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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역전 세계의 아이돌-763화 (843/849)

Chapter 763 - #96. 진해솔 (67)

‘제국의 황제가 밀약을 지켜야 할 텐데….’

편전.

황제와 귀족들이 정치 대소사를 결정하는 곳이다.

그리고 게오스 제국의 새 황제가 된 그녀는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고 손톱을 까드득까득 깨물었다.

황제답지 않은 품위였지만, 이를 지적해야 할 귀족들의 사정도 썩 좋지는 않았기에 보지 못한 척 넘겨졌다.

“폐하.”

“으응?”

“어찌 하올까요? 공격하라고 명령을 내리시겠습니까?”

내전을 일으킨 귀족들을 막기 위해 영지로 파견 되었던 군대가 회군하여 침략을 받고 있는 제국의 군대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새 황제가 명령을 내리면 곧장 전쟁이 시작 될 것이다.

“지, 짐은 잘 모르겠다. 전쟁에 대해 아는 게 없어. 그대들이 의견을 모아서 어찌하는 게 좋을지 얘기를 해다오.”

결국 새 황제가 귀족들에게 매달렸다.

이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지만, 그녀가 매달릴 수 있는 사람은 귀족들 뿐이었다.

그들은 여태까지 황제와 함께 나랏일을 하던 사람이 아닌가?

적어도 수십 만 명의 목숨이 달린 일을 어떻게 명령 내려야 좋을 지 잘 알고 있을 것이라 믿고 있었다.

하지만….

“흠흠, 폐하. 이런 중차대한 일을 신하들에게 미루는 것은 군주로서 좋지 못한 일이옵니다.”

“위정자들은 폐하를 위해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사옵니다. 허니 폐하께서 옳다 생각하시는 일을 명령하시옵소서.”

귀족들은 이 전쟁에서 조금의 책임 소재도 지지 않으려고 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황제의 군대는 정상적인 모습이 아니기 때문이다.

귀족들이 황제를 바꾸자마자 가장 먼저 한 것이 바로 자기 사병들을 다시 영지로 돌아오도록 명령한 것이었다.

덕분에 지금 황제의 군대는 강제 징집으로 인해 덩치만 잔뜩 불려져 있는 풍선이었다.

그런 군대가 제국과 싸운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어째서 아무도 도움을 주지 않고 결정만 내리라고 하는 것인가! 정말 짐이 공격을 하라고 하면 할 것이오?”

“물론이옵니다. 게오스 제국의 병사들은 폐하의 명령을 받아 기꺼이 전쟁터로 나가알 것이옵니다.”

“그러다가 다 죽으면 어찌 하려고!!”

“위대한 게오스 제국을 위해 목숨을 받친 것이니 가문의 영광이 되겠지요.”

가문의 영광을 챙기는 것은 귀족들이나 하는 일이다.

아이러니 한 것은 전쟁이 벌어지면 가장 먼저 죽어 나가는 것이 평민이라는 점이다.

그들은 전쟁터에서 죽어도 아무런 보상도 받을 수가 없었다.

그저 황궁에서 던져주는 몇 개의 골드가 가족들에게 형식적으로 전달 될 뿐이지.

그 골드 마저도 대부분 영주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쥐꼬리만한 쌀이나 밀가루로 대체 되어 백성들에게 나눠질 것이다.

그것이 게오스 제국의 병사로 차출 된 이들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새 황제는 결국 책임 소재를 회피하는 귀족들을 이겨내지 못하고 말했다.

“제, 제국에 사신을 보내겠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여기서 제국과 전쟁을 하는 건 좋지 않을 것 같습니다. 지금의 군을 유지해야 내전을 일으킨 귀족들을 억제할 수 있지 않습니까.”

“게오스 제국의 군대는 패배하지 않을 것이옵니다.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패배를 언급하심은 옳지 못하십니다. 게오스 제국의 군대를 믿어주시옵소서!”

