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731 - #96. 진해솔 (35)
"다 나가. 나가!!!"
오드만 공이 걱정 어린 시선으로 지켜보던 시종과 비서관들을 모조리 밖으로 내쳐버렸다.
쾅쾅쾅쾅쾅-!!
오드만이 분함을 감추지 못하고 테이블을 내리쳤다.
"뭐 이렇게 상황이 꼬이기만 한단 말인가!! 제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어!!"
왕자에게 압박을 줘야 하는 귀족들은 왕자 쪽 귀족들에게 당해서 빌빌 거리고 있고, 왕자는 기세등등해져서 인형을 귀족들에게 보상으로 걸기까지 했다고 한다.
왕자의 인형을 비싼 돈을 주고 구하긴 했지만, 정작 조사를 맡긴 연금술사는 얼마 후 고개를 저으며 조사가 불가능하다는 허무한 결과를 가져왔다.
왕자가 이미 수를 써둬서 조사하려고 손을 댄 순간 인형이 폭발했다는 것이다.
'저택 한 채 값을 주고 사온 것인데 쓰지도 못하게 망가져서...젠장!!'
쾅쾅쾅쾅!!!!
분함을 감추지 못하고 다시 한 번 테이블을 주먹으로 내려친 오드만은 지끈거리는 두통에 머리를 부여 잡았다.
"끄응, 어찌한다. 형님께서 분명 얘기를 다 들었을 텐데..."
그가 아는 형님이라면 아우라고 해서 봐줄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왕자에게 안전한 왕위를 물려주기 위해 잘 됐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자신을 처리한 후, 같이 저승에서 만나자고 할 사람이니까 말이다.
"분명 다 왔었는데!"
그 생각은 절대 착각이 아니었다.
실제로 고지가 보였었다.
그런데 고지 앞에서 상황이 이상하게 꼬였다.
시작은 왕자가 예상하지 못한 능력을 갖고서 귀족들을 협박했을 때였고, 형님이 예상보다 더 빠르게 깨어났다는 소식이 들려 온 지금 완벽하게 상황이 변했음을 인정 할 수밖에 없었다.
'분명 신관은 깨어나려면 좀 더 걸릴 거라고 했었다. 그 신관 놈이 미치지 않고서야 거짓말을 했을 리 없는데 어떻게 이렇게 일찍 일어난 거지?'
머릿속이 복잡하다.
현재 상황이 뒤죽박죽 섞여서 정리가 되지 않아 오드만은 주머니에 손을 넣어서 구슬 세 개를 꺼내들었다.
손아귀에 세 개의 구슬을 쥐고 빙글빙글 돌리니, 딸그락 딸그락 부딪치는 소리가 일정하게 들렸다.
어릴 적부터 오드만에게 있었던 습관이다.
이렇게 하면 잘 돌아가지 않던 감정이 차분해지고, 머리도 잘 돌아가는 느낌이 났다.
딸그락, 딸그락, 딸그락, 딸그락...
손아귀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는 구슬을 내려다보며 오드만 공은 형님을 생각했다.
솔직히 떠올리기 좋은 추억은 아니었다.
어릴 적부터 그의 형님은 참 두렵고 무서운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덤비지 말자. 형님한테는 무조건 질 거야.'
오죽 무서웠으면 고작 10살도 되지 않은 나이에 평생 형님에게 반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했겠는가?
그리고 오드만은 어릴 적 했던 이 생각 덕분에 지금까지 무사히 살아남을 수가 있었던 거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게 살아남기 위해 옳은 태도이기도 했다.
자비로운 포식자인 형님은 자신에게 배를 보이고 누운 동생의 목숨까지는 취하지 않아주셨다.
"...죽기 전까지도 형님은 제게 두려움을 안겨주시는 군요."
문제는 타고난 욕심이라는 게 쉽사리 버려지는 게 아니라는 점이었다.
야망이 없다면 형님을 두려워 할 이유가 없다.
속내에 야망이 있기에 형님이 자꾸 두려워지는 거다.
그를 상대로 왕위를 빼앗고 싶은데, 도저히 답이 보이지 않으니 말이다.
'기다리고, 또 기다렸지.'
언젠가는 형님도 약점이 생길 때가 있을 거 아니겠나?
그도 사람이라면...사람이었다면 말이다.
