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769 - #96. 진해솔 (73)
그럴리가!
이런 시중은 우리 가족들에게만 해주던 거였다.
황후에게 해준 것은 오늘 특별히 고생을 해서 선심을 쓴 거였다.
"그럼 또 저만 해준 거라고 말씀하실 겁니까? 이렇게 능숙하신데요?"
"정말입니다. 황후만 해주는 겁니다."
슬며시 그녀의 입술이 올라간다.
"...너무 편애를 하시면 후궁들이 질투합니다."
좋아하고 있는 게 다 보이는데, 또 금세 새침해져서는 후궁 얘기를 꺼내온다.
저건 분명 나 찔리라고 하는 말이다.
하지만 여자 문제를 추궁 받는 것에는 확실하게 단련이 되어 있었다.
이 정도는 얼마든지 부드럽게 넘길 수 있는 배짱을 갖고 있는 것이다.
"부부이지 않습니까? 이건 편애가 아니라 당연한 거죠."
"여인의 마음이 어디 그렇게 이성적으로 돌아가는 줄 아십니까? 그렇지가 않아요. 오히려 충동적일 때가 많죠. 그러니 시중을 들어주신 건 저 혼자만 알고 있겠습니다."
황후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
"하하하! 역시 짐을 생각해주는 건 우리 황후밖에 없네요."
후궁들이 질투할 것도 신경을 써주니 말이다.
"약속한 일이니, 지키는 것 뿐입니다."
내게는 선택지가 많았다.
귀족 영애 중 누구를 선택해도 상관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황후는 가문의 힘이 너무 커서, 자칫 권력이 쏠릴 수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황후로 만든 것은 감정보단 이성을 더 중요시 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아쉽네요. 황후가 질투해주는 것도 은근히 재밌었는데 말입니다. 오늘도 덕분에 이렇게 실컷 즐기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좋으시면 자랑이라도 할까요? 폐하께서 해도 된다고 하시면 자랑을 할 수도 있습니다."
어디 해보라고 하면 못 할 줄 아느냐는 듯 눈을 치켜 뜬다.
나는 그녀의 도발에 얼씨구나 맞장구를 쳤다.
"자랑하세요. 앞으로도 계속 황후만 해줄 거라서 후궁들이 질투를 해도 어쩔 수 없을 겁니다."
후궁들이 자기도 해달라고 조를 테니 그걸 거절하느라 귀찮기는 할 거다.
"짓궂으시네요. 한 번을 안 져주십니까?"
"하하, 져드릴까요?"
"됐습니다."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도 황후를 위한 시중은 계속 되고 있었다.
오늘 각종 자세로 고생을 한 그녀를 위해 마사지를 시작한 것이다.
"으음...으응..."
큰 걸 받아들이느라 비틀어진 뼈와 놀란 근육들을 어루만지니 황후가 다시 새액, 새액 잠에 빠져들었다.
그녀가 깨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궁인들이 가져 온 옷까지 정성스럽게 입히고 침실로 돌아갔다.
내가 황후를 씻기는 사이 궁인들이 난잡하게 더러워져 있던 침실을 깨끗하게 청소를 해둔 상태였다.
"황후는 깨우지 말고 푹 재우도록 하거라. 일정은 모두 취소하고."
"예, 폐하."
"고생했으니 늦게 까지 잘 거다. 저녁 쯤에 깨워서 같이 먹는 걸로 하지."
♧ ♧ ♧
황후의 궁이다 보니 그 안에서 벌어진 일이 다른 곳으로 퍼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자기 사람에게는 매우 친절하게 대해주지만, 한 번 눈 밖에 나면 얄짤이 없는 사람이었다.
평소에 자비롭게 대가를 지불하는 대신 실수했을 때의 용서가 절대 없는 것이다.
궁인들은 황후의 그늘 아래에서 지내는 것이 얼마나 안온한지 매우 잘 알고 있었기에 눈 앞에 내밀어진 이득을 결코 취하려 하지 않았다.
황후가 내려주는 이익이 미래를 보면 훨씬 더 가치가 크기 때문이다.
그런 황후궁에서 흘러 나오는 정보들은 대부분 궁의 주인이 의도적으로 바깥에 전달하기 위해 궁인들에게 퍼트리라고 시킨 것들이었다.