네 마음대로 하라고 말해서 내 마음대로 했더니 이젠 또 아니란다.

“허면 솔라 백작은 우리 군대가 제국의 군대를 밀어내고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입니까? 제국과 전쟁을 하는 게 맞겠어요?”

“…송구하옵니다. 폐하께서 소신의 뜻을 곡해 하셨나이다. 그런 뜻으로 말씀 올린 것이 아니옵니다.”

“방금 전, 우리 군을 믿으라 하지 않았습니까! 헌데 전쟁을 하라는 건 아니었다? 그럼 백작은 제국에 사신을 보내는 것에 동의하는 것입니까?”

“그저 폐하의 현명하신 판단을 믿고 있을 뿐이옵니다."

믿는 게 아니라 참견하기 싫은 거잖아!

'시발 돌겠네.'

새 황제는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한 욕설을 속으로 짓 씹었다.

끝까지 자신에게 책임을 회피하는 훌륭한 귀족의 자세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럴 거면 반대도 하질 말던가!

‘왜 그분이 폭군이 되었는지 알 것도 같아. 저런 것들을 상대 하려면 폭군이 될 수밖에 없었을 거야.’

네가 알아서 결정하라고 해서 큰 마음 먹고 사신을 보내겠다고 결정을 했더니 입을 조개처럼 다물고 있던 것들이 불에 데인 것처럼 입을 쫙 벌려서 바로 태클을 걸어온다.

그래서 그럼 넌 제국이랑 전쟁하는 게 맞는 것 같냐고 의견을 물었더니 그건 또 아니란다.

그럼 나보고 어쩌라는건데?

“도대체 그대들은 짐에게 뭘 바라는 것이오?”

답답한 마음에 어설프게 배우고 있는예의와 기품을 갖다 버리고 직설적으로 물으면.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성은이 방패를 내세운다.

쟤들은 할 줄 아는 말이 성은 밖에 없나보다.

“성은 망극하다는 말 말고 다른 말 좀 해보세요! 사신 보내는 걸로 하자는 겁니까, 말자는 겁니까!”

답답한 것들이 또 다시 입을 다문다.

황제는 과거 자신이 한 선택이 옳았던 것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내가 굳이 이 자리에 오를 필요는 없지 않았을까? 차라리 다른 황족에게 넘겼어야 했는데….’

그녀가 황제가 됐을 때, 나름 하고자 하는 일이 있기는 했다.

바로 폭군 황제로부터 핍박 받아왔던 피를 나눈 사촌들을 풀어주는 것이다.

‘지금도 매일 감사 인사를 담은 서신이 올라오고 있지.’

평생 누군가로부터 감시를 받아야 하는 인생이 얼마나 참혹하고 힘겨운지 잘 알고 있는 황제였다.

해서 황족들이 당하고 있는 감시를 모두 풀어주고, 자유롭게 살 수 있는 권한을 내려주었다.

황궁에 넘쳐나는 금은보화도 함께 내려주며 그동안 고생했던 것을 보상해주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게 황제가 바라는, 유일한 꿈이기도 했다.

‘더이상 하고 싶은 일도 없어. 그냥 다른 황족처럼 놀고 먹고 싶어.’

그저 편하게 살아가고 싶었을 뿐이다.

만나고 싶은 사람은 만나고, 누군가의 감시 아래에 살지 않을 수만 있다면 뭐든 다 좋았다.

헌데 웬걸!

황제가 되고 나니, 이건 또 다른 의미에서 감시를 당하는것 아니겠는가?

바로 그녀의 곁을 24시간 지키는 기사단과 궁인들의 존재다.

‘아…얼굴 뚫릴 것 같다. 너무 싫어.’

물론 그들이 예전처럼 폭군 황제에게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하기 위해 감시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날 보는 시선이 있는 게 싫어!’

하지만 황제의 자리에 오른 이상 궁인들을 데리고 다니는 것은 거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 보니 뒤늦은 후회가 드는 거다.