'빌어먹을.'
왕의 아들로 태어나 적법한 왕위 계승권을 갖고 있으니 이 정도 욕망은 당연히 가져야 할 덕목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걸 형님 앞에선 철저하게 숨겨야 했지만 말이다.
도무지 빈틈이라곤 없는 게 정녕 사람이 할 수 있는 짓이란 말인가!!
그리고 그 욕망도 형님의 유능함에 짓밟혔다.
도무지 빈틈이 없었다.
귀족들도 자신처럼 왕 앞에서 벌벌 떨며 자비를 베풀어주기를 바랄 뿐이었으니까.
'차라리 끝까지 그리 완벽하지 그러셨소. 그랬다면 이렇게까지 아등바등하지 않았을 텐데.'
그렇게 완벽했던 형님이 무너졌다.
자식들을 잃은 충격이 점점 쌓이고, 마침내 막내 왕자까지 허무하게 잃자 고작 1년 사이에 빠른 속도로 늙어간 것이다.
추레해진 형님을 보며 얼마나 놀랐던가.
고작 왕자를 잃었다고 형님이 저렇게까지 추락한다고?
처음에는 믿을 수가 없어서 의심을 했다.
혹여 이 형님이 자신의 숨겨왔던 탐욕을 읽고 나를 시험하는 건 아닌가 하고.
그런데 아니었다.
귀족들에게 후계를 선정하라는 폭탄 선언을 하고 자기 궁에 틀어 박혀버렸다.
자신이 평생을 바라던 그 자리에 앉아서 권력을 누려 놓고 이제와서 아무렇지 않게 버려버릴 것처럼 왕좌를 쓰레기통에 던져버린 것이다.
'지난 세월 동안 원망도 많이 했지만, 이토록 화가 난 적은 처음인 것 같군.'
형님이 당연하다는 듯 왕위를 가져갔을 때도 이렇게까지 화가 나진 않았던 것 같다.
그땐 한참 형님에 대한 공포를 느끼고 있었던 때라 체념한 상태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자신이 여전히 갈망하는 자리를 그는 아무것도 아닌 쓰레기 취급을 하며 귀족들에게 내던져버렸다.
'죽이고 싶다.'
형님을 내 손으로 죽인다면...어떨까?
자신의 손으로 형님을 죽일 수만 있다면...?
평생 짓눌려 있었던 자존감을 회복할 수 있을 것 같다.
실행을 머뭇거리게 만드는 것은 형님이 거느리고 있는 기사단의 존재다.
철통같이 왕의 처소를 지키고 선 기사단은 빈틈을 보이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이젠 상황이 달라졌다.
'오히려 잘 된 걸지도 모르지. 생각보다 일찍 깨어나서 당황스럽긴 하다만, 이 정도는 큰 변수가 못 돼.'
몰래 사병을 기르고, 인재들을 빼돌려 자신의 사람으로 키웠다.
그럼에도 형님이 갖고 있는 기사단의 무력을 뛰어넘기가 쉽지 않아서 언젠가는 꼭 쓰일 날이 있을 거라 생각하며 인내했다.
'왕자, 그놈만 아니었어도 내 손으로 형님을 죽이는 동족상잔의 죄는 짓지 않아도 됐을 것을....'
형님의 젊었을 적 모습과 똑닮아 있어서 얼굴 볼 때마다 기분이 나빴다.
하지만 그 녀석과 대화를 몇 번 나눠보면서 역시 왕자는 형님이 아니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왕자를 무서워 할 이유도, 두려워 할 이유도 없는 것이다.
얼굴이 닮은 것 뿐이지 형님에게 있는 특유의 광기가 왕자에겐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형님의 핏줄이라 해도 분위기까지 고스란히 물려받지는 못한 것이다.
'형님, 내가 그런 놈에게까지 왕좌를 빼앗겨야겠습니까? 나도 왕좌에 어울리는 핏줄을 타고 난 놈입니다. 그러니 얌전히 왕좌를 내게 내놓으세요. 나는 그럴 자격이 있는 사람입니다.'
으드득ㅡ
조카님의 피를 손에 묻히게 될 것이다.
피의 길.
형님을 죽이고, 왕자를 죽이고, 아깝지만 기사단까지 모두 죽이는 선택.