"후궁이 임신을 했는데도 폐하께서 황후를 찾아가셨다고?"
"후궁을 그리 많이 들였는데도 폐하와 황후의 금술이 좋다는 게 신기한 걸."
아무런 정보도 나오지 않으면, 오히려 더 안달이 나서 어떻게든 구멍을 뚫으려고 한다는 걸 잘 알았다.
그래서 적당하게 소식을 바깥에 풀어주는 거다.
바깥으로 내보내는 소식을 스스로 조절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는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두 분이 날이 새도록 밤새 했다고 합니다."
"...날이 새도록?"
황후 궁에서 나오는 정보를 가장 예민하게 체크하고 있는 이는 단연코 후궁들이다.
황제와 있는 시간보다 황후나 후궁들끼리 있는 시간이 훨씬 많지 않은가?
그들에게 최고의 가십은 황제와 관련 된 소식이었다.
누가 황제에게 요즘 자주 불려가는지, 황후에게 요즘 어떤 후궁이 총애를 받고 있는지 등등 말이다.
황제에게 총애를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황후에게 미움을 받지 않는 것도 후궁들에겐 굉장히 중요한 문제였다.
황후는 후궁들을 처벌 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었다.
물론...
"누구는 언제 만날지 몰라서 그리움에 배갯잎을 적시고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황후에게 잘 보이려고 노력하느냐 한다면 그건 아니었다.
앞에서 대놓고 싫어하는 티를 내진 못해도 뒤에서라면 누굴 욕하든 숨기기만 하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마마."
"시끄러워!! 지금 내가 화를 안 내게 생겼어?! 당연히 나한테 왔었어야지!! 내가 임신을 했다는데!! 걔는 임신도 안 했잖아!!"
귀족 영애였던 시절.
공작 가문의 영애였던 루아벨은 그 시절에도 무리의 중심에 서 있었다.
그때도 그녀에 대한 질투심이 많았던 후궁은 기어코 그녀가 황후까지 됐다는 걸 알았을 때 분해서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었다.
'그 자리가 내 자리어야 했는데!'
공작 가문에 비하면 살짝 쳐지기는 하지만, 그녀의 가문도 남부럽지 않은 가문이었다.
헌데 황후가 된 것은 루아벨이었으며, 첫 아이로 남자 아이를 낳기까지 했다.
그 뿐인가?
황제의 총애까지 싹 다 가져가 버렸다.
"이건 반칙이잖아. 혼자서 그걸 다 갖는 게 어딨냐고. 적어도 황후에 올랐으면 황제의 총애는 후궁한테 양보해야 하는 거 아니야? 도대체 내가 그 년에 비해서 뭐가 부족하냐고!!"
"마, 마마!! 남들이 들을까 겁납니다. 부디 흥분을 가라앉히셔요!"
"몰라몰라몰라! 아악! 짜증나!"
"아, 아기씨가 놀라십니다아~!"
궁인의 다급한 만류에도 귀를 닫고 소리를 지르던 후궁은 아기씨라는 말에 흥분을 가라앉혔다.
"후우...후우...그래, 흥분하면 안 되지. 어떻게 얻은 아이인데...!"
매달 열리는 연회가 아니었다면 황제를 다시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왕년에 열심히 익혀두었던 춤 사위가 이렇게 도움이 될 줄 누가 알았을까.
물론 자신보다 더 잘 추는 년들의 발목을 분질러서 나오지 못하게 한 것도 그녀가 1등을 하는데 큰 몫을 하긴 했다.
방법이 어떻게 됐든 1등을 한 것은 자신이고 황제와 밤을 보내 아이를 임신하게 됐다.
'어찌 그리 매정하십니까...? 내가 아이를 가졌다는데!!'
회임을 했으니 당연히 황제의 축하를 받을 줄 알았다.
그런데 황후에게 달려가 자신은 완전히 뒷전이 되었으니 분통이 터지는 게 당연했다.
"오늘은 오실 겁니다."
"맞아요, 마마님. 선물도 잔뜩 오지 않았습니까?"
궁인들이 어떻게든 그녀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애를 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기분이 풀리는 건 아니었다.
황제가 회임을 축하한다며 선물만 달랑 보내왔을 때도.
