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752 - #96. 진해솔 (56)
타닥- 타닥- 타닥-
진지를 구축한 채로 대기하라는 명령이 떨어진 게 몇 주째인가?
병사들이 무의미하게 물자만 축 내고 있는 현 상황을, 사령관과 지휘관들은 비관적이게 봤다.
그들은 자체적으로 또 다른 창구를 통해 본국의 상황을 전달 받고 있었다.
"내전이 터졌는데, 왜 폐하께서는 계속 여기서 대기만 하라 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돌아가야 합니다. 나라가 뒤집어졌는데 전쟁이 무슨 소용이란 입니까?"
"폐하의 명령을 거부하고 회군을 하자는 겁니까? 돌아가도 폐하께서 우릴 살려두지 않을 겁니다!"
"이곳에서 무의미하게 대기하다가 적대국에게 당해 죽는 것보단 유의미한 죽음이 될 겁니다. 이대로 여기서 대기하면 제국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물자를 모두 사용하고 굶어 죽든지, 제국이 보낸 병사들에게 죽든지.
둘 중 하나일 것이 분명했다.
"적어도 돌아가면 병사들은 살 수 있습니다."
지휘관들은 회군의 책임을 져서 죽을 지라도 수많은 병사들은 구해낼 수 있는 선택을 하길 바랐다.
하지만 책임 져야 할 목숨이 한 둘이 아니었던 사령관은 부하 지휘관들의 재촉에도 쉽사리 선택을 할 수가 없었다.
"좀 더 생각해 보겠다."
사령관이 끝내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축객령을 내렸다.
"으아아아악!!!"
"기습이다!!! 기습이다!!!!"
그때! 바깥에서 엄청난 소란이 벌어졌다.
콰아아앙!!!!
지축을 뒤 흔드는 폭발 소리와 비명, 그리고 기습을 알리는 아군의 피 토하는 비명에 지휘관들은 직감했다.
'제국이 움직였다!'
사령관이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시간을 끄는 사이, 제국이 먼저 움직여 버린 것이다.
"마, 막아야 한다. 막아야 해!"
사령관이 다급하게 외쳤다.
지휘관들은 우왕좌왕하며 혼란에 빠져 있는 아군 병사들을 정신 차리게 하기 위해 서둘러 바깥으로 움직였다.
천막 바깥으로 나온 지휘관들이 가장 먼저 목격한 것은 불에 활활 타오르고 있는 파이어 볼 무더기가 아군 진형에 떨어지고 있는 모습이었다.
쿠웅!!!!
콰아아앙!!!!!!
끄아아아악!!!
살려줘!!!!
아악!!! 아아악!!!
죽여라!! 모조리 죽여!!!
와아아아!!!!
수풀 사이로 튀어 나오고 있는 적군의 숫자가 예상을 초월하고 있었다.
'이건 우릴 무조건 다 잡아 죽이겠다고 결심하고 온 게 분명하다!'
맞서 싸우는 것이 맞을까, 아니면 후퇴를 명령하는 게 맞는 걸까?
지휘관들이 병사들을 열심히 다독이면서 진형을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혼란해진 전쟁터에서 아군과 적군을 구분하며 진형을 만드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사령관은 전장을 확인하고 패배를 직감했다.
이대로 계속 전투를 해봤자 피해만 커질 뿐이었다.
"후퇴, 후퇴하라!! 후퇴하라!!!!"
"후퇴하라!!!!!!!!!!!"
"후퇴하라!!!!!!!!!"
사령관의 명령을 들은 병사들이 후퇴를 외쳤다.
가뜩이나 최악으로 떨어진 사기에 적군의 기습에 제대로 당하기까지 했다.
계속 대치해봤자 승리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살아남기 위해 도망쳐야 할 때였다.
♧ ♧ ♧
"저쪽으로 갔다. 계속 쫓아!!"
'젠장!!'
입을 막고 최대한 숨을 참았다.
군대가 뿔뿔이 흩어지면서 사령관은 예상치 못한 위기를 맞이했다.
그를 따라 움직인 병사들보다 추격해 오는 적국 병사가 훨씬 많았기에 최대한 숨어서 들키지 않게 노력하는 수밖에 없었다.
한 차례 위기를 넘긴 사령관은 병사들을 이끌고 다시 도주를 시작했다.
부스럭-!
"헉!"
"억?!"
허나 운이 나빴던 걸까?
