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738 - #96. 진해솔 (42)
사절단에게 융숭한 대접을 하라고 했던 황제의 말은 진심이었는지, 이후로 황제는 사절단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사절단은 연회 내내 불편한 티를 팍팍 내면서 가시 방석에 앉은 듯한 태도를 취했다.
하지만 황제는 그들의 불편한 태도를 아랑곳하지 않았다.
적극적으로 연회를 웃으며 즐겼고, 그런 황제의 곁에 선 귀족들도 덩달아 연회를 즐겼다.
연회장에서 웃지 못하는 사람은 사절단밖에 없었다.
"후궁마마들의 재주가 참으로 아름답고 대단하신 것 같습니다."
"하하, 그러게 말입니다. 가끔은 이렇게 재주를 뽐낼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는 것도 좋아 보입니다."
연회장에서 보여주는 무희들의 춤사위도 칭찬 받아 마땅했지만, 황제의 후궁이 보여주는 무대는 과할 정도로 칭찬이 쏟아졌다.
오늘 연회장에서 황제의 눈에 띈 후궁이 다시 한 번 그와 잠자리를 가질 수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후궁들은 갑작스러운 사절단의 방문으로 마련 된 연회장의 무대 위에서 이를 악 물고 무대에 임했다.
'저 여인들이 전부 후궁이라는 겁니까?'
'황제가 여성 편력이 심하다는 소문은 들었는데, 이 정도일 줄은 몰랐군요.'
사절단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후궁들의 무대에 인상을 피지 못했다.
황제의 아랫도리가 천하통일 할 만한 능력을 지녔다는 황당한 소문이 있었는데, 사절단은 그 소문이 과대 포장 되었다고 생각했다.
칭제 선언을 하면서 다소 부족할 수 있는 황제의 위엄을 살리기 위해 이런저런 소문을 만들어내는 것은 특별할 것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쯧쯧쯧, 불쌍하군.'
그나마 이쪽은 황제가 남성이라서 나은데, 게오스 제국은 여황제인지라 후궁에서 잊혀진 채로 말라 죽어 가는 남자가 많았다.
사절단은 후궁들의 무대를 구경하면서 기름진 음식엔 손도 대지 않고 술만 퍼마셨다.
이대로 돌아갔을 때, 황제에게 어떤 말을 하면 좋을지 막막했다.
'사실대로 말한다면...과연 황제께서 믿으실까?'
황제가 평민들 사이에서 자랐다는 것을 미처 고려하지 못했다.
본디 고귀한 것들은 자기보다 못한 자들의 모욕을 참아내지 못하는 법이었다.
'황제가 되어도 예전 기억이 남아 있어서 참을 수 있었던 건가.'
오히려 급격한 신분 상승으로 허세에 찌들어 있을 거라 예측했었다.
사람이라는 게 그렇지 않은가?
갑자기 분에 넘치는 대우를 받으면 성격이 바뀔 수밖에 없다.
자신이 당했던 모진 대우들과 고생을 보상 받기 위해.
과거 추잡했던 자신을 숨기기 위해 공작새처럼 자신을 더 꾸미는 거다.
'좋지 않구나...좋지 않아...'
연회가 계속 될수록 사절단의 말수는 점점 더 줄어들고, 술은 빠르게 줄어들었다.
"우리 사절단들은 연회를 잘 즐기고 있는가?"
차라리 없는 사람 취급을 당했으면 좋겠는데, 적당히 흥에 취한 황제가 사절단에게 관심을 주었다.
"......."
사절단원 모두 예상치 못한 대접을 받고 있는 게 떨떠름해서 주량을 생각하지 않고 술을 마셨던 지라 고운 말은 나오지 않았다.
"융숭한 대접을 해주라 하여 기대했는데, 잘 모르겠군요. 제국에선 이게 융숭한 대접인가 보다 하고 있습니다."
"이런, 우리 사절단들이 연회를 제대로 즐기지 못하고 있나 보군. 그래서야 되겠는가? 그대들에게 술 한 잔씩 내리지."
"...예."
황제가 술을 따라서 궁인이 술잔을 날랐다.
술을 한 잔씩 받아 마신 그들은 깜짝 놀라 마신 술잔을 바라봤다.