그리고 저녁을 또 다시 황후와 함께 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다음날, 황후가 따로 그녀를 불러서 회임을 축하했을 때에도 그녀는 분노 만을 차곡차곡 쌓아갔다.
♧ ♧ ♧
후궁들 중에 유난히 질투가 많은 여자가 있다.
아직 다 채워진 것은 아니지만, 2천 명이나 되는 인원의 후궁이 몰려 있다 보니 다들 개성이 굉장했던 것이다.
"후궁이 황후를 저주했다? 그럼 처벌하면 되는 일 아닙니까."
"예, 폐하. 헌데...저주술을 사용한 후궁이 하필..."
"하필?"
"회임을 하신 후궁이시옵니다."
이런.
"해서 이 후궁을 어떻게 해야 할지...."
"흐음..."
후궁의 처벌은 황후에게 있지만, 내 아이를 임신한 후궁이 죄를 지은 것이니 그녀가 마음대로 처벌을 할 수가 없었던 거다.
언젠가는 이런 일이 벌어질 거라 생각은 했었는데, 그게 하필이면 내 아이를 임신한 후궁일 줄이야.
"혹 이번에 회임했다고 했던 그 후궁입니까?"
"예, 폐하."
"쯧...아직 몸 조심 해야 할 시기에."
이곳은 우리 세계처럼 미신으로 '저주'를 하는 곳이 아니다.
실제 '저주'라는 능력이 존재하고, 그 저주를 막지 못했으면 황후의 몸을 상하게 했을 것이다.
"황후의 목숨을 노렸으니 처벌을 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다만 짐의 아이를 가진 여인이니, 아이를 낳을 때까지는 벌을 유예하고 별궁에서 나오지 못하도록 하겠습니다. 또한 아이를 낳은 후에는..."
잘못을 저질러 놓고 제대로 된 처벌을 받지 않는 건 내가 봐줄 수 없다.
하지만 태어날 아이를 생각하면 선뜻 처벌을 하라는 말을 하기가 쉽지 않았다.
아이를 낳기만 하면 끝나는 게 아니지 않은가?
엄마가 직접 양육을 해야 하는데, 황후를 저주한 후궁에게 육아를 맡길 수 있을 리가 없다.
'나중에 그 아이를 두고 무슨 수작을 부릴지 모르니까.'
황태자를 위해서라도 빌미를 줄 수 있는 부분은 확실하게 정리를 하는 게 맞다.
'...잔인하구나. 내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누구나 한 번쯤 '나라면 그러지 않았을 텐데.' 라는 생각을 해본 적 있을 것이다.
나도 당사자가 되어보기 전까지만 해도 이런 잔인한 일은 나와 상관 없는 일일 줄 알았다.
이런 상황이 생겨도 잔인한 선택은 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고 말이다.
'고민이 안 될 수가 없네. 처벌을 안 하는 건 마음에 안 드는데, 애는 무슨 죄냐고. 누구한테 맡겨서 키우라고 하는 것도 마음이 안 놓이고.'
자식을 강제로 떼어 놓는 것 만큼 잔인한 것은 없다.
그렇다고 황후에게 애를 키워 달라고 하는 것도 너무한 일이다.
자신을 저주하려고 했던 후궁의 자식이 아닌가?
허나 아이를 낳은 후궁에게 양육을 하라고 하는 것도 마음에 차지 않는다.
얼마나 분하겠는가?
아마 그 분함을 자식에게 풀어낼 것이다.
'아이는 부모의 거울이지.'
미래에 후환이 될 것이 분명하다.
하필이면 후궁의 가문이 제법 힘을 쓰는 가문이었기에 더더욱 그냥 둘 수가 없었다.
가문의 힘이 있으니까 감히 황후를 저주할 생각도 할 수 있었던 걸 테고 말이다.
"처벌에 대한 건 황후와 상의하고 최종 결정을 내리도록 하겠습니다."
다른 후궁들에게도 경고 할 겸 제대로 처벌을 하고 넘어가야 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후궁이 쉽게 자기 자리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가문에 도움을 요청한 것인지, 일부의 귀족들이 뜻을 모아 후궁의 죄를 선처 시켜보겠다고 수작을 부리기 시작했다.
당연하지만 그들이 쥐고 흔들 무기는 뱃속에 있는 아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