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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역전 세계의 아이돌-765화 (750/849)

Chapter 765 - #96. 진해솔 (69)

"황후폐하, 또 후궁이 임신을 했다고 합니다."

루아벨은 측근이 전달해주는 소식에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황제를 사랑해서 그의 아내가 된 것이 아니라 권력을 갖기 위해 이 자리에 오른 여자였다.

그는 결혼 전, 그녀에게 대놓고 자신은 여자를 많이 안을 것이라 선전포고를 했었다.

그리고 그녀는 황후가 되기 위해 견뎌야 하는 것이 그것이라면 얼마든지 견디겠다고 다짐을 한 상태였다.

가문을 위해, 그리고 자신의 권력욕을 위해 황후라는 자리는 남에게 내어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 축하한다고 선물이라도 보내줘야겠구나. 지위도 올려주고 말이야."

게오스 제국은 대대로 여성이 황제로 추대를 받지만, 제국은 여성이 아닌 남성만을 후계로 삼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자신이 낳은 첫 아이가 남자아이인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이제 이 아이가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보호하고 양육하는 것이 그녀가 해야 할 일이었다.

"...노비는 어떤 일이든 명령만 하신다면 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쓸데없다. 목숨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구나."

"하오나 황후폐하! 후궁들이 많아도 너무 많지 않습니까? 황족들이 잔뜩 태어날 것입니다."

"그 중에 적합한 후계자는 내 아들 뿐이다."

"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머리 아프구나. 이 얘기는 더 이상 하지 않겠다. 나가보거라."

황후라고 순진하고 순수해서 임신한 후궁들을 가만히 내버려두고 있는 게 아니었다.

'짐은 자식을 절벽에 떨어트려 키우는 사람이 아닙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대가 낳은 아이가 내 뒤를 이어 제국을 이끌 겁니다. 그러니 괜히 후궁들이 낳은 짐의 자식을 건드려서 눈 밖에 날 일을 만들지 마세요. 그땐 황후가 아니라 내 자식을 죽인 원수가 될 겁니다.'

황제는 그녀의 자식을 후계자로 삼겠다는 확실한 약속과 함께 다른 자식들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괜히 후계자 자리를 견고하게 만들겠다고 후궁 자식을 위협하다가 내 자식의 후계자 자리가 달아날 수 있다는 의미였다.

이미 후계자 자리를 확보했는데, 괜히 분란을 일으켜서 문제를 만들고 싶은 생각이 없었던 황후는 순순히 황제의 경고를 받아들였다.

'총애 하는 후궁을 만들지 않음으로써 약속을 증명하고 계시는데, 내가 먼저 약속을 어길 수는 없지.'

황후가 후궁이 임신했다는 소식을 듣고도 동요하지 않을 수 있는 것도 모두 이 때문이었다.

한 후궁을 총애해서 그 후궁의 자식을 후계로 삼고 싶어지지만 않는다면.

황후는 황제와의 약속을 지킬 생각이었다.

더군다나 생각보다 황제와 황후의 사이가 썩 나쁘지 않았다.

권력 때문에 결혼을 한 것이어도, 그와 잠자리를 함께 하는 이상 정이 안 생길 수가 없었던 것이다.

황제가 그녀에게 딱히 서운하게 구는 것도 아니었다.

나름 황후라고, 꼬박꼬박 일주일에 한 번은 그녀와 밤을 보내기 위해 자리를 하는 편이었다.

"본래 황후와의 동침은 이렇게 자주 하는 게 아닙니다. 보통 길 일을 받은 후에...!"

"짐에겐 매일매일이 길 일이오. 그리고 그건 임신이 잘 되는 날짜를 계산해서 동침하는 것이지 않소? 짐은 그딴 거 없이도 정력이 넘쳐 흐르니, 귀찮게 따지지 맙시다."

그리고 그렇게 길 일을 따지는 것보다 횟수를 늘리는 게 임신 할 확률을 더 높이는 것 아니겠소? 라고 능글 맞게 웃던 황제다.