내가 굳이 선봉장에 설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후회.

‘지금 황족분들 중에 황제 자리에 관심 있는 분이 없을까? 나 바로 선의 해주고 내려올 수 있는데.’

선봉에 서지 않고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면, 그녀가 아닌 다른 사촌이 이 자리에 올라서 그녀를 풀어주었을 지도 모른다.

‘귀족들 너무 싫어. 말하는 것도 이상해. 나보고 어떡하라는 거야? 왜 말을 직설적으로 하질 않는 거지? 똑똑하다고 자랑하고 싶어서 저래?’

그래!! 나 못 배운 무식한 새끼다! 그러니까 말 좀 직설적으로 하라고!

버럭 외치고 싶지만, 그건 상상에서나 할 수 있는 일.

그녀는 오늘도 답답해진 속을 뚫기 위해 애꿎은 가슴만 주먹으로 퍽퍽 쳐냈다.

그리고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말했다.

“반대하는 사람이 없는 것 같으니 제국에 사신을 보내겠습니다. 그쪽에 가서 전쟁을 멈추는 대가로 무엇을 바라는지 알아오세요.”

귀족들은 그녀가 확실하게 명령을 내리자 할 말이 매우 많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거부하지 않았다.

드디어 게오스 제국의 골칫덩어리였던 제국과의 전쟁이마무리 단계에 들어선 것이다.

♧ ♧ ♧

제국에 보냈던 사신은 꽤 빠르게 돌아왔다.

제국은 이미 전쟁을 끝내는 대가를 전부 생각해두고 있었던 것이다.

새 황제는 한숨을 푹 쉬면서 서신을 펼쳐서 읽었다.

그리고 하나하나 읽어내려갈 때마다 한숨만 푹푹 쉬었다.

솔직히 은인이 요구하는 것들을 다 줘도 상관은 없었다.

그녀는 이것들이 얼마나 제국에 중요하고, 값진 것인지 가늠할 지식이 전혀 없었으니까.

그냥 좋은 것이니 달라고 했겠지…하는 태평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문제는 귀족들인데….’

제국 황제가 요구한 것들을 확인하면 분명 귀족들은 개거품을 물 것이다.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더 뜯어내고자 하는 자와 지켜내려는 자들의 싸움은 아귀지옥이나 다름없었다.

“제국의 황제가 요구안을 가져왔습니다. 하지만 짐이 보기에 과한 부분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귀족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의견을 들어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 중에서 내어줘도 될 것과 절대 지켜야 할 것을 알고 싶습니다.”

황제가 나름 열심히 신경써서 준비한 대사를 귀족들 앞에 내뱉었다.

본격적으로 협상을 위한 자리가 만들어질 때까지 시간이 많이 남은 상태였다.

그리고 귀족들은 제국의 황제가 요구한 조건들을 보자마자 거품을 물고 반대를 외쳐댔다.

“이것도 안 된다, 저것도 안 된다. 전부 다 안 된다고만 하시면 어쩝니까? 전쟁을 끝내려면 제국에 무언가를 넘겨줘야 합니다! 아직 포로 교환 문제는 운을 떼지도 못했어요!”

문제는 귀족들이 제국 황제가 요구한 것들을 모두 줄 수 없다고 못을 박아버렸다는 점이다.

땅은 이래서 안 되고, 공녀들은 저래서 안 되고, 배상금 요구도 너무 금액이 커서 안 되고.

전부 안 된다고만 하면 되는 게 뭐가 있단 말인가?

“이제부턴 안 된다고만 하시지 말고, 줄 수 있는 것을 말씀해보십시오. 이 중에 포기할 만한 것이 분명 있을 겁니다.”

황제는 하루가 1년처럼 느껴진다 생각하며 연신 한숨을뱉어냈다.

한숨에 시간이 들어 있다면 황제는 아마 폭삭 늙어버렸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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