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775 - #96. 진해솔 (79)
이거 나만 도발로 들리는 거 아니지?
비앙카의 표정을 보니 내가 잘못 들은 건 아닌 모양이다.
완전 제대로 긁힌 표정이었다.
이대로 가만히 내버려두면 큰일이 날 것 같았다.
어떻게든 두 사람을 떼어내야겠다는 생각이 든 나는 비앙카의 손목을 잡아 챘다.
"어서 가자꾸나. 황궁 구경 시켜 달라 면서."
"......."
지를까 말까 고민에 잠겨 있던 비앙카가 황궁을 구경 시켜 주겠다는 내 말에 어쩔 수 없이 넘어 가준다는 듯 순순히 발을 옮겼다.
"잘 참았어."
황후의 궁을 빠져나오고, 비앙카에게 잘 했다는 칭찬의 의미로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칭찬이 고프다는데 해줘야지 뭐 어쩌겠는가?
애가 뼛속까지 나쁜 녀석이긴 하다만, 일단 나를 위해서 움직이는 녀석이 아닌가?
하는 짓만 보면 혼꾸녕을 내주고 싶은데, 화를 내다 보면 은근히 불쌍해지기도 하고...
'하여튼 사람 심란하게 만드는데 뭐 있는 녀석이라니까.'
답지 않게 시무룩해진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안 좋다.
"황궁 구경 해보고 싶다며. 계속 답지 않게 시무룩해져 있을 거야?"
"이제 시무룩한 척 안 해도 돼요?"
"...연기였어?"
"주인님께서 황후님 비위 잘 맞추라면서요. 그래서 열심히 연기했죠."
아이씨.
"황후가 한 말에 마음 상한 게 아니라?"
"제가 그 사람 때문에 왜 마음이 상해요. 절 마음 상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주인님 뿐인데요."
"하...난 진짜 마음 상한 줄 알고 깜짝 놀랐잖아."
"후후후, 저 엄청 감동했어요. 주인님이 절 대충 내보내고 황후랑 꽁냥꽁냥 사이 좋게 있으실 줄 알았거든요."
내가 그렇게 매정한 사람으로 보였나?
"여기에 아는 사람이라고는 나 하나밖에 없으면서 널 혼자 내버려둔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지."
"흐흥, 아쉬워라~ 몰래 도망쳐서 사고 잔뜩 치고 있으려고 했는데 말이에요. 가령 후궁들이 있는 곳에 몰~래 잠입해서 못된 짓을 해버린다거나 그렇게요!"
"절대 안 돼. 네가 여기 있는 동안 내 옆에서 떼어 놓지 않을 거니까, 어림도 없어."
"히힛."
"안 된다니까 왜 웃지? 사람 불안하게."
비앙카가 내 옆에 쪼르르 다가오더니 팔짱을 낀다.
"야, 여기 궁이야."
"전 그런 거 몰라요~ 오늘 주인님 때문에 찍소리도 못하고 황후님한테 완전 당해버렸으니까 달래주셔야 해요. 아! 맞다, 폐하라고 불러야 하죠? 폐하앙~"
"어우, 그냥 부르던 대로 불러. 황후 앞에서나 잠깐 그렇게 하고."
얘 입에서 폐하라고 불리니까 왜 내가 창피한지 모르겠다.
이곳에서 폐하로 처음 불렸을 때도 적응하는 게 쉽지 않기는 했다.
그런데 비앙카가 그 호칭으로 부르니 색다르면서도 부끄러움이 몰려오는 것이다.
'소꿉장난 하는 기분이랄까.'
비앙카와 소꿉장난을 한다고 생각하면 일단 배경부터가 침대로 바뀌어질 것이다.
그리고 역시나 비앙카도 나와 마찬가지의 생각을 했는지 야릇한 미소를 보이며 내 귓가에 속닥였다.
"주인님은 폐하가 되는 거고, 저는 주인님의 후궁이 되는 거에요. 참고로 전 황제 폐하께 아주아주 총애를 받는 후궁이랍니다."
