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725 - #96. 진해솔 (29)
왕자가 노골적으로 인형의 존재를 어필하자 귀족들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왕자가 결국 그걸 꺼내는구나.'
'이후로 아무 얘기도 없어서 운 좋게 하나 구한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맺고 있는 계약이 몇 개였더라...?'
'미리 계약을 정리해서 문제 될 놈들을 죽여둬야 할지도 모르겠어.'
귀족들에게 왕자의 협박은 치명적이었다.
왕자를 비웃고, 오드만 공을 치켜 세우던 자들이 태도를 바꿀 만큼 말이다.
오드만 공은 그런 귀족들의 동요를 확인하고 질끈 입술을 깨물었다.
이 자리에서 이걸 꺼낼 줄은 몰랐지만, 예상하지 않은 일은 아니었다.
"조카님, 그렇지 않아도 그 인형에 대해 따로 얘기를 하려고 했다."
"어떤 얘기를 말씀이십니까?"
"그 인형, 신전에 보내 조사를 해야겠네."
"이걸 조사하시겠다고요?"
"그래, 내가 아는 신관에게 인형을 보일 생각이네."
"왜죠?"
"나는 그 인형이 흑마법사의 손에 제작 되었을 거라 예상하고 있다네."
오드만 공이 마련 해준 쥐구멍을 귀족들이 놓치지 않았다.
"맞습니다!! 예전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장 조사를 해봐야 합니다."
"왕자님! 어서 그 불길한 인형을 신관에게 넘기십시오!"
흑마법사가 제작한 게 아니어도 상관없었다.
그들에겐 아닌 것을 진실로 만들 힘이 있었으니 말이다.
♧ ♧ ♧
'다들 찔리는 게 많으신 모양이야.'
찔리는 곳이 많은 사람들이라서 얼마나 다행인가?
덕분에 양심의 가책 없이 협박도 할 수 있고, 마음껏 이용해 먹을 수도 있는 거다.
'흑마법사가 제작한 물건이라고...? 뭐 그럴 수도 있겠지. 누가 만들었는지 알게 뭐람.'
하지만 이 인형을 누가 만들었는지는 나만 알 수 있는 일이지 않은가?
내가 아니라고 하면 아닌 거다.
그러니 저들의 주장을 들어 줄 이유가 없었다.
이걸 압수해서 어떻게 만드는지 연구할 게 뻔한 놈들 아닌가.
"그럴 순 없을 것 같네요."
"누가 제작했는지 알 수 없는, 그런 물건을 함부로 왕국에 유통하실 수는 없습니다."
날치기 법안이라도 통과하시게?
저주받이 인형 유통 금지 뭐 그런?
"이 물건이 흑마법사가 제작한 것이 아님을 제가 보증할 수 있습니다."
"왕자님의 보증으로는 부족합니다. 적어도 제작자가 누구인지는 밝히셔야 합니다!"
"맞습니다, 그런 위험한 물건을 어찌 함부로 사용하시려 합니까?"
저건 인형 제작자가 누구인지 알고 싶다는 의미다.
인형이 위험한지 안 위험한지는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일단 성능이 확실하니까.
"이미 이걸 사용해서 범인을 알아낸 적이 있죠. 이렇게 성능이 확실한데 사용하지 않는 게 더 이상한 것 아닙니까?"
계약을 무효화 시키는 인형이 귀족들의 손에 들어간다면 그 또한 그들의 부귀영화를 위해 쓰이게 될 것이다.
"성능이 뛰어난 만큼, 그에 맞는 부작용이 있을 겁니다."
"맞습니다. 적어도 다양한 방법으로 부작용이 있는지 조사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제작자의 신변을 확보하여 그자에 대해 조사도 해야 함이 맞사옵니다."
그러니 어서 제작자가 누구인지 토해내라는, 귀족들의 협박이 이어진다.
순식간에 사람 하나 병신 만드는 솜씨가 기가 막혔다.
가만히 귀족들의 행태를 지켜보던 나는 짜증을 왈칵 쏟아내며 말했다.