"그대들을 위해 특별히 준비한 술이라네. 어떠한가?"
"...맛이 좋군요."
"하하! 그렇지? 더 마시고 싶어 하는 것 같으니 사절단에게 술을 가져다주거라."
"예."
사절단은 황제가 내린 술을 차마 거절하지 못했다.
이토록 향기롭고 목 넘김이 깔끔하면서도 정신을 맑게 해주는 술은 처음이었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황제가 내린 술병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헛!"
"억?"
"이게 왜 벌써..."
정신을 차린 사절단은 이제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는 말에 부정도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낭패다!
고작 술에 홀려서 이런 실수를 하다니!
사절단이 우왕좌왕 하는 모습을 보며 황제가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 ♧ ♧
사절단 놈들 얼굴 구겨지는 거 봐라.
'통쾌하네.'
목이 날아갈 것을 각오하고 온 놈들에게 제대로 골탕을 먹여 주었으니 기쁘지 않을 수가 없다.
저놈들이 내게 무례하게 행동하는 건 자기 황제를 위한 일이었다.
그걸 알아서 그런지 어떤 무례한 행동을 해도 화가 나지 않았다.
'오히려 저걸 어떻게 엿 먹여줘야 될까 고민 됐지.'
일단 사절단을 모시는 궁인들에게 저놈들이 말도 안 되는 걸 요구하면 확실하게 거절을 하라고 말해뒀다.
'상황이 이렇게 됐으니 저놈들은 깽판을 치고 싶어질 거야.'
가령 궁인들을 희롱한다거나, 일부러 시비를 걸고 다닌다거나 하는 일 말이다.
그들이 그런 행동을 할 때 막아 설 수 있는 건 기사들 뿐이라 생각했다.
해서 그들 곁을 기사들이 24시간 지키도록 하라고 명령을 했다.
그래서 그런지 여태까지 이상한 짓을 한 적은 없다고 한다.
'그래도 꿍꿍이는 있어 보였지. 단순히 나를 도발하려고 사절단을 보내진 않았을 거야.'
황제의 친서를 보내고자 사절단을 보낸다?
그것도 한참 전쟁을 하고 있는데?
분명 아직 숨기고 있는 무언가가 있는 거다.
곰곰이 녀석들의 노림수가 무엇일지 고민해봤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놈들이 노릴 만한 게 하나밖에 없었다.
'친서에 적어뒀던 저주받이 인형, 그게 진짜 목적일 수도.'
원래 등잔 밑이 어두운 법이라 하지 않았는가?
내 입장에선 언제든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저주받이 인형'이지만 게오스 제국에서는 그림의 떡이었을 것이다.
게오스 황제라면 호기심이 생겨서 하나 구하고 싶었을 수도 있다.
'고작 물건 하나 구하겠다고 신하들 목을 대나 버리는 건 이해가 안 가는 일인데...'
이런 생각은 소시민적인 내 입장에서야 할 만한 얘기고, 황제 입장에서는 상황이 좀 다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사람 목숨보다 내 인형을 더 가치 있게 생각할 수 있지. 황제한텐 신하 목숨이 귀한 물건이랑 크게 차이가 없을 테니까.'
신하와 호기심을 자극하는 물건.
'교환할 가치가...없는 건 아닐 거야.'
내가 황제에 오르게 되면서 황족들이 찾아와 축하를 해준 적이 몇 번 있다.
그때 잠깐 대화를 나눈 것이지만, 나랑은 아예 생각 자체가 다르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었다.
계속 볼 일 없는 사람들이니 앞으로 얌전히 지내라는 말만 남기고 보냈었는데, 적국 황제를 이곳 황족들과 엇비슷하다 여기고 생각하니 그럴 듯한 상황이 나왔다.
'적국 황제가 이상한 능력을 쓴다는 데 그걸 확인 안 해볼 황제가 어디있겠어.'
나라도 무조건 알아오라고 신하들을 닦달했을 것 같다.
'나를 알고 적을 알아라!'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사절단을 보낸 것은 '나'에 대한 호기심과 '능력'에 대한 호기심이 더해져 만든 결과물이 아니었을까?