하필 도망치고 있는 와중에 적군과 정확히 정면으로 마주치고 말았다.
"어, 어어어! 저, 적군! 여, 여기 있...끄륵!"
촤악!
사령관은 적군 병사가 소리를 치기 전, 검으로 목을 그어버렸다.
하지만 이미 적군 병사의 목소리를 가까이에 있던 다른 병사가 들어버린 상태였다.
"찾았다!"
"저기야!! 잡아야 된다!"
"사령관이다! 쏴!!!"
슈슈슉! 슈슈슉!!
순식간에 화살이 사령관과 병사들에게 쏟아졌다.
사령관을 도주 시키기 위해 병사들이 살아 있는 방패가 되고 있었다.
"큭, 젠장!!!"
"달려야 합니다! 아악!"
사령관이 죽으면 병사들의 목숨도 마찬가지로 다 죽는 거였다.
병사들의 희생을 밟고, 사령관은 필사적으로 달렸다.
하지만.
"씨바아알!!!!"
도주하던 길목 앞에서 고고하게 서 있는 적군 기사와 병사들을 본 순간, 사령관은 욕설을 참지 못했다.
시원하게 욕설을 뱉어낸 그는 적군 기사를 향해 허탈하게 물었다.
"하...쥐새끼처럼 몰아 넣어진 건가?"
"기습하기 전부터 이미 도주 경로에서 모두 대비를 해놓고 있었다."
"완전히 우릴 죽일 생각이었구나."
"패잔병들은 놓쳐도 사령관과 지휘관은 절대 못 보내지."
사령관은 질끈 눈을 감았다.
반항을 해봤자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항복하겠다."
"역시 사령관이라 그런지 대처가 좋군. 상황 판단을 잘 해. 거칠지 않게 포박해라."
"예!"
'도대체 신께서는 게오스 제국을 어찌 하시려고...'
애초에 자신이 회군을 망설이지만 않았어도 많은 목숨을 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지난 날을 후회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령관은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흘리는 병사들을 안쓰럽게 바라봤다.
이들의 앞날은 결코 밝지 않을 것이다.
♧ ♧ ♧
"폐하아!!! 폐하아아!!!!!!!"
게오스 제국의 군대가 제국에 의해 처절하게 패배 했다는 소식은 다소 늦게 패잔병이 게오스 제국으로 돌아오면서 알려지게 되었다.
"뭐, 뭐라고? 다 죽었다고??"
게오스 황제는 내전 때문에 잠시 잊고 있었던 군대가 모두 죽어버렸다는 소식을 쉽사리 믿을 수 없었다.
“죽거나 포로로 잡혔다 하옵니다. 패잔병들이 어떻게든 국경을 넘어오고 있으나, 멀쩡한 이를 찾기가 힘들다 하옵니다."
쾅!!
“그 말을 지금 믿으라는 것이냐? 다~ 죽었다고?? 그 많은 짐의 군대가 전부 다?!”
게오스 황제는 본디 태어났을 때부터 고귀한 존재로 뭇 사람들에게 존경과 흠모를 받아 왔다.
누구도 그녀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 하였고, 그녀가 하는 일에 시시콜콜 방해를 해오는 귀족들 조차도 그녀 앞에서는 고개를 숙인 채 존중과 존경을 표하곤 했다.
황족으로 태어난다는 건 그런 것이다.
그들은 실패라는 것을 몰랐다.
항상 성공만 해왔기에, 게오스 황제는 갑작스러운 패배라는 단어에 쉬이 승복할 수가 없었다.
“왜??? 도대체 왜???”
“폐하….”
“어째서 짐의 군대가 패배를 한단 말이냐?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황제는 자신의 군대에 섞여 들어간 귀족 사병들을 떠올렸다.
게오스 황제의 머릿속에서 패배의 원인으로 꼬집을 수 있는 존재는 그들밖에 없었다.
“그놈들 때문이 분명하다. 이것들이 결국 죽어서도 짐의 발목을 잡아채는구나!”
신하들은 게오스 황제가 스스로 패배한 원인을 납득하는 것을 보며 질끈 눈을 감았다.
그들이 패배한 것에는 다른 이유가 있는 게 아니다.
그저 무능했기 때문이다.
황제파와 귀족파 지휘관 사이의 알력다툼과 확실하게 정해지지 않은 지휘 체계.