"정말 불쾌하네요. 여러분들 말에 의하면 제가 흑마법사라는 거고, 수상한 사람이라는 뜻이니 말입니다."
"!!!!"
"!!!!"
내 말에 귀족들의 입이 조개처럼 다시 닫힌다.
"저는 이미 신관에게 흑마법사와 관련 없는 사람임을 보증 받았습니다. 여러분들의 말에 따르면 제가 흑마법사라는 건데, 그때 절 확인했던 신관이 들으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신관의 보증을 의심한다는 건 그쪽과 관계를 엉망으로 만드는 일이었다.
이곳은 마나와 신성력이 존재하는 세계인지라 유난히 종교의 힘이 강했다.
그러니 신관이 내린 결과를 번복하는 것은 큰 위험을 불러올 수 있었다.
"왕자님이 제작자라고요?!"
"말도 안 됩니다. 제작자를 숨기려고 거짓말을 하시는 것 아닙니까!!"
"맞습니다. 그런 허술한 거짓말을 어찌 믿으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 말라며 격하게 반발을 해온다.
그런들 내 말이 바뀔 일은 없었다.
어디에서도 나오지 않았던 인형이 뜬금없이 나왔으니 이상하다는 생각은 들었을 거다.
무지렁이로 살던 내가 어딜 가서 이런 걸 만드는 사람을 인맥으로 만들겠냔 말이다.
입으로는 아닐 거라고 말하는 놈도 긴가 민가 하는 눈치였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제가 만든 게 맞습니다. 제가 어디서 이런 걸 만든 사람을 얻을 수 있었겠습니까? 스스로 제작한 게 아닌 이상에요."
저걸 귀족에게 바쳤다면 엄청난 이득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굳이 권력도 없는 왕자에게 자기가 만든 귀한 것을 넘긴다?
말이 안 되는 거다.
"내 눈으로 보기 전까지는 못 믿겠다!"
"그럼 증명하죠.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바드득ㅡ!
오드만 공이 바드득, 이를 가는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가 참 명쾌해서 사이다를 마신 기분이었다.
"이제 인정 하시죠. 그렇게 부정해봤자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 그리고...저는 이 정도면 충분히 다 기다렸다고 생각하는데, 생각 할 시간이 더 필요하신 겁니까?"
"......"
"......"
아직까지 귀족들 중에서 마음을 바꾼 이는 없었다.
내 시선이 닿을 때마다 귀족들은 아 뜨거라! 하면서 시선을 외면하고 있었다.
'본보기로 한 번 당해봐야 정신을 차리려나?'
아예 효과가 없는 건 아니었다.
안절부절 못하면서 눈알을 굴리고 있는 귀족들이 많았다.
조금만 툭 건드려주면 넘어 올 놈들이 꽤 있어 보인다.
문제는 그런 놈들이 유난히 나를 많이 비난했던 자들이라는 점이다.
'줘도 안 가질 새끼들만...'
애초에 그런 박쥐 같은 놈들이니 무례한 행동을 서슴없이 해 댔을 것이다.
"저, 저는..."
"경거망동 하지 말게."
귀족들 중에서 머리가 좀 돌아가는 이들은 유심히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내 협박에 쫄은 귀족 중 누군가가 슬며시 발을 빼려는 순간, 한 귀족이 이를 막아 세웠다.
"왕자님, 지금 귀족인 저희들에게 협박을 하시는 겁니까?"
"다행히 협박으로 받아 들여지긴 했나 보네요."
"...아무리 대단한 핏줄이라도 자란 환경은 티가 날 수밖에 없군요. 저희들이 그런 걸로 동요할 거라 생각하십니까? 이 모욕을 왕자님께서 감당하실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삼천 명의 후궁을 만들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정치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앞으로 귀족들은 나 대신 열심히 나라를 다스려야 할 것이다.
'그러니 두고두고 날 귀찮게 할 놈들은 지금 한꺼번에 처리한다.'
왕이 권위로 그들을 눌렀다면, 나는 계약을 무효화 시키는 능력을 통해 그들을 꼼짝 못하게 만들 것이다.
