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776 - #96. 진해솔 (80)
"당사자는 아무 것도 할 생각이 없는데 자꾸 건드시네?"
비앙카는 궁인들의 무리에 섞여서 주인님의 생활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자신의 뒤를 집요하게 따라 붙는 시선들을 알아차렸고, 그것이 누구의 명령을 듣고 나타난 것인지 모를 수가 없었다.
"고작 이 정도 도발에 흔들리는 사람 주제에..."
주인님의 명령으로 황후를 직접적으로 건드리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약은 올릴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더욱이 저들이 하는 꼴을 보니 자신의 도발이 제대로 먹힌 모양이었다.
'누구는 감히 그 옆자리에 서지도 못하는데.'
비앙카는 분명 좋아하는 사람을 괴롭히는 걸 좋아하는 고약한 성격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주인님이 자신을 꺼려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이런 성격은 자신을 제작한 제작자의 성향이 짓게 묻어 있기 때문이었다.
자신을 만들 때, 제작자가 어떤 생각으로 만들었는가.
'분명 나를 만들 때 인간에 대한 증오심으로 가득 차 있었을 거야.'
다만 인형을 사용할 대상에게 적대감을 만들어 줄 수 없었으므로, 강제력을 이용해 인간을 사랑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 두 가지 모순이 지금의 비앙카를 만들었다.
좋아하는 사람을 괴롭히는 걸 즐기는 비앙카로 말이다.
자신의 성향이 삐뚤어졌다는 것을 알지만, 그게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사람마다 즐기는 방법이 다를 수 있지 않겠는가?
이런 성향의 차이를 굳이 이해 받고 싶지도 않았고, 이해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내가 즐거우니까.'
그런 점에서 이곳은 그녀의 즐거운 취미를 즐기기에 굉장히 적합한 환경이 펼쳐져 있었다.
주인님이 황제가 되었기에 그를 등에 업고 권력을 부릴 수 있었으며, 그의 관심을 받지 못하는 수많은 여인들이 방치 되어 있는 상태이기도 했다.
그 후궁들을 갖고 놀면 얼마나 재밌겠는가?
숫자도 무려 네자릿수나 된다고 한다.
이곳은 비앙카가 마음껏 날뛸 수만 있다면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어떻게 해야 주인님이 날 여기에 오래 머물게 하실까.'
아예 이곳에서 살 생각이 있는 건 아니다.
본래 비앙카의 자아가 그것을 절대 거부하고 있었다.
가문을 책임져야 하는 가주로써의 자아가 강한 비앙카이지 않은가?
주인님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그가 이곳에서 어떻게 생활하고 있는지 유심히 관찰했다.
황제 폐하가 데려 온 수상한 여자 라는 위치를 이용해서 궁인들에게 대충 정보도 캐냈다.
'황후도 나름 재밌을 것 같긴 한데, 게오스 제국이 더 흥미로운 걸.'
그곳의 황제가 여자라는 점이 더더욱 그녀의 흥미를 끌어내고 있었다.
"주인님!"
"앗! 아, 안 되는데..!"
"됐다. 괜찮으니 나가보거라."
오늘 하루 일과를 끝낸 주인님이 휴식을 취하기 위해 방으로 들어갔을 때, 비앙카는 궁인들이 미처 만류하기도 전에 냉큼 그의 뒤를 따라 방 안에 들어가 버렸다.
궁인들이 문을 닫고 사라지자 주인님이 그녀에게 말했다.
"의외로 얌전하게 따라다니더라?"
"신기한 것들이 많아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구경했어요. 황제가 된 주인님도 되게 멋있었고요."
"직접 황제가 되어 보니까 별 것도 아니더라. 괜히 골치만 아파."
귀족들이 가져 오는 일거리도 골치 아플 때가 한 두 번이 아니고, 나라와 나라 사이의 외교 문제도 굉장히 골치를 아프게 만든다며 앓는 소리를 했다.
"약한 소리 하시는데, 제가 보니까 되게 잘 해내고 계시던 걸요? 드라마에서 황제가 된 모습은 한 번도 안 보여주셨던 걸로 기억하는데...아마 팬들한테 지금 모습을 보여주면 다들 뒤집어질 거에요."