본국에서 내전이 터졌다는 소식의 전달로 인한 사기 저하와 무한으로 대기만 하라는 무책임 했던 황제의 대처까지.
모든 것이 패배의 원인이 되고 있었고, 이는 특별할 것도 없는 결과였다.
하지만 귀족들은 진실을 외면하고 황제의 자기합리화에 말을 맞췄다.
한 번 피를 보면서 쉬운 길을 경험해 본 황제가 또 다시 쉬운 길로 국정을 다스리려 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폐하, 이대로 전쟁을 계속 할 수는 없사옵니다. 사절단을 보내 휴전을 제시하심이 옳지 않겠사옵니까?”
“휴전?! 짐이 고작 휴전이나 하자고 이 사달을 만들은 줄 아는가!!”
왈칵 짜증을 터트린 황제는 씩씩거리며 거친 숨을 몰아 쉬었다.
그녀의 옆에 얌전히 앉아 있던 후궁이 찻잔에 따듯한 차를 쪼르륵- 부은 후, 황제의 앞에 조심스럽게 스윽 밀어 넣었다.
게오스 황제가 이를 보고 일그러트린 표정을 살짝 펴내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차 향기가 어지러웠던 황제의 심기를 차분하게 가라앉혀주었다.
“이렇게 허무하게 잃기엔 아까운 군대였거늘….”
이성을 잃고 날뛰어봤자 현실이 바뀌는 건 아니다.
이미 제국의 기습 공격으로 대군을 잃었다.
이젠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할지 생각해야 할 때였다.
’차라리 잘 된 걸지도 모른다. 그곳엔 귀족파에서 내놓은 병사들이 반이 넘지 않은가? 돌아와도 결국 짐의 손으로 죽여야 했을 것들이었어.’
그들에게 게오스 제국으로 돌아오라 명하지 못했던 것도 다 이유가 있었다.
적대국에 있을 때는 모두가 한 편이지만, 게오스 제국으로 돌아오면 그들은 분열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럴 바에야 계속 적대국에 남겨두고 전쟁을 끄는 용도로 쓰는 것이 맞았다.
물론 그렇게 하다가 제국에게 거하게 기습을 당해 모든 것을 잃게 됐지만 말이다.
“휴전 제의는 애초에 불가능 하다. 짐은 전쟁을 끝낼 생각이 없으니까.”
“폐하! 내전을 치르고 있는 지금, 제국과 전쟁까지 치르는 건 무리옵니다!”
“무리? 아니, 전혀 무리가 아니다! 지금 살살 눈치나 보고 있는 너희들이 알아서 사병을 내놓으면 충분히 두 가지 일을 치를 수 있다.”
“그건…!!”
귀족들은 사병을 맡겨 놓은 사람처럼 당당하게 내놓으라고 하는 황제를 보며 황당함에 말을 잇지 못했다.
사실 이미 오래 전부터 예상해오던 일이긴 했다.
‘언젠가는 내놓을 수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당당하게 빼앗아 갈 줄은 몰랐군.’
황제의 편에 서는 이유가 무엇인가?
자신의 것을 지켜내기 위함이다.
내전이 벌어지긴 했어도 귀족들은 황제의 저력을 잘 알고 있었다.
가주를 잃은 공신 가문은 자기네들 영지에서 왕처럼 지내느라 황궁의 압도적인 무력과 힘을 잊어버린 게 틀림 없다.
‘내전이 종료 되는 것은 그저 시간 문제일 뿐이다. 결국 황제가 승리한다.’
본인 영지를 독립시켜 왕이 되려는 귀족의 꿈은 이룰 수 없는 허황 된 꿈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기에 황제의 편에 서서 내전을 끝내기 위해 최선을 다 해 일하고 있었던 귀족들이다.
황제 본인이 갖고 있는 무력을 총 동원해서 내전을 종료 시킨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게오스 황제의 욕심이 도를 넘어섰구나!’
‘폐하께선 전쟁과 내전을 다 감당하려 하는 건가!?’
'폐하께서 욕심을 부리시는구나. 그 욕심에 희생 당하는 건 우리가 될 거다.'
적어도 둘 중 하나는 수습을 하고 다른 것을 정리하려 하는 게 올바른 선택이었다.
그들이 보기에 제국과의 전쟁은 지금 당장 치르지 않아도 되는, 급하지 않은 일이기도 했다.
진정으로 나라를 위한다면 내전을 수습 시키는 게 맞는 순서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