"좀 더 빨리 알아왔어야 했는데...죄송해요."
시무룩해진 궁인의 어깨를 토닥여주며 달랬다.
"괜찮아. 어차피 일찍 알았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었을 거야."
솔직히 귀족들이 여론전으로 갈 거라곤 생각을 못했다.
여기서 백성들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귀족일 것이다.
그렇기에 귀족이 백성들을 이용해서 나를 압박한다는 꾀를 낼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사실 엄격한 신분제가 존재하는 이곳에서 백성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크게 달라질 건 없었다.
'민주주의처럼 대통령을 하야 시킬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왕이라는 자리를 두고 경쟁을 하고 있는 지금과 같은 상황에선 백성들의 지지를 못 받는다는 게 의외로 큰 문제일 수 있었다.
백성들의 지지를 받아서 어쩔 수 없이 왕위를 노릴 수 밖에 없었다는, 그러니까 오드만 공이 왕위를 노리는 훌륭한 명분이 되는 것이다.
며칠 전 오드만 공과 만났을때, 이만 왕궁에서 나가라고 했던 것 때문에 이 일을 계획한 게 아닐까 싶었다.
백성들이 그 계획 때문에 얼마나 죽어 나가든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인성 파탄 난 놈들 답게 꾸민 짓도 어마무시했다.
'산에 불을 지르고, 둑을 무너트리고, 전염병...설마 전염병도 자작극인가? 좀 심하네.'
이런 큰 재앙들이 짧은 기간 안에 우르르 생긴다면, 그 일로 피해를 입은 백성들은 하늘이라도 원망하고 싶어 질 것이다.
그리고 귀족들이 그걸 노리고 소문을 냈을 것이다.
왕이 쓰러지고, 왕자가 왕위에 오르려고 하니 나라에 흉흉한 일이 생기기 시작한다고 말이다.
"왕자 저하 드십니다!"
왕에게 정치를 배우면서도 한 번도 들어가 본 적 없는 공간에 처음으로 들어섰다.
귀족들이 쭉 시립해 있는 것은 익숙하다.
친국장에서도 귀족들은 저러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상석에 황금 용이 멋드러지게 장식 되어 있는 왕좌가 보였다.
그 옆에 서 있는 남자 그러니까 오드만 공의 모습 또한 말이다.
"어서 오시게, 조카님. 기다렸다네."
그가 여유로운 모습으로 나를 반겨왔다.
"오드만 공께서 이곳엔 무슨 일로 오신 겁니까."
"국정을 논하는 자리에 왕족의 큰 어른인 내가 나서지 않을 수 없지 않겠는가. 조카님이 실수하지 않도록 대리 청정을 할까 생각 중이네."
"대리청정이 하고 싶다고 하면 할 수 있는 거였습니까."
"왕자, 요즘 백성들 사이에서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아시는 게 있습니까?"
이 자리에 붙어 있기 위해 수많은 백성들을 희생시킨 사람이니 그 얘기를 안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전해 듣기는 했습니다."
"백성들의 어리석은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까지는 없으나, 아예 무시하는 것도 위정자로서 의무가 아닙니다."
"그래서 오드만 공이 나라를 다스리면 재앙이 멈추기라도 한 다는 겁니까?"
전염병이 씻은 듯이 낫고, 무너졌던 둑은 다시 세워지고, 죽은 사람이 돌아오고, 불에 탄 산이 되돌아오고 말이다.
"백성들의 고통 어린 외침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혹여 왕자님께서 국사에 관여하셨다가 더 큰 재앙이라도 일어난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백성들의 원망은 더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국사에 관여를 한다면 또 다른 재앙을 만들어내서 백성들을 괴롭히겠다는 의미였다.
"그러니 백성들이 화를 내지 않게 국정에는 관여하지 말라는 겁니까?"
"오드만 공께서 국정을 돌보셔서 재앙이 잦아 든다면...."
옛다, 당근! 이라는 식으로 귀족이 되도 않는 약을 준다.
"제가 나라를 다스리면 신이 천벌이 내리고, 오드만 공이 나라를 다스리면 천벌이 사라지나 봅니다. 재앙이 여러분들 편의에 따라 다르게 내리니, 신이 있다면 당신들일지도 모르겠네요."