비앙카는 돌아가면 주인님이 출연 할 시나리오 하나를 구해봐야겠다 생각했다.
그가 황제역을 맡아 출연한다면 무조건 대박이 날 것이다.
"그래서 오늘 여기 둘러 본 소감은 좀 어때?"
주인님은 그녀가 황후에게 나름 예의를 다 해서 행동하는 것에 만족을 했는지 제법 부드러운 어조로 물어왔다.
이렇게 다정하게 대해주는 주인님...다른 의미로 꼴렸다.
"처음에는 영화 세트장 느낌이 들었는데, 역시 진짜 살고 있는 곳과 세트장은 차이가 크긴 하더라고요. 생감이 넘쳤어요. 영화 속에 퐁당 들어 온 느낌이랄까. 제가 무수리에 불과하다는 점도 짜릿하더라고요. 황제를 유혹해서 후궁이 될 야욕을 가진 무수리잖아요."
"...꼭 그렇게 사연이 많은 무수리여야 하는 거야?"
"어떤 자리에 있든 욕망을 갖지 않을 리가 없으니까요."
비앙카는 잠시 주인님과 평범한 대화를 나누며 간을 봤다.
그녀가 부탁을 했을 때, 과연 주인님이 그걸 들어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녀는 주인님과 얘기를 나눌 때마다 아쉬움을 계속해서 강조했다.
이대로 이곳에서 여행만 즐기고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의미를 듬뿍듬뿍 담았다.
"너무 아쉬워요. 좀 더 다양한 곳을 구경해보고 싶어요. 황궁만 달랑 보고 가는 건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시나요? 제가 오늘 하는 거 보셨잖아요. 정말 얌전히 잘 있었어요."
"나는 네가 얌전히 있으면 더 불안해. 사고 치기 전에 간 보는 거잖아."
"...주인님과 너무 오랫동안 지냈나 봐요. 어째 저에 대해서 모르시는 게 없네요. 곤란하게."
주인님도 만만치 않은 사람이긴 했다.
그녀가 뭘 노리고 있는 건지 구체적으로 모름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꿍꿍이를 갖고 있다는 건 눈치를 채고 있었다.
"숨기지 말고 말해. 충분히 간 봤잖아. 똑똑한 너라면 또 내가 거절하지 못할 일을 제안하려고 하겠지. 마음의 준비 끝났다."
그리고 주인님이 먼저 선빵을 쳐서 그녀에게 무슨 꿍꿍이를 숨겨두고 있는지 캐물었다.
주인님의 노예로써 명령을 듣지 않을 수는 없는 일.
비앙카가 배시시 눈웃음을 치며 말했다.
"게오스 제국이용."
"...설마 거길 가고 싶다고? 지금 내전 중인 곳을?"
게오스 제국이 지금 얼마나 혼란스러운 상황인지는 충분히 들었다.
물론 못 들은 얘기가 더 많겠지만, 적당히 모른 채로 움직이는 것도 여행하는 재미이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서 더 좋은 거에요."
피와 전쟁 그리고 혼란은 비앙카를 들뜨게 만든다.
"거기서 뭘 하고 싶은 건데?"
"당연히 황궁으로 들어가야죠. 호호호! 주인님께서 적당한 신분을 만들어주실 거라고 믿고 있어요."
"여기서는 내가 안 된다고 해서 못하니까, 거기에 가서 마음껏 날뛰겠다는 거야?"
"헤헤. 그럼 안 될까요?"
주인님은 이번에도 단번에 그녀의 생각을 꿰뚫어봤다.
그녀가 생각해낸 것은 어떻게 보면 간단한 거였다.
이곳이 안 된다고 하면, 적대국에 가서 놀면 되지 않겠는가?
'주인님도 좋고, 나도 좋고. 일석이조♡'
주인님 입장에서도 손해 볼 일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이득이 되는 일이다.
그녀가 깽판을 치면 칠수록 게오스 제국의 해는 저물어갈 것이고, 상대적으로 제국에 내리쬐는 해는 강렬해질 것이다.
"일단 제 소소한 목표로, 게오스 황제를 제 손아귀에 넣고 굴릴 생각이에요. 어떤 사람일지 너무 궁금해요!"
"게오스 황제는 여자야. 어떻게 손아귀에 넣고 굴려? 미인계가 통할 사람도 아닌데."