솔직히 그와의 밤이 나쁘지 않았고, 더 자주 안아주겠다며 다른 후궁보다 훨씬 신경을 써주는 것이 기분 좋았다.

본디 황궁에서 여인들의 권력은 황제의 총애로부터 오는 것이 아닌가?

황제가 이렇게 황후를 신경 써주고 대우를 해주니 감히 후궁들이 다른 생각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여자를 많이 밝힌다는 흠이 있더라도 황제는 썩 괜찮은 지아비였다.

♧ ♧ ♧

"소식 받았습니다. 감축 드립니다."

"황후도 감축드리오."

후궁의 자식은 모두 황후의 자식으로 취급을 받았기에 그녀에게 축하 인사를 건네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물론 형식만 그렇다는 것이지, 진짜 후궁의 자식을 데려다가 황후가 키우는 일은 없었다.

남의 자식을 왜 황후가 애지중지하며 키우겠는가?

보는 것도 눈에 가시가 될 텐데.

"헌데...왜 이곳으로 오셨습니까? 회임 했다는 후궁을 보러 가실 줄 알았습니다."

"오늘 황후와 함께 보내는 날이지 않습니까? 내일 찾아가도 됩니다."

황후와 보내기로 한 시간은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지키겠다는 의미로 하는 소리였다.

내 아이를 임신했으니 앞으로 좀 더 나은 대우를 받긴 하겠지만, 감정을 오가는 사이는 아니다 보니 황후와의 관계를 다지는 것이 더 중요했다.

그녀가 아이를 잘 키워줘야 내가 이곳에서 미련 없이 사라질 수가 있다.

후궁을 어느덧 2천 명까지 채워 넣은 상황이지 않은가?

나머지 천 명은 천천히 해도 됐다.

내 후계자가 잘 자라나서, 자리를 이어받아도 될 정도까지 크는 시간이 필요하니 말이다.

'적어도 여기서 15년은 버텨야 돼.'

불과 5년도 안 돼서 2천 명을 채웠는데, 15년 동안 천 명을 못 채울까.

이제 정말 미션을 완료하는 것은 시간 문제가 된 것이다.

'궁중 암투가 벌어지지만 않으면 돼.'

궁중 암투.

역사 속에서도 그렇지만, 드라마에서도 자주 보아 왔던 것들이다.

독살, 암살, 저주, 누명 등등.

각종 방법으로 서로를 시기, 질투하는 거다.

그리고 그 암투가 친절하게 황태자를 피해가진 않을 것이다.

잘 자라고 있는 후계자에게 문제가 생겨서 내 자리를 물려 줄 시기가 더 늦어진다면?

'절대 안 되지.'

나는 돌아가야 할 곳이 있다.

이 세계에 많은 신경을 써줄 여력이 없다는 뜻이다.

요즘은 새 후궁을 안는 일만 아니면 대부분 분신을 보내서 생활하고 있었다.

제국으로 발돋움한 나라를 발전시키는 것은 다음 황제에게 맡겨둘 생각이었다.

내가 할 일은 다음 대 황제가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도록 적당히 나라의 부를 키워 놓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황태자의 모후인 황후와의 사이를 돈독하게 만드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권력에 대한 욕심이 있는 그녀의 욕구를 채워주면서, 후궁들과는 명백히 다른 대우를 받고 있다는 걸 느끼게 해주기만 하면 된다.

그럼 자연스럽게 사람이 너그러워지고 시기, 질투 대신 마음이 넓어질 것이다.

'후궁이 아무리 많아도 후궁은 후궁일 뿐이라고 생각할 테니까.'

가정이 화목하려면 남자가 잘 해야 한다.

나와 살을 섞은 여인들이 서로 칼을 겨누고, 해치려 드는 꼴은 절대 볼 수 없었다.

"폐하와 대화를 나누다 보면 요괴에게 홀린 기분이 들곤 합니다. 하도 달콤한 말만 하시지 않습니까?"

"달콤했습니까?"