"왕자님!!"
"저희를 조롱하시는 겝니까!!"
내 발에 화가 난 귀족들이 커흠흠!! 헛기침을 해대며 불쾌한 기색을 내보인다.
끝까지 아무 잘못도 없다는 식이다.
"백성들 목숨을 두고 협박질을 하시는 고상한 분들이니 조롱을 받는 건 저겠지요."
저놈들 중 누구도 백성을 인질로 삼고 협박을 한들 먹힐 놈이 있겠는가?
근데 내가 오랫동안 '백성'으로 생활했다고 들어서 이 되지도 않는 협박이 통할 거라고 생각했나 보다.
내가 아니었다면 벌어지지 않았을 일이라는 듯, 어서 이 말을 듣고 죄책감을 느끼라는 듯.
귀족들 모두 뱀의 혓바닥을 가진 놈들이었다.
'너희들이 해놓은 짓으로 내가 왜 죄책감을 느껴야 하는데? 그렇게까지 내가 이 세계에 정이 있는 게 아니잖아.'
이놈들은 도대체 어디까지 갈 생각인 건지.
"왕자님은 오드만 공께 감사 하셔야 합니다. 왕족의 어른께서 몸소 귀한 걸음으로 오셔서 도움을 주고 계시지 않습니까?"
귀족들이 신이 나서 오드만 공을 추켜세우고, 노골적으로 나를 비웃어댔다.
방패가 되어주던 왕을 잃은 왕자가 얼마나 초라할지 신나서 구경하는 귀족들도 있어 보였다.
'이런 놈들이 왕 앞에서는 쥐 죽은 듯이 숙인단 말이지.'
참 신기한 일이다.
왕에게 시간이 좀 더 있었다면 그런 노하우도 배웠을 텐데 아쉬웠다.
이놈들은 빗속에서, 뙤약볕에서 벌을 서던 기억을 잊어 버린 지 오래였다.
귀족들이 저들끼리 북 치고 장구 치면서 나를 어떻게 해서든 짓누르려 애를 써댔다.
더 이상 가만히 두고 볼 필요도 없어 보였다.
이놈들 중에 고쳐 쓸 만한 자들은 없다.
"왕족이 언제부터 자기 멋대로 국정을 논하는 곳에 당당하게 자리를 잡고 있을 수 있었습니까? 왕족 스스로 대리청정을 하겠다고 나오는 게 정상은 아닌 것 같은데요."
"조카님, 아직도 모르겠나? 투정을 부린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네."
귀족들 앞에서 점잖은 척 하던 것도 지겨워졌는지 오드만 공이 의기양양해져 본색을 드러냈다.
"보시게! 지금 여기에 왕자의 투정을 봐줄 이가 있는지! 단 한 명도 없다! 조카님의 편은 저기 궁에 누워 골골 거리고 있는 형님이 전부이지 않은가? 하하하하!!"
이젠 하다못해 그가 자기 형까지 모욕하고 있었다.
이건 귀족들도 꽤 등골이 싸했는지 순식간에 입을 조개처럼 다물었다.
'진짜 그 노인네, 왕년에 잘 나갔나 보네.'
늙어서 골골 거리며 죽어 가는 왕인데도 귀족들은 여전히 그를 두려워 하고 있었다.
'나도 이건 본받아야지.'
오드만 공의 뜻에 따르지 않은 귀족들은 이 자리에 들어오지도 못한 모양이었다.
내 궁에 방문했던 적 있는 귀족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지만, 자주 만났던 귀족은 이 자리에 없었다.
그게 나한테는 유일한 위안이라면 위안이었다.
"조카님, 언제까지 그 자리에 앉아 있을 생각인 겐가?"
"저를 여기 앉혀두시고 다들 즐겁게 대화를 나누시기에 어디까지 하시는지 구경하느라 시간 가는 줄을 몰랐습니다."
"...아직도 기가 꺾이지 않았군. 형님 핏줄은 핏줄인 모양이야."
왕의 핏줄이라 무서워 하지 않는 게 아니다.
내가 여기서 무서워 할 게 뭐가 있겠나?
기사단이 내 손아귀에 있는 이상 그들은 나를 무력으로 강제하지 못한다.