"후후, 성별에 상관없이 미모는 사람을 꼬시는데 유리해요. 그리고 여자라서 제가 가겠다고 한 거에요. 남자면 제 몸을 노릴 테니까. 설마 제가 취미 생활 하겠다고 주인님을 두고 다른 남자 아래에 깔릴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주인님을 몸과 마음을 다 해 모시고 있는데, 함부로 할 수는 없었다.
"전 태어난 이래 오로지 주인님을 위해서만 움직였던 인형이랍니다. 불손한 손길을 허락할 수는 없지요."
"...그래, 너도 어느 정도 선은 그어 놓고 있구나. 다행이다."
"게오스 황제를 손에 넣는 방법은 걱정하지 마셔요. 저 그렇게 능력 없는 여자 아니에요."
"너무 잘 할 것 같아서 무서운데...그러다가 다치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여긴 저주도 실제 하는 곳이야."
"음~ 그건 주인님께서 지켜주시지 않을까요?"
다행히 주인님도 게오스 제국에서 깽판 아니, 취미 생활을 하겠다는 그녀의 말을 긍정적으로 생각해줬다.
역시 눈앞의 이익에는 흔들리지 않을 사람이 없다.
주인님도 아시는 거다.
내가 게오스 제국에 가면 이득이 될 거라는 걸.
그런데.
"하아, 안 된다고 하면 어떡할래?"
"네엥?! 이것두요!? 너무하세요오~"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을 줄 알았던 주인님이 배신했다!
"왜요왜요? 도대체 왜요??"
누가 봐도 그녀를 게오스 제국에 보내는 게 주인님한테 이득일 텐데 도대체 왜??
"네가 위험하다니까? 여긴 영화 속 세상이 아니잖아. 내가 널 완벽하게 지켜주겠다고 할 수도 없어. 멀리 떨어져 있는데, 네 가 위험하다는 걸 내가 어떻게 알겠니?"
"...절 걱정해서 안 보내겠다고 하신 거에요?"
"당연하지. 너도 취미 생활 때문에 목숨에 위협이 되는 일까진 만들고 싶지 않잖아."
"그거야...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이 재밌는 곳을 포기하기도 싫었다.
그리고 주인님이 저렇게 다정하게 대해주시니 더 따르고 싶지 않아졌고.
성격이 뒤틀려 있는 비앙카는 주인님이 잘 해주실 때마다 괜히 더 투정을 부리고 못된 짓을 해서 주인님에게 혼날 일을 만들어버리곤 했다.
그래야 가슴을 간질간질하게 만드는 형용할 수 없는 무언가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도 가고 싶어요. 주인님이 지켜주세요. 해주실 수 있잖아요."
"다시 생각해봐. 안 좋은 생각이야."
재차 주인님이 말렸지만, 비앙카는 오히려 더 오기가 생겼다.
나라를 말아 먹는 악녀의 모습을 꼭 제대로 보여주고 싶었다!
그녀는 밤새 찡찡거리면서 주인님에게 투정을 부렸다.
참고로 그녀의 투정은 섹스하는 내내 영향을 미쳤다.0
"알았어! 알았으니까, 그만해. 나 쓰던 게 있는데 너한테 빌려줄게."
"앗. 주인님 걸 빼앗아서 갖겠다는 건 아니었는데..."
"어차피 위험할 일 없어서 쓸모도 없는 거였어."
"꺄악! 감사해용♡♡"
하트를 펑펑 날리며 비앙카가 봉사를 위해 가슴 밑 부분을 손으로 들어 올렸다.
"주인님께서 제 소원 들어주셨으니까 오늘 제대로 서비스 해드릴게요♡"
"읏!"
그날, 귀여우신 주인님을 쪽쪽 발라 먹은 그녀는 주인님 몰래 황후를 찾아갔다.
다른 방법으로 취미 생활을 이어갈 수 있게 된 이상, 괜히 황후를 건드려놨다가 곪아 문제를 일으키면 안 되지 않겠는가?
자신이 만들어 놓은 일은 모두 수습하고 떠나는 게 맞았다.
황후도 비앙카에게 볼 일이 있긴 했던 건지, 그녀의 방문 요청을 흔쾌히 받아 들여주었다.