'역시 공급량을 조절하길 잘했네.'
무분별하게 물건을 풀었으면 저쪽에서 자체적으로 물건을 구했을 것이다.
그럼 굳이 사절단을 보내지도 않았을 거다.
그리고...
'저주받이 인형을 구하려고 재물을 꽤 많이 가져왔을 거야.'
나는 사절단의 주머니 사정이 궁금해졌다.
'하도 달라고 닦달을 해서 제법 풀었으니 그 중에 하나는 거래가 가능할 거야. 그걸 얼마 주고 구매할지는 사절단 능력에 달린 일이고.'
귀족들이 자꾸 팔아달라고 떼를 써서 어쩔 수 없이 팔아준 게 몇 번 정도 있다.
그렇게 판 걸 전부 사용하진 않았을 테니, 아마 쟁여둔 게 있는 귀족에게 사절단이 은밀히 접근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그 값은 적어도 내게서 물건을 가져갔을 때보다 훨씬 비싼 값으로 거래가 될 것이다.
'적대국과 거래니까 위험 부담금으로 왕창 뜯어내겠지.'
그리고 난 그렇게 귀족들 입에 넣어질 사절단의 주머니가 아까워졌다.
'굳이 귀족들 배를 불려야 하냔 말이지.'
저주받이 인형으로 귀족들에게 뽑아 먹은 재물들로 재미를 봤던 나는 사절단의 주머니를 다른 사람에게 뺏기고 싶지 않았다.
지어 놓은 후궁전보다 지어야 하는 후궁전이 더 많았으니 말이다.
'궁만 지으면 단가? 후궁들도 먹여 살려야 할 거 아냐? 후궁이 애를 낳으면 그 애들도 먹여 살려야 하고.'
물론 황궁에 돈이 부족하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긴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재물을 모으는 것에 소홀이 할 수는 없었다.
앞으로도 저주받이 인형은 두고두고 황실의 재산을 늘려 놓는 효자 노릇을 할 텐데, 그 이익을 남과 나누는 건 호구짓이었다.
'여기서도 집 한 채 값으로 거래가 되는데, 이걸 다른 나라에 팔면 얼마를 받아야 하는 거지?'
저주받이 인형을 적대국에 파는 게 찜찜하지 않냐고?
오히려 저주 받이 인형이기에 거리낌 없이 거래를 할 수 있는 거다.
저주받이 인형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본인에게 이득이 될 수도, 오히려 역효과를 얻을 수도 있는 물건이었으니까.
오히려 내 물건이 게오스 제국에 널리 퍼져서 혼란을 불러 일으켜줬으면 좋겠다.
'거기다가 두둑한 돈도 벌고 말이야.'
원래 돈은 무역으로 버는 거 아니겠나.
여기서도 귀해서 돈을 주고도 못 구하는 물건이다.
그쪽으로 가면 단순히 집 한 채가 아니라 몇 채 이상으로 뻥튀기가 될 것이다.
연회가 끝나고 깊은 새벽.
오늘 연회에서 가장 무대를 잘 한 후궁이 방에서 날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바로 방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재상을 불러오게. 상의할 것이 생겼다."
"예, 폐하."
벌써부터 심장이 두근거린다.
아주 제대로 바가지를 씌워야겠다.
더럽게 치사해도 한 번 맛본 것을 잊지 못해 계속 찾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일단 게오스 제국에 미끼를 던져 놓고, 다른 나라도 슬쩍 발을 담궈놓는 게 좋으려나?'
얼마 후, 재상이 내 부름을 듣고 도착했다.
"한참 연회를 즐기고 있었을 텐데, 불러서 미안하네."
"아닙니다, 폐하. 술에 취해 좋지 못한 모습을 보여드려 송구할 따름이옵니다."
"짐도 취해 있으니 걱정하지 말고, 내가 곰곰이 생각하다가 자네의 도움이 필요한 것 같아 불렀네."
나는 지금까지 궁리한 생각을 그에게 공유했다.
원래 돈 만지는 일을 하는 건 아무나 맡겨선 안 되기에 고민을 많이 한 인선이었다.
말이 통하는 유능한 귀족을 찾는 게 정말 어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