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764 - #96. 진해솔 (68)
새 황제의 눈가를 시커멓게 만든 재 협상안이 만들어지고, 드디어 본격적으로 협상의 장이 열렸다.
각자 황제의 대리인이 되어 협상장에 나타난 귀족들은 치열하게 논쟁을 이어나갔다.
더 뜯어내겠다는 자와 어떻게 해서든 지키려고 발버둥 치는 쪽과의 싸움이었다.
하지만 사실 이건 뜯어내려는 쪽이 더 유리한 싸움이었다.
"싫으면 그냥 전쟁 하시든지요. 우리 제국은 언제든 게오스 제국을 상대할 준비가 되어 있소이다."
"큭...!"
"어찌할 겁니까? 더 이상 협상은 불가 합니다."
"...날이 저물었으니 다음날 다시 이야기 합시다."
협상은 하루로 끝낼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하루에 7~9시간을 아웅다웅하면서도 결론이 나지 않은 것도 그만큼 두 진형의 싸움이 치열했다.
"참 쪼잔하오. 숫자 1이라도 줄이려 하니."
"나는 1이라도 깎으려 하고, 그대는 1이라도 더 받아내려 하고 있지 않소. 누가 누구에게 쪼잔하다 하시오?"
서로에 대한 인신공격도 서슴이 없었다.
예의는 숫자 1이라도 줄일 수 있다면 얼마든지 팔아 먹을 수 있는 게 그들이었다.
이 싸움은 먼저 지치는 쪽이 패배하는 것이었다.
전쟁에서 패배했다고 해서 협상장에서까지 패배하라는 법은 없었다.
새 황제의 복장을 터지게 했던 귀족들이지만, 맡은 바의 일은 정말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그저 폭군에 길들여져 '책임'을 지는 것을 끔찍하게 싫어하게 되었을 뿐이다.
"목숨이라도 걸린 것처럼 구시는구만."
"크흠..."
귀족은 말해봤자 제 얼굴에 침 뱉기라는 듯 헛기침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하긴, 전대 황제께서 검술이 대단하셨다지?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귀족들 목을 똑똑 따셨다고. 그래도 이젠 새 황제가 올랐으니 목 달아 날 걱정은 안 해도 되지 않겠소?"
"시끄럽소! 예의를 지키시게!"
폭군 황제라며 욕을 하고 직접 황제의 자리에서 끌어내리기까지 했지만, 남이 폭군 황제를 욕하는 건 싫었다.
팔이 안으로 굽듯, 욕을 해도 내가 하지 남이 하는 걸 보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이다.
"자꾸 쓸데없는 소리를 하시는 걸 보면 집중력이 떨어지신 것 같습니다. 다음 내용은 내일하십시다. 크흠!"
게오스 제국 귀족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국 귀족들도 굳이 그들을 붙잡지 않았다.
일부러 저런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간을 끈다고 해서 바뀌는 게 아닌데 말이지.'
여기서 조급한 모습을 보이는 건 저들에게 뜯어 먹을 먹잇감을 안겨주는 일과 같았다.
게오스 제국의 귀족들이 모두 돌아가버리고.
남은 제국의 귀족들이 슬슬 불만을 털어놨다.
"일부러 우릴 조급하게 만들려고 저런다는 건 알지만, 시간을 끌어도 너무 끌지 않습니까?"
"우리 쪽이 특별히 급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쪽에 시간을 너무 많이 주는 것도 좋은 일은 아닐 겁니다."
"알기야 하지만, 저쪽 하는 짓이 너무 얄밉지 않습니까? 뻔히 수작질을 부리는데 알고 당해줘야 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단 말이지요."
"아니면 아예 한 번 제대로 도발을 해봄이 어떠십니까?"
"도발이요?"
"저쪽에 한 시라도 빨리 전쟁을 끝내야 할 이유를 만들어주는 겁니다. 우리한텐 아직 끈이 있지 않습니까?"