"...아니라고 하실 겁니까? 또 저만 부끄럽게 만드시네요. 짓궂으십니다."

"제가 원래 그렇습니다. 자꾸 좋으면 놀리려고 하거든요."

"흥."

황후는 다른 사람 앞에서는 철저하게 예의를 지키는 사람이다.

하지만 단 둘이 있을 때는 의외로 딱딱하게 예의를 지키기보단, 애교와 투정을 잘 부리는 사람이었다.

물론 그녀가 처음부터 이렇게 남자를 살살 녹여주는 사람은 아니었다.

특히 황후의 자리에 막 올랐을 때는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서 여성으로서의 매력이 전혀 없었다.

'내가 진짜 황제였으면 딱딱하게 구는 황후를 점점 싫어했겠지. 살갑게 구는 후궁들을 더 편애할 수밖에 없었을 거고.'

하지만 나는 그녀가 '황후' 라는 자리에 눌려 있을 뿐이라는 걸 알았다.

처음에는 공작 가문의 여식이니, 황후 자리에도 잘 적응을 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나이를 미처 간과하고 있던 섣부른 편견이었다.

겁에 질린 듯, 잔뜩 굳어 있는 황후의 두 손을 잡고 허심탄회 하게 대화를 나눴다.

적어도 우리 둘이 함께 있을 때만이라도 황제나 황후 같은 거추장스러운 지위는 내려놓자고 말이다.

'그 때 이후로 많이 좋아졌어.'

황제와 황후라는 특별한 위치에 있어서 그렇지 엄연히 그녀와 나는 '부부'가 된 것이었다.

무서워 하고 있는 아내를 달래주는 건 남편이 해야 할 일이 맞았다.

"그래서 오늘 제가 안 올 줄 알고 이렇게 꼼꼼하게 챙겨 입고 계셨던 겁니까?"

"...아닙니다만. 오신다는 걸 알았어도 똑같았을 겁니다."

"태연하게 거짓말을 하시네요. 제가 올 때면 항상 쉽게 벗길 수 있는 옷을 입고 계시지 않았습니까? 지금은 손을 넣어도 황후의 살결이 만져지질 않습니다."

손을 넣으면 또 다른 옷이 만져 진다.

그걸 한 번 더 치워내고 안으로 손을 넣어봐도 여전히 옷이 나를 가로 막는다.

"평소에도 이렇게 많이 입습니까? 나보다 많이 껴입은 것 같은데. 어차피 안에 입는 건데 몇 개는 빼고 입어요. 이 정도면 무거워서 편하게 움직이질 못할 것 같은데."

"설마 폐하는 그렇게 입고 다니십니까?"

"뭐하러 다 입어요. 안에 입어서 보이지도 않는데. 그리고 나는 원래부터 답답한 걸 싫어합니다. 황후가 예법을 얼마나 잘 지키는지 나만 알 수 있는 거 아닙니까. 이 옷을 벗기는 건 나만 할 수 있는 일이니까요."

...물론 궁인들도 알기는 하겠지만 말이다.

내가 유혹을 담아 한 말이 황후에게 잘 통했는지 얼굴이 붉어진다.

"모범을 보여야 하는 황제폐하께서 예법을 지키지 않으시면 어떡합니까?"

"우리끼리만 아는 건데 뭐 어떻습니까. 다른 사람한테만 말 하지 않으면 되지요. 그리고 우리가 황제고 황후인데 누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권력이라는 게 그런 거잖아요. 남들은 못하는 걸 우리는 해도 되는 거."

옷 걸치는 걸 좀 편하게 하겠다는데 누가 뭐라 할 수 있단 말인가?

"편하게 삽시다. 편하게. 이걸 입고 평생을 사는 건 너무 거추장스럽잖아요. 적어도 남들이 안 보는 부분은 타협하자고요."

황후라는 자리도 그렇다.

너무 무거우면, 내려 놓을 수 있는 것은 내려 놓으면 되는 거다.

전부 다 짊어지고 있는다고 좋은 게 아니라는 걸 황후는 알 필요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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