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751 - #96. 진해솔 (55)
"폐하께서 포로로 들어왔던 기사들을 모두 후궁으로 삼으셨다는 거 들으셨나요?"
"왜 모르겠어요? 요즘 그걸로 하루 종일 떠들썩한데."
"오랜만에 후궁전이 바빠지겠네요."
"총 몇 명이나 들어온다고 하나요?"
"145명이요."
"히익!"
"당분간 폐하 그림자도 못 보겠네요."
"히유우..."
황제에겐 이미 수많은 후궁이 존재한다.
그녀들은 황제가 새로 지은 후궁전에 기거하며 하루를 보내는데, 폐하의 그림자를 보는 것이 하늘에 별 따는 것보다 어려운 지라 서로 외로움을 달래고자 친분을 나누곤 하였다.
비교적 초반에 후궁으로 들어 온 여인들은 서로 신경전을 하며 황제의 총애를 다투곤 했지만, 곧 황제가 후궁들을 들이는 걸 보고 기싸움을 하지 않게 됐다.
'싸워서 뭐해? 황제 폐하는 오늘도 새 여인을 들였을 텐데.'
'우리 중 누구도 총애를 하지 않으시는데, 뭐하러 싸우냐고. 그 시간에 황제 폐하의 눈에 들 방법을 궁리하는 게 낫지.'
누구도 총애하지 않는 황제 폐하의 행동 덕분에 후궁전의 기싸움이 멈춘 아이러니가 벌어진 것이다.
이번에도 봐라.
포로 귀족 출신으로 후궁이 된 여인들의 숫자가 무려 145명이라고 한다.
그중에는 평민 출신도 슬그머니 끼워져 있다고 들었다.
"폐하께서는 신분고하를 가리지 않고 여인이면 다 안으려 드시네요."
"예쁘게 생겼다고 하더라고요."
"어찌 그 더러운 것들을..."
예쁘게 생긴 여자들을 광산 노예로 쓰긴 아깝다며 후궁에 들어 앉혔댄다.
어릴 적부터 궁에서 자라 온 궁인들은 보아 줄 수 있어도, 바깥에서 평민으로 자랐을 그들까지 후궁에 앉히는 건 좀 충격이었다.
"그래도 다행히 저희들이 지내는 곳과는 거리가 떨어진 곳에 머물게 한다잖아요."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그 사람들이 우리한테 해코지라도 하면 어떡해요?"
"게오스 제국 사람들은 엄청 문란하고 폭력적이라던데..."
"으으, 막 가까이에서 대화를 나눠야 하는 일이 생기는 건 아니겠죠? 그런 일은 없었으면 좋겠는데."
그나마 다행인 것은 황제도 그녀들이 불편해 할 것을 알았는지 그들이 지내는 곳을 분리 시켜줬다는 점이다.
새로 지어서 최신식으로 꾸며져 있고, 황제가 기거하는 궁과 비교적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는 후궁전과 달리, 그들이 머물 곳은 다른 용도로 사용하던 궁을 후궁전으로 급하게 바꾼 곳이었다.
포로로 들어 온 입장이다 보니, 기존의 후궁들과 대우가 다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황제는 차별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기존의 후궁들에게 차별로 느껴질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듯 했다.
"다들 왜 이렇게 기운이 없어요?"
"아! 예샤님, 어서 오세요."
"이쪽에 앉으셔요."
후궁들이 재잘재잘 새로 들어 온 후궁에 대해 얘기를 나누다가 뒤늦게 나타난 후궁 예샤의 등장에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반겼다.
후궁 예샤는 모두를 총애하지 않고 공평하게 다루는 황제폐하와 가장 많은 잠자리를 가진 후궁이었다.
황제가 그녀와 여러 차례 잠자리를 갖는 이유가 가문에서 제공하는 정보들 덕분임을 알면서도 함부로 굴 수가 없었다.
황제와 잠자리를 자주 가진다는 의미는 그녀가 황제의 아이를 임신 할 확률이 높다는 걸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폐하의 아이만 임신할 수 있다면...평생 걱정하지 않고 살 수 있게 되는 건데.'
적어도 황제 폐하는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여인에게는 꾸준한 관심을 주고 있었다.