"아직도 기가 꺾이지 않은 건 아무래도 기사단 덕분이겠지? 그들을 설득했으니 제법 기세등등했을 게야. 하지만 조카님, 그들이 조카님을 지지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네. 조카님이 왕이 되기 전까지 절대 움직이지 않을 테니까."
왕자의 목숨을 직접적으로 노렸다면, 기사단도 그것을 명분으로 움직였을 것이다.
하지만 오드만 공은 내 목숨을 직접적으로 노리지 않았기에 기사단이 움직일 명분이 서지 않았다.
'애초에 기사단은 덩치 불리기에 불과한데? 저쪽에 넘어가지 않게 하는 것 만으로도 충분했고.'
대충 상황 파악이 끝났으니 이제 나도 반격을 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자신감은 오드만 공이 짐작하고 있는 기사단 떄문이 아니다.
"어찌할 겐냐? 귀족들이 수습을 해주지 않으면 재해로 피해를 입은 백성들이 하루에도 수 백이 죽어 나갈 거다. 조카님은 정치를 시작하기도 전에 최악의 평가를 남기겠군."
부리부리한 오드만 공의 눈동자가 내 눈을 직시한다.
"더 최악이 되기 전, 이 자리에서 딱 한 마디만 하거라. 나에게 국사를 맡기겠다고. 그럼 왕자가 받고 있는 모든 압력에서 벗어나게 될 거다."
꽤나 매력적인 유혹이다.
"흐음...꼭 이렇게까지 하셔야겠습니까?"
"으하하!! 당연히 이렇게까지 해야지. 조카님이 욕심만 부리지 않는다면 남은 생은 괴롭지 않을 거다. 내가 약속하마. 계약을 해달라고 한다면 해줄 수도 있다. 내가 조카님을 서운하게 대할 리 없지 않으냐? 나를 믿거라."
이런 쓸모 없는 얘기, 이제 그만 듣자.
"여기 계신 분들한테 마지막으로 제안하겠습니다."
"???"
"제 편에 서십시오. 그럼 앞으로 그랬듯이 계속 귀족으로 권력을 누리며 사실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오드만 공을 선택한다면 제가 왕위에 올랐을 때, 서슴없이 오늘 일로 정치 보복을 하겠습니다."
웅성웅성-
벼락 위에 올라 선 줄 알았던 왕자의 예상치 못한 당당한 선언이었다.
오드만 공은 황당한 소릴 하는 나를 향해 쯧쯧 혀를 찼다.
"조카님, 아무리 당황했다고 해도 정신을 놓는 건 곤란하네. 형님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얼마나 이 아우를 원망하겠는가?"
자기 비위를 맞춰야 할 판에 협박을 하고 앉아 있으니 당황스러운 모양이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아마 오드만 공이 여러분들께 꽤 많은 이권을 넘겨주겠다고 약속을 했겠죠. 근데...그 권력, 여러 분들이 과연 누릴 수 있을까요? 결국 그런 권력도 살아야 누릴 수 있는 거 아닙니까."
"????"
"우리가 죽는다는 말씀이십니까?"
"무슨 그런 끔찍한 소리를...?"
언젠가 오드만 공이 내게 협박을 했던 말을 고스란히 귀족들에게 돌려준다.
그리고 나는 내 말이 협박이라는 사실을 귀족들에게 알리고자 주머니에서 작고 귀여운 곰돌이 인형을 꺼내 들었다.
못들은 척 굴어도, 얘기를 들어 본 적은 있을 것이다.
웅성ㅡ웅성ㅡ!
"!!!!"
"저건...설마?!"
"저게 뭔데 이렇게 놀라십니까?"
"자네 기억 안 나나?! 그거 말이야, 그거!!"
"예? 그거요? 헉!! 설마 그 인형이..?!"
"저게 더 있었다고?!"
귀족들은 내 손에 들린 인형을 보며 사색이 된다.
여러 번 언급하지만, 지금까지 계약을 무효화 시키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존재하지 않는 줄 알았다.
그런데 뜬금없이 나타난 왕자가 친국장에서 연금술사의 계약을 무효화 시킬 수 있다며 인형을 가져왔다.
그리고 저 무해하게 생긴 인형은 진짜 계약을 성공해 귀족에게 큰 충격을 주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