"상상만 해도 짜릿한데."
비앙카가 후궁이 되었다면?
"후후후, 제가 여기에서 태어나지 않은 걸 다행으로 아세요. 아마 폐하를 요부처럼 꼬셔서 온갖 재미는 다 봤을 테니까요."
내가 생각하기에 비앙카는 나라를 말아 먹었다는 역사 속 악녀들과 비교해봐도 손색이 없을 것 같았다.
"아무렴 네가 어떤 사람인데 그 정도를 못할까. 충분히 그럴 능력이 있지. 근데 네가 이 세계에서 태어났으면 적어도 나를 꼬시는 건 못했을 걸?"
"분하지만, 주인님은 인정하죠. 절 유일하게 쥐고 흔드실 수 있는 분이니까."
"그것도 그거지만, 내가 이곳 사람들한테 정을 안 주고 있어. 일부러."
"일부러요?"
어차피 나는 이곳에서 언제든 떠나야 하는 사람.
정을 줘봤자 무엇하겠나?
그들을 책임 질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래서 정을 안 줬을 테니, 총애 받는 후궁의 존재 자체가 없을 거라는 거지."
"주인님이 재밌는 걸 하고 계신다고 생각했는데, 마냥 재밌기만 한 건 아닌가 보네요."
"내가 괜히 이런 짓을 하는 거겠어? 코인 벌려고 어쩔 수 없이 하는 거지."
결국 모든 원인은 코인 혹은 돈 때문인 거다.
상대적으로 성공한 인생에 속해 돈이 많은 나지만, 애석하게도 코인은 돈으로 구할 수가 없는 재화였다.
"그렇게 진지한 거면 애초에 제가 이곳에서 당분간 지냈어도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겠네요."
"그냥 편하게 나랑 여행 왔다고 생각해."
"...주인님은 참 못됐어요."
"뜬금없이?"
"뜬금없기는 왜 뜬금없어요? 제 마음을 갖고 노시니까 못됐죠!"
"네가 내 마음을 갖고 노는 게 아니라?"
비앙카를 보면 항상 마음을 조리곤 했었다.
무슨 사고를 칠지 모르니까.
그래놓고 나한테 책임을 떠넘긴다고?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을 짓는데, 비앙카가 일하는 걸 보고 싶다고 화제를 바꿨다.
"귀족들 앞에 까지 기어코 가셔야겠다?"
"소개 시켜 달라는 건 아니에요. 주인님 옆에 궁인 복장으로 몰래 숨어 있겠다는 거죠. 원래 여행을 오면 구경하고, 맛있는 거 먹는 게 최고잖아요?"
"...그건 그렇지."
제국을 다스리는 황제가 되었다는 게 비앙카의 호기심을 계속 자극 시키는 모양이었다.
내가 황제로 어떤 일을 하는지 구경하겠다고 야심차게 말해왔다.
여행 오는 것처럼 생각하라고 했던 적이 있었기에 정말 여행 온 것처럼 굴겠다는 것을 말리지 않기로 했다.
"그럼 얌전히 있어야 한다."
"네엥~"
황후에게 잔뜩 혼나서 우울해 하고 있는 것보다야 저렇게 발랄하게 구는 것이 더 보기 좋은 것은 사실이었다.
대화가 들리지 않도록 멀찍이 떨어트려 놨던 궁인을 손짓으로 불렀다.
"너희들이 입는 옷을 하나 가져다가 입혀주거라."
"예, 폐하."
비앙카가 궁인이 입는 옷으로 갈아 입고, 내 뒤를 따르는 궁인의 무리에 합류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하루 종일 내 뒤를 얌전히 따라다녔다.
걱정했던 것처럼 큰 사고를 치는 일 없이 말이다.
♧ ♧ ♧
"폐하가 그자를 처음 언급했을 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만나보니 역시 예상과 다르지가 않는구나."
폐하께서 사적으로 친분이 있는 사람을 입 밖에 꺼낸 것은 처음인 걸로 알고 있다.
그렇기에 더더욱 어떤 사람인지 알아낼 필요가 있었다.