"제가 한 말이니 감당하라고 하시면, 감당해야죠. 못할 것도 없어 보이고요."
오드만, 저 작자가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는 건 오로지 귀족들의 지지가 그를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귀족들의 지지를 잃는 순간, 그는 내게 대항 할 수 있는 힘을 잃는다.
"그리고 먼저 협박을 받는 건 저 아닙니까? 본인이 협박을 하는 건 상관이 없고, 남한테 협박 받는 건 그렇게 분하십니까?"
내로남불이 너무 심한 거 아닌가.
아직 제대로 협박 한 게 아닌데 협박이냐며 벌써부터 바르르 떨면 어떡하나 싶기도 하다.
"협박이라고 하시니 제대로 협박 좀 해보겠습니다. 누구에게 건 계약이 깨졌는지, 안 깨졌는지 알 수도 없겠죠. 나를 보호하고 있는 줄 알았던 자가 내 목숨을 노리러 온 암살자가 될 수도 있을 겁니다."
내게 협력하지 않은 귀족들은 평생 밤이 무서워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을 것이다.
"!!!!"
귀족들은 특히 자기 목숨을 지켜주는 호위들에게 반드시 '계약'을 걸어 놓는다고 한다.
왕도 그렇게 기사들을 쓰는데, 귀족이라고 그러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귀족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하게 작성 되었을 계약이 풀리는 순간,
그들은 본인에게 쏟아지는 원한을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왕자님!! 말씀이 너무 심하시잖습니까!"
"계약은 지금까지 신성하게 지켜져 온 왕국의 오랜 전통입니다! 왕자님은 지금 왕국의 근간을 흔들고 계십니다!"
"근간이요? 초반에야 그랬을 수도 있지만 지금은 아니지 않습니까? 사람을 협박해서 강제하는 수단으로 변질 된 계약이 어떻게 왕국의 근간이 될 수 있습니까?"
깨뜨릴 수 없기에 계약은 더욱 더 악랄하게 악용 되었다.
귀족들은 자신을 향한 원한을 계약을 통해 막아내고 있었고, 피해자들은 억울해도 억울하단 소리조차 내뱉지 못하고 당해야만 했을 것이다.
"아니면 이걸 통해 계약으로 억울하게 피해를 입은 백성들을 도우면 어떨까 싶기도 합니다."
히익!!
귀족들은 끔찍한 걸 들었다는 듯 몸을 벌벌 떨었다.
표정에는 치욕스러운 말을 들은 듯 경악이 가득했다.
평민을 위해 무언가를 한다는 게 그들 입장에서는 황당하고 어처구니가 없는 모양이었다.
"말도 안 되는 짓 입니다!!"
"왜들 이렇게 싫어하시는지 이해가 안 되는군요. 억울하게 피해를 받은 평민들이 불쌍하지도 않으십니까?"
경악하는 귀족들에게 일부러 순진한 척 고개를 갸우뚱하며 되물었다.
"무슨 이득이 있다고 그 무지렁이들에게 귀한 것을 쓰신단 말입니까!!"
그래, 귀한 거긴 하지.
코인으로만 구매할 수 있는 물건이니까.
하지만 예전처럼 문란하게 허리를 놀리고 다닌다면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요즘 저를 둘러싼 소문이 진실이 아니라는 걸 알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백성들이 안심할 수 있다면 이 정도 희생은 얼마든 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어차피 제가 제작하는지라 큰 부담이 없기도 하고요."
계약으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구원해주는 왕자!
흔들리던 민심이 순식간에 나에게로 돌아 올 것이다.
"배운 것이 없어 하는 아무 의미 없는 행동들입니다. 그냥 내버려두면 제 풀에 꺾일 겁니다. 왕자님께서 그런 배려를 해줄 이유가 없으십니다."
"맞습니다. 그놈들이 뭐라고 떠들면 잡아 들여서 혼쭐을 내면 될 일입니다."
어처구니가 없다.
백성들을 괴롭혀서 여론을 만든 게 본인들이면서, 이젠 신경 쓰지 말라고 하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