혁명단과 내전국을 이용하자는 의미다.
지금은 새 황제의 눈치를 보느라 움직이지 않고 있지만, 언제까지 숨 죽이고 있을 놈들이 아니었다.
"그쪽을 움직인다면...확실히 저쪽엔 발 등에 불이 떨어진 느낌이 들겠군요."
"뜨거워서 빨리 앞에 있는 불부터 끄고 싶을 겁니다."
"흐흐흐..."
제국의 귀족들이 음흉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들의 꾀가 게오스 제국 귀족들에게 잘 먹혀 들어갈 것을 직감했기에 꼬시다는 생각이 절로 든 것이다.
그리고 며칠 후.
제국에게서 받아 먹은 게 있는 지라, 요청 받은 것을 안 할 수 없었던 내전국과 혁명단이 움직였다.
쾅!
"협상이 왜 이리 늦는 것이오! 언제까지 앉아서 얘기만 하다 올 거냔 말입니다!"
"본디 협상은 조급하게 마무리 해서는 안 됩니다. 더욱이 제국에서 요청하는 것이 우리 제국에 치명적인 것들이지 않습니까? 그들은 게오스 제국을 거덜 낼 심산으로 독하게 굴고 있습니다."
"내전을 일으킨 귀족들이 이젠 스스로를 왕이라 칭하며 독립을 선언했습니다. 귀족들도 그들을 내전국이라고 부른다지요? 이런 상황에서 마냥 시간을 끄는 게 정녕 맞는 일입니까?"
새 황제가 실수를 하고 있었다.
평소 귀족들이 보여주는 두루뭉술한 태도에 잔뜩 실망한 상태라서, 협상장에서도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있을 거라 오해를 한 것이다.
귀족들은 새 황제의 어리석음을 어떻게 지적해야 할지 고민했다.
폭군 황제가 남긴 상처가 너무 깊은 지라 그들은 황제에게 바른 말을 하는 것을 두려워 하고 있었다.
그나마 할 수 있는 말은 최대한 말을 돌리고 돌려서 황제의 잘못을 슬쩍 꼬집는 것이었다.
애석하게도 나름 황제를 위한 행동이라며 한 이 행동이 새 황제를 더 복장 터지게 만들고 있었지만 말이다.
"앞으로 삼 일을 주겠습니다. 그때까지 협상을 모두 끝내세요."
"!!!"
"사, 삼일이라니요!"
"제국 때문에 군대가 계속 묶여 있는 것 큰 문제입니다. 내전국과 혁명단들이 날뛰는 이유가 뭐겠습니까? 제국의 군대 때문에 우리 군을 움직이지 못하기 때문이 아닙니까?"
안 되면 되게 하라고 명령할 수 있는 자리가 바로 황제라는 자리였다.
"지금까지 충분히 시간을 주지 않았습니까? 괜한 신경전으로 지지부진하게 시간을 끌지 말고 삼 일 안에 끝내세요. 제국과의 전쟁은 그날로 끝나야 합니다."
새 황제의 지엄하신 명령에 귀족들은 따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실 황제가 협상을 빨리 끝내라고 한 이유에는 제국과 나눴던 밀약이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미 주겠다고 약속을 했는데, 이제와 말을 바꾸는 게 부당하다 생각 됐기 때문이다.
'게오스 제국의 미래가 어둡구나. 어두워.'
'황제가 너무 순진하지 않은가? 약속을 했다고, 진짜 싹 다 내어주면 어쩌자는 건지...'
이 밀약을 알고 있는 소수의 귀족들은 새 황제가 왜 협상 시간을 3일로 줄였는지 눈치를 챈 상태였다.
나라와 나라의 일에 신념을 지킨다?
'아직 떼가 덜 묻은 탓이다. 순진하셔서 그러는 게지.'
'어떻게 가르쳐야 할꼬...갈 길이 멀구나.'