이 계획을 실행한다면 가장 먼저 타켓이 될 이는 왕자였다.
'왕자부터 죽이고 놈의 손에 있는 그 이상한 물건을 최대한 확보한다. 그리고 기사단에서 적당한 인재를 빼오는 거다. 아니, 왕자를 살려서 두고두고 그 능력을 뽑아 먹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움직여야겠군."
귀족들이야 왕이 깨어났다는 말을 듣고 벌벌 거리고 있을 터.
멍청한 놈들을 데리고 일을 하기가 참 어렵다.
'형님은 어떻게 저런 놈들한테 일을 맡겼는지 모르겠군.'
한숨을 푹 쉬며 오드만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역시 왕이 깨어나니 일처리가 빠르게 된다.
'능력 하나는 기가 막히다니까.'
아마 귀족들은 왕이 왜 벌써 깨어나냐며 깜짝 놀랐을 것이다.
왕이 일찍 깨어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손을 썼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정리를 해놨으니 이제 왕이 깨어나서 상황을 정리해줄 차례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왕은 내 기대를 져버리지 않았다.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빠르게 일처리를 시작한 것이다.
'같은 편일 때, 일 맡기기 참 믿음직스러운 사람이긴 해.'
가장 먼저 한 일은 내게 본인의 유산을 넘기는 것이었다.
왕에게 물려 받은 중요한 것들을 언급하자면 기사단과의 계약이 이양 되었고, 미처 예상하지 못한 귀족과 왕족 사이에서 얽혀 있는 계약의 존재도 알게 되었다.
이걸 몰랐으면 정말 눈탱이를 맞았겠구나 싶을 정도로 중요한 계약서들이었다.
오드만 공을 지지하는 귀족들 중 많은 이들이 계약에 이름을 올리고 있었다.
왕이 분노한 것은 당연했고, 한 발짝 뒤에서 지켜보는 입장이 된 나는 왕이 이를 이용해서 귀족들에게 뭘 뜯어낼지 벌써부터 기대가 됐다.
'나는 그냥 재물을 뜯어낼 거라고나 생각했는데....내가 왕을 잘못 봤구나.'
왕이 걸어가는 길에 피가 흘렀다.
오드만 공에게 넘어간 귀족들 중 왕궁에 있던 귀족들이 순식간에 붙잡혀와 감옥에 갇히거나 처형을 당했다.
피가 흐르기 시작한 왕궁에 귀족들은 몸을 움츠리고 최대한 쥐 죽은 듯이 숨을 멈췄다.
왕자를 위해 왕이 독하게 피를 보고 있음을 모르는 이가 없었다.
그리고 오드만 공도 수십 년을 함께 했던 동생이라서 그런지 자기 형이 어떻게 나올지 알았던 것 같다.
"오, 오드만 공이 바, 반역을 저질렀습니다!"
왕이 피를 보기 시작한 지 사흘이 흘렀을 무렵.
"으하하! 과연, 짐의 동생이구나. 살려 둘 생각이 없음을 알아차렸겠지."
오드만이 사병을 이끌고 왕궁을 쳐들어왔다.
"어디까지 뚫렸느냐?"
"제 2궁 성문까지 밀고 들어왔습니다. 송구합니다."
"괜찮다. 충분히 그럴 녀석이라는 걸 알면서도 미리 말해두지 않았던 거니까."
"괜찮은 건가요?"
역사 속에서 들어만 봤던 반역.
그걸 직접 목격하게 된 게 익숙하지 않아 걱정이 됐다.
"걱정하지 말거라, 왕자야. 녀석이 오래 전부터 귀여운 짓을 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답지 않게 핏줄이라고 눈 감아줬었지. 짐의 업보이니, 가기 전에 깔끔하게 해결하고 끝내마."
"...오드만 공이 이렇게 할 거라는 걸 알고 일부러 막지 않으신 거군요. 덫을 놓은 거였어요."
이건 100% 왕궁에 일부러 들어오게 만든 거다.
그의 사병이 도망치면 골치 아파지는 건 뒤를 이을 나일 테니까.
오드만의 손이 닿아 있는 이들을 깔끔하게 몰살 시키기 위해 폐쇄적인 왕궁 안으로 들어오도록 기다린 거다.
왕이 내 추측이 마음에 들었는지 매우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