그 후궁이 무언가 대가를 내놓을 필요도 없었다.
가만히 있다간 황제의 기억 속에 사라질 수도 있다는 생각에 가슴 졸이고 살아야 하는 후궁 입장에선 그것만큼 부러운 일이 없었다.
"예샤님은...괜찮으세요?"
"음? 왜요?"
"폐하께서 이번에 또 왕창 후궁을 들이셨잖아요."
"포로들 후궁으로 들인 거 말하는 거에요?"
"예. 100명이 넘게 들어 왔다는데, 그 사람들을 다 한 번씩 안으려면 얼마나 오래 걸리겠어요? 당분간 후궁들은 폐하 옷자락도 못 볼 것 같아서 상심이 커요."
정보를 대가로 황제의 밤을 샀던 그녀가 이 소식을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몰랐던 것처럼 새침하게 대답했다.
"뭐 그런 걸로 신경을 써요? 어차피 한 번 안고 말 것들인데. 게오스 제국이 포로를 데려가지 않으니 어쩔 수 없이 처치 곤란한 자들을 후궁으로 삼은 것 뿐이에요."
"아..."
"그냥 죽이시면 될 텐데, 궁에 흘렀던 피가 아직 마르지 않았다며 자비를 보여주신 거죠."
"그럼...그들을 총애를 하시진 않을 거라는 거죠?"
"당연하죠. 적대국 출신인 후궁을 총애 하실 만큼 감정적으로 흔들리시는 분이 아니시니까요."
예샤의 설명을 들은 후궁들의 안색이 그나마 편해진다.
"근데 후궁이 더 늘어나는 일에 신경 쓸 겨를이 있어요? 곧 폐하께서 참관하시는 연회 무대 연습은 어쩌고 이러고들 있어요?"
훌륭한 춤을 연회 무대에서 보여주어 황제 폐하의 시선을 끄는데 성공했던 후궁이 꾸준히 재주를 뽐낼 수 있는 무대를 만들어 달라고 요청해 생긴 연회 무대.
그날은 가문의 힘을 빌려오지 못하는 후궁들에게 유일하게 남은 기회였다.
"열심히 준비 중이긴 한데..."
"후궁들이 많이 들어와서 쓸모없어진 거 아닌가 싶어요."
"맞아요, 폐하의 눈길 한 번 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쯧쯧, 다들 폐하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르네요."
예샤가 혀를 차며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태도를 취했음에도 후궁들 사이에선 동요가 하나도 없었다.
그녀에게 밉보여 봤자 좋을 게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웬만하면 말 안 해줄까 했는데, 여러분들이 너무 안타까워서 알려줄게요."
"어떤...?"
"폐하께서 춤에 관심이 많으세요."
"춤에요?"
"무대를 진심으로 즐기시는 분이라고요. 그러니까 선뜻 연회를 열어 달라는 청도 들어주신 거잖아요."
예샤는 전혀 몰랐다는 듯 깜짝 놀라는 후궁들을 보며 한숨을 포옥 쉬었다.
"폐하의 눈에 들려고 노력한다는 사람이, 정작 폐하께서 무얼 좋아하시는지도 모르고 있으면 어쩌자는 거에요? 정말 안타까워서 못 살겠네. 다들 요령 좀 부려봐요. 우직하게 군다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요."
예샤는 그렇게 후궁들의 찹찹했던 기분에 왕창 흙탕물을 끼얹어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이 찌뿌등하니, 좀 걸으면서 운동 좀 해야겠네요. 먼저 가볼 테니 대화 나눠요."
"....."
"....."
정작 자신은 춤 한 자락 못 추는 똑딱이면서 말이다.
남겨진 후궁들은 선뜻 입을 열지 못한 채 눈알을 굴렸다.
"그...춤을 잘 추는 후궁이 누구였죠? 저번에 연회에서 춤을 잘 춰서 폐하와 밤을 보냈던 적 있는 후궁이 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 후궁이 친하지도 않은 우리들한테 춤을 가르쳐주겠어요? 경쟁이잖아요."
경쟁이라는 말에 시무룩해져서 후궁들이 고개를 푹 숙였다.
"우리들 중에 춤 실력이 엄청 뛰어난 분은 없죠?"