황제가 되기 전부터 알고 지낸 사람이라면, 황제가 된 이후 그를 이용해서 함부로 휘두르려 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그 사람'을 만나보겠다고 했을 때, 폐하께서 우려를 표하기까지 했다.
'평범하지 않을 거라는 건 예상하고 있었다만, 하필 상대하기 까다로운 꼬리가 여럿 달린 여우 같은 년이란 말이지.'
황후는 자신의 훈계에 얌전히 수긍한 척 굴던 가증스러운 얼굴을 다시 한 번 떠올렸다.
'후궁들 중에서도 저런 짓을 하는 이가 없지는 않는데....'
문제가 되는 건 황제의 태도였다.
여우같이 굴던 후궁들은 황후에게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았다.
왜?
그때는 황제가 후궁들의 여우짓에 아무런 반응도 보여주지 않았으니까.
황제는 황후를 제대로 대우해주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해야 내명부의 질서가 바로 잡히게 된다는 걸 알고 있는 사람이었어.'
혼란보다는 안정을 바라는 사람이다.
황후는 그가 여자에 대한 과한 집착만 빼놓는다면 지아비로 손색이 없는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헌데 오늘 그녀에게 소개 시켜 준 여자는 무슨 이유 때문인지 무심한 태도를 유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만큼 비앙카라는 여자가 황제에게 큰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이라는 뜻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황후에게 위기감을 선사해주었다.
"그 여자가 후궁으로 들어올 수도 있을 것 같구나."
"황후 폐하의 앞에서 오늘처럼 건방을 떤다면 저희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
궁인들이 각오를 단단히 한 듯 비장하게 그녀의 말을 받는다.
"...지금까지 어느 한 후궁을 뚜렷하게 총애하지 않으셨던 폐하지만, 앞으로는 달라질 수도 있을 것 같구나."
그 여자가 내명부의 파란을 몰고 올 것만 같았다.
황후는 오히려 지금까지가 너무 평화로웠던 거라며 어지러운 마음을 다독였다.
다만 그녀의 어지러운 마음이 혼란해질 내명부에 대한 걱정 때문 만은 아니었다.
그녀도 사람인지라 정략으로 맺어진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여자에게 뚜렷한 관심을 표하는 황제의 모습을 보고 속이 쓰리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저런 여자를 자신에게 소개 시켜서 그녀의 일을 돕게 하려고 했던 행동도 다시 생각하니 헛웃음이 나왔다.
'제 주인을 잡아 먹을 상을 한 여자를 데려와서 수족으로 부리라고 하시다니....'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녀가 제안을 거절했을 때 오히려 그가 더 좋아했다는 점이다.
'적어도 폐하께서 그 여자를 이용해서 뭔가 꾸미고 있는 건 아니라는 거지.'
하지만 그 여자는 두고두고 화근이 될 것이다.
그런 본능적인 직감이 들었다.
다만 하수인 것처럼 그녀가 느끼는 감정을 황제에게 대놓고 내보이지는 않을 생각이었다.
폐하께서 아닌 척 굴어도 그녀를 아끼는 것은 분명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동안 쌓아 둔 정이라는 게 있을 테니까.'
그 정의 무게와 비교했을 때, 기분 나쁘지만 그녀가 저 여자보다 못할 확률이 높았다.
저 여자의 우위에 설 수 있는 것은 그와 공식적인 '부부'라는 점 뿐인 것도 분했다.
"그 여자가 황궁 안에서 무얼 하는지 전부 알아오거라. 1분, 1초라도 눈을 떼어서는 안 된다. 알겠느냐?"
"예!!"
그녀의 명령을 받든 궁인들이 눈을 반짝였다.
이번에 저주 관련 일로 궁인들은 황후 폐하를 제대로 지켜드리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갖고 있었다.
그러다가 드디어 황후 폐하를 위한 일을 맡게 된 것이다.
자신들이 모시는 주군의 명예와 미래를 위해, 그녀들은 비앙카라는 여자의 모든 것을 알아내오리라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