새 황제의 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원로 귀족들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 ♧ ♧
"감축드리옵니다, 폐하!"
""감축드리옵니다!! 폐하!!!""
귀족들의 축하 인사가 새삼스럽다.
이미 오래 전부터 전쟁이 끝났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다.
"예상한 것보다 훨씬 받아 낸 것이 많군요. 세모론 공작이 일을 잘 해준 덕분입니다."
"폐하께서 안배 해주신 것들의 도움을 받아 유리하게 협상을 끝낼 수 있었던 겁니다. 폐하의 안배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좋은 결과를 만들어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현재 임신을 한 상태인 황후의 가문이 바로 세모론 공작의 가문이다.
아무리 내가 따로 안배를 해두었다 해도 그가 이번 협상 자리에서도 큰 공을 세운 것은 사실인지라 치하 하지 않을 순 없었다.
적당히 두둑하게 그의 주머니를 챙겨준 나는 현재 후궁의 숫자와 앞으로 들어오게 될 후궁의 숫자를 모두 더해보았다.
'1998명.'
전쟁 보상에 어마어마한 여인들을 후궁으로 삼을 수 있게 됐다.
2천을 찍을 수 있었는데, 어째 딱 두 명이 부족하다.
물론 그 부족한 두 명은 궁인으로 얼마든지 채워 넣을 수 있으니 2천으로 깔끔하게 계산해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이제 딱 1천 남은 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빠르게 숫자를 채운 거다.
내 예상치 못한 성과에 포니 녀석이 깜짝 놀라고 있지 않을까?
나도 여기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서 몇 십 년은 보내야 할 줄 알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곳에 온지 5년도 채 되지 않아 2천 명이라는 어마어마한 숫자를 채웠다.
물론 그들을 전부 다 한 번씩 안아 본 것은 아닌지라 공식 집계에는 아직 들어가지 못한 상태였다.
'후궁으로 삼는 게 문제인 거지, 안는 건 시간만 내면 되는 일이니까.'
하루에 꾸준히 2명, 3명 씩 안다 보면 순식간에 숫자도 올라갈 것이다.
"게오스 제국에 미녀들이 많다던데, 얼마나 예쁜지 빨리 보고 싶군."
내 심상치 않은 말에 귀족들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왕자 시절 반역자 오드만의 수작질로 각종 오해를 받았던 나다.
그 소문 중에는 내 정력이 연금술사 약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것도 있었다.
'진짜 어처구니가 없었지. 내가 여태까지 얻은 소문 중에 제일 말이 안 되는 거였으니까.'
연예인인지라 안 뗀 굴뚝에 나는 소문들이 참 많았다.
지금도 아예 없다고는 말 못한다.
하지만 이상한 약을 먹고 정력을 키웠다는 소문 만큼은 많이 불쾌하고 황당했다.
물론....
'지금은 그 소문이 진짜라고 의심하는 사람이 없지.'
황제가 여자를 굉장히 많이 밝힌다는 걸 모르는 제국민이 없다.
백성들도 알고 있는 사실이기까지 하다.
황제가 후궁이 너무 많아 걱정을 사는 건 처음이란다.
그래도 황족이 많아지는 것은 나쁠 것 없는 일이었다.
쉽게 죽어버리곤 하는 황족의 핏줄로, 후계자가 없어서 고생했던 게 몇 년 전에 불과했다.
"아이가 들어섰다고?"
"예, 폐하. 감축드리옵니다!"
"하하! 오늘따라 축하 할 일이 많구나!"
여자를 그렇게 많이 안아 대다 보니, 슬슬 후궁들 중에서 임신을 하는 경우가 나오기 시작했다.
귀족들은 황족의 핏줄이 많아지는 것을 반기는 입장인지라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후궁의 임신 소식에 유일하게 미소를 짓지 못하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루아벨 황후의 든든한 배경이 되어주고 있는 세모론 공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