"춤 말고 다른 재주로 무대를 꾸며보는 건 어떨까요?"
"폐하께서 춤에 관심이 많으시다는데 다른 걸요?"
"어차피 춤은 저희들 실력으로는 어림도 없잖아요."
"그건 맞아요."
"우리끼리 손을 잡고 뭔가 해보자구요. 이대로 올려다 보기만 할 수는 없잖아요. 무대를 준비하면 일단 폐하께서 봐주시기는 하니까. 뭐든 눈에만 들면 되는 거 아니겠어요?"
1등이 아니어도 폐하의 눈에 들기만 한다면 밤에 내 님과 밤을 보낼 수도 있는 거 아니겠는가?
다른 후궁들도 굳이 1등만 노리고 있는 건 아니었다.
자기 실력을 뻔히 알다 보니 순위권에 드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거기에 한 발짝 더 나아갔다.
"생각해봐요. 다들 무대 위에서 춤추고 악기만 연주할 텐데, 우리가 다른 걸 하면 눈에 확 뛰잖아요."
"근데 무대에서 뭘 보여드리죠?"
"음~ 연극을 하는 건 어때요?"
"여, 연극을요?! 그걸 지금 당장 어떻게 준비해요."
"맞아요. 시간이 너무 촉박해요!"
"당장 오는 연회에서 보여주겠다는 게 아니라 다음 연회를 노리는면 되지 않겠어요?"
"!!!"
"완전 좋은 생각 같아요."
후궁들의 머릿속에 '이건 된다!' 라는 생각이 스쳐갔다.
"대신 이건 절대 다른 사람한테 들키면 안 돼요. 알죠?"
"절대절대 다른 사람한테 말하지 않을 거에요."
"궁인들 눈과 귀에서 숨기는 건 쉽지 않을 텐데 어쩌죠?"
"방법을 찾아봐야죠. 그리고 연극을 하려면 인원이 더 필요하니 함께 할 후궁을 좀 더 찾아봐요. 대신 입이 무겁고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해요."
"네!"
"저도 한 번 알아볼게요."
황제의 눈에 들기 위한 후궁들의 연회가 한층 더 치열해질 것을 알리는 신호탄이 올라갔다.
♧ ♧ ♧
포로들을 후궁으로 삼기로 한 건 다시 생각해봐도 똑똑한 선택이었다.
"조금씩 진지를 뒤로 물리고 있긴 하나, 완전히 후퇴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자존심 때문에라도 게오스 황제는 군대를 쉽게 물리지 않을 것 같은데...."
내가 게오스 황제였다면 과연 어땠을까?
일단 전쟁부터가 내 스타일이 아니니 그런 전재 자체가 성립이 되지 않는다.
"소신의 생각도 같사옵니다."
"본국에서 더 이상 지원을 받을 수 없을 거란 걸 알고 사기가 말이 아닐 겁니다. 게오스 황제는 자존심 때문에 군대를 완전히 후퇴시키지 않은 대가를 받아야 합니다."
"드디어...!"
우리가 제국의 내전에만 신경 쓰고 있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우리의 땅 위에 게오스 제국의 병사들이 진을 치고 있는 상황이지 않은가?
전쟁터에서 그들과 대치하고 있는 병사와 백성들을 생각하면 다리를 뻗고 잘 수가 없었다.
"이 땅 위에서 감히 짐의 백성에게 칼을 겨눈 것들에게 후회를 안겨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땅 위를 편하게 떠나도록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이곳을 떠날 때, 적어도 육신은 두고 가야 하지 않겠는가?
물론 전부 죽이겠다는 뜻은 아니다.
포로를 왕창 데리고 와서 후궁으로 삼아야 하지 않겠는가?
게오스 제국이 내 미션에 이토록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고 있는데, 성의를 무시하는 것도 나쁜 일이다.
'버스 좀 타보자.'
나는 오랫동안 기다려 온 제국의 군대에게 총 공격을 명령했다.
방심하고 있을 적 군대를 기습하여 일망타진을 노린 것이다.
제국과 대치하고 있던 군대를 잃는다면, 게오스 황제도 내전에만 집중해선 안 된다는 걸